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한수호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이런저런 일에 관여하게 되면서 죽었어야 할 사람을 살리고, 살았어야 할 사람을 죽인 적이 있긴 하다.
그로 인해 이렇게까지 미래가 바뀔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니 어쩌면 미래는 바뀐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래가 바뀐 게 아니라, 내가 아는 미래가 잘못된 거였다면?’
실제로는 지금의 한수호가 보고 듣는 게 진짜였고, 회귀 전의 한수호는 그저 장기판의 졸처럼 제한되고 가공된 정보만을 보고 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땐 깊게 생각하지 않고 특무부에 반하는 범죄자들과 몬스터를 때려죽이는 일에만 몰두했었지.’
회귀 전의 그는 시야가 무척이나 좁았다.
적이 달려들면 죽기 살기로 싸워서 죽였고, 적이 도망치면 끝까지 쫓아가 때려잡았다.
그런 한수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준비되었을 음모와 계략을 제대로 파악이나 할 수 있었을까?
‘미래의 특무부가 박살 낸 황도13궁은 빙산의 일각이었을 지도….’
한수호는 그랬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로 했다.
이젠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 지식이 모두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어느새 한수호가 모는 차는 김포의 삭시고개 근처에 도착했다.
사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차를 몰아가니 삭시고개 중턱에 위치한, 잡초가 허리까지 자라난 공터가 나타났다.
“여기서 세워주시면 됩니다.”
“팀원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만?”
“곧 도착할 겁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감사드리죠. 덕분에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을 수 있었으니까요.”
한수호는 이곳까지 오면서 자신을 ‘현’이라고 소개한 사내에게서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황도13궁의 세력 구도는 물론, 그들과 새한교의 유착 관계, 그리고 중국이나 일본에까지 넓게 퍼져 있는 놈들의 조