219화
백윤후의 집은 중세 유럽 귀족의 대저택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무려 5층이나 되며, 디귿 모양으로 이루어진 건물은 한눈에 다 담기에도 힘들 만큼 크고 아름다웠다.
아카데미 강의실 수십 개 동을 한곳에 이어붙인 듯한 엄청난 규모에 한수호와 친구들은 모두 입을 쩍 벌렸다.
“우리가 지금 포탈을 타고 유럽에 온 건가?”
“아니. 유럽이 아니라 판타지 세계로 튕겨 나간 걸지도….”
최지혁과 양소혜의 말에 모두가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집이 크기만 했지, 건물 안에 사는 사람은 몇 명 안 돼.”
백윤후가 별것 아니라는 듯한 말에 최지혁이 눈을 얇게 떴다.
“그래서 몇 명인데?”
“대충 170명 정도? 저녁때가 되면 그 반밖에 안 되고. 그래서 밤엔 늘 조용하지.”
“….”
더 이상 최지혁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낮이건, 밤이건 최소 80명 이상이 상주하고 있는 대저택이라니.
이건 거의 왕궁에 가깝지 않은가.
“자자. 놀라는 건 나중에 하고 일단 들어가기나 하자. 창피하게 밖에서 이게 뭐냐?”
백윤후를 제외하고는 이들 중 가장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장한설만이 크게 놀라지 않고 친구들을 독려했다.
“그래. 한설이 말대로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얼른 들어가자.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셔.”
백윤후는 마치 ‘봤지?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자랑하는 듯한 표정이 되어 친구들을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한수호는 그런 백윤후의 머릿속에 마나전음을 쑤셔 박았다.
[네 집도 아니면서 있는 척 쩐다?]
핵심을 찌르는 말에 백윤후가 찔끔했지만, 그렇다고 태도를 바꾸지는 않았다.
저택은 안쪽이 훨씬 더 고급스럽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성문만큼이나 커다란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학교 운동장만 한 홀이 나타났고, 거기서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마중을 나왔다.
한 손에는 깨끗한 수건을 걸치고, 한 손으로는 손님들의 짐을 들어주는 사용인들.
남자에겐 여자가, 여자에겐 남자가 한 명씩 따라붙었다.
“집은 천천히 둘러보고, 먼저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갈까?”
백윤후는 슬쩍 한수호의 눈치를 보고는 홀을 지나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 뒤를 따라 친구들이 움직였고, 한수호는 가장 후미에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정의국 국장에 오르기 훨씬 전에, 영국 국왕으로부터 귀족의 작위까지 받았다는 소문이 있던데, 진짠가 보네.’
한수호는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백진성에 대한 정보는 크게 떠오르는 게 없었다.
회귀 전에는 딱히 부딪칠 일도 없었거니와, 자기 주변의 일 외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던 터라 백진성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대신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굳이 정의국 국장이라는 지위가 아니더라도 백진성이라는 인물이 가진 권력은 결코 적지 않다는 거지.’
정의국 국장으로서 지위보다도 커다란 권력을 이미 쥐고 있었으니, 그의 신분을 가로채려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했다.
이대현이 이대성의 신분을 빼앗았듯이 말이다.
‘과연 백진성은 진짜 백진성일까?’
지금 한수호가 가장 궁금한 부분이었다.
한수호의 아버지인 한철형과도 친했던 걸로 보이는 백진성이 마화기를 차지하기 위해 친구와 동료들을 해친 걸까?
아니면, 진짜 백진성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고 다른 누군가가 화상을 핑계 삼아 얼굴을 성형함으로써 그의 신분을 차지한 것일까?
당장은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었지만, 뭐가 됐든 지금의 백진성이 한수호에게 적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어쩌면 백진성이 이프리트의 수장일지도 모르고.’
만약 오늘의 만남에서 그 사실이 확인된다면, 한수호의 첫 번째 목표는 백진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선 오늘 당장 백진성을 쓰러뜨려 인류의 미래에 암흑을 드리울 존재를 없애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엔 친구들도 함께 있었다.
잠깐의 흥분을 참지 못하고 백진성의 실체를 까버린다면 친구들이 위험해진다.
‘오늘은 정체를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그렇게 마음먹은 한수호는 가장 후미에서 친구들의 뒤를 따라갔다.
백진성이 있는 곳은 대저택의 후원이었다.
커다란 연못과 정원, 그리고 산책로까지 갖춰진 이곳은 마치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황궁의 정원 같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정원을 잠시 가로지르자 고즈넉한 정자 안에서 홀로 차를 즐기고 있는 사내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하얀색에 금테를 두른 찻잔을 기울이고 있는 40대 중반의 사내.
그가 바로 정의국 국장 백진성이리라.
백진성은 정의국의 국장이지만, 정의국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대단한 인물이었다.
비록 일존사왕오패에는 들지 못했으나, 오히려 오패보다도 강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말이 국장이지, 백진성은 정의국 최고 명령권자나 다름없었다.
정의국의 원로 5명을 제외하고는 백진성보다 높은 인물은 없었으니까.
“아버지. 친구들을 데려왔습니다.”
백윤후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백진성 앞에서 섰다.
그 뒤로 친구들이 줄지어 섰고, 공손한 자세로 백진성이 돌아보길 기다렸다.
“오, 드디어 왔구나.”
찻잔을 내려놓은 백진성이 의자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는 선해 보이는 얼굴로 백윤후의 친구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다들 반갑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젊은 영웅들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콩딱콩딱 뛰는구나. 내가 마치 새신랑이 된 기분이야. 하하하.”
부드러우면서도 무겁게 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
게다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무척이나 시원시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한설이에요.”
“전 양소혜입니다. 국장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가장 먼저 장한설과 양소혜가 자기소개를 했고, 곧이어 최지혁과 신소이, 이하윤도 인사를 올렸다.
가장 마지막이 한수호였다.
“장태산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평범하지만 무례하지도 않은 인사.
백진성은 모두의 인사가 마음에 드는지 연신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역시 하나같이 보통이 아니구나. 우리 윤후는 상대도 안 되겠는데?”
“그럴 리가요. 백윤후는 우리 중에서도 1, 2등을 다툴 정도로 강한 녀석인걸요?”
양소혜가 백윤후의 입장을 생각해서 살짝 치켜세워 주었다.
그러자 백진성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정말이냐? 내가 알기로는, 너희들이 아카데미 1학년 중에서는 최강이라던데…. 내 아들 녀석이 그 정도라고?”
백진성의 시선이 한수호를 살짝 훑고 가는 걸 알아챈 양소혜는 머리를 긁으며 헤헤 웃음을 흘렸다.
“정의국 국장님이셔서 그런지 모르는 게 없으신가 보네요. 사실, 장태산 저 녀석은 너무 독보적이라 비교 대상에 놓을 수가 없거든요.”
“역시, 그렇구나. 어쨌든 너희들이 윤후를 그렇게 높이 평가해 주고 있다니 무척이나 감사할 뿐이다. 자, 다들 배고플 텐데 뭐라도 먹으면서 이야기 나누도록 할까?”
백진성은 백윤후와 친구들을 정원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
어른 키보다 크게 자란 정원수들을 잠시 지나치자 시원하게 사방이 뚫린 잔디밭이 나타났다.
그곳엔 20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는 기다란 식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산해진미가 가득 깔려 있었다.
“다들 앉거라.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고.”
백진성이 손뼉을 치자 한쪽에 서 있던 사용인 네 명이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 백진성 옆으로 큰 덩치의 사내, 구진철이 급하게 다가섰다.
“국장님. 드릴 말씀이….”
백진성이 살짝 굳어진 얼굴로 사내를 돌아봤다.
“무슨 일이지?”
사내는 백진성에게 뭔가를 속삭였고, 그의 얼굴에 서리가 내렸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백진성.
그가 구진철에게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벽처럼 둘러쳐진 정원수들의 틈에서 훤칠한 키의 젊은 사내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어, 이런. 정말 손님들이 계셨네요?”
사내는 한수호와 친구들을 스윽 훑어보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사내의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잘생겼다.
연예인 뺨치는 외모를 지닌 한수호도 사내 앞에선 한 수 접어야 할 만큼 조각 같은 얼굴의 소유자.
한수호는 그 사내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강우진?’
강우진.
사왕오패 중에서 삼패창으로 불리는 강지훈의 아들이 바로 그였다.
한수호도 회귀 전에 몇 번 스치듯 본 것이 다였고, 특무부 요원으로 활동하면서 같은 작전에 투입된 적도 단 두 번뿐이라 아는 게 거의 없는 인물.
강우진은 한수호보다 2살 많은 마공 아카데미 선배였다.
마공사로서의 실력도 상당했지만, 그보다는 외모가 몇 배는 더 유명했다.
회귀 전, 한수호와 강우진은 수많은 마공사 중에서 잘생긴 외모로 어디서든 눈길을 끌었었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두 사람의 외모는 특출났고, 누가 더 잘생겼냐를 놓고 싸운 여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쪽에 관심이 없었던 한수호조차 강우진의 외모에 대한 소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강우진이 여기서 등장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에 한수호는 내심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강우진이 백진성의 제자라고는 해도 이 저택까지 마음대로 휘젓고 다닐 수 있는 건가?’
강우진은 삼패창 강지훈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정의국 국장 백진성의 제자였다.
그건 강지훈의 여동생이 백진성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관계였다.
하지만 강우진은 백진성의 제자라는 타이틀만 지녔을 뿐, 별다른 왕래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회귀 전의 한수호가 아는 건 딱 거기까지였으니까.
“어? 우진 선배가 왜 여기에…?”
장한설은 당연히 강우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귀부암왕 장현오의 딸로 키워진 이상, 사왕오패의 자식들과는 어쩔 수 없이 친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이다, 장한설. 근데 여긴 어쩐 일이야? 너도 내 스승님한테 한 수 배워보려고?”
강우진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임에도 아무렇지 않게 빈자리를 찾아 털썩 앉아버렸다. 그리고 앞에 놓인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기 시작했다.
“그런 건 아니고. 백윤후가 초대해서 놀러 온 거지.”
“초대? 백윤후, 저 녀석이?”
강우진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백윤후를 바라봤다.
그가 아는 백윤후는 성격은 더럽고, 실력도 고만고만한 별 볼 일 없는 후배였기 때문.
그가 스승인 백진성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터였다.
“어, 음…. 그게 사실, 그냥 친구들한테 신세 진 것도 있고 해서 식사 대접이나 하려고 부른 건데요.”
백윤후가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강우진이 피식 웃는다.
“큭. 넌 여전하구나. 사내새끼가 말 몇 마디에 쫄아서는. 아무튼, 인사나 하지 뭐. 난 강우진이다. 아카데미 3학년이고.”
강우진이 대뜸 자신을 소개하자 양소혜부터 한 명씩 다시 한번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 한수호는 속으로 여러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백진성…. 확실히 뭔가 이상해.’
조금 전, 백진성을 처음 보자마자 한수호는 개조 특성을 사용해 정보를 훑었다.
그런데 눈앞에 떠오른 백진성의 정보는 너무도 의외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머리] : 182(99(?))
[왼팔] : 176(99(?))
[오른팔] : 179(99(?))
[가슴] : 201(99(?))
*[마나] : 1,517(1,000(?))
[배] : 188(99(?))
[왼발] : 154(99(?))
[오른발] : 157(99(?))
어처구니없게도 백진성의 능력치는 이중괄호로 표시되고 있었다.
사왕오패처럼 99에 물음표만 있는 게 아니라 마치 한수호의 가슴 수치를 표시하듯 숫자가 두 개로 나타났다.
게다가 물음표까지 붙어서.
만약 두 개의 수치 모두가 백진성의 능력치라고 생각한다면, 특성을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선 지금까지 만난 마공사들 중 가장 강한 인물이었다.
거기다 얼마인지 예측이 불가능한 물음표까지 붙어있으니 사왕오패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백진성이 이프리트의 수장인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강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백진성만이 아니었다.
‘강우진의 능력치도 너무 수상하단 말이지.’
백진성에 이어 살펴본 강우진의 능력치.
단순히 수치만 본다면 강우진이 더 이상했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강우진의 7개 신체 항목의 수치가 모두 물음표였으니까.
머리도, 왼팔도, 오른팔도 모두 ‘?’로 표시되고 있었다.
그것도 한 항목당 물음표가 무려 4개였다.
[머리] : ????
…
[가슴] : ????
*[마나] : ?????
특히 마나 수치는 물음표가 다섯 개나 되고 있어서 더욱 더 의미심장했다.
‘설마, 물음표 숫자가 능력치 자릿수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이라도 그게 사실일 경우, 강우진은 한수호도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세계 최강자라는 소리였다.
잠시 그런 생각을 가졌던 한수호는 적어도 그건 아닐 거라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한수호 자신의 종합 능력치를 봤을 때, 신체 항목의 최대치는 999였기 때문이었다.
[신체외적능력] : 344/999
[신체내적능력] : 21/99
[마나] : 4,615(+780)/99999
[육체한계치] : 2/3
‘물음표가 자릿수를 의미하는 게 아니면 뭘까? 단순한 오류 표시일까? 아니면 네 개의 글자?’
능력치에 등장한 물음표로 인해 한수호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바로 그때였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친구들 틈에 끼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강우진을 바라보던 한수호의 눈앞으로 화면 노이즈와 같은 짧은 흔들림이 일어났다.
고개를 흔들어 이상함을 떨쳐보려고 했지만, 5초 간격으로 떨림 현상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한수호는 그 떨림이 대체 어디서 시작되는 건지 찾기 위해 스스로의 몸을 점검했다.
하지만 몸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최근 크게 증가한 초월적인 감각 능력까지 동원하자 드디어 떨림 현상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용마검이 진동하고 있어…?’
떨림의 주최는 다름 아닌 용마검 팔찌였다.
인벤토리 속에 집어넣은 상태임에도 한수호에게 떨림이 전달될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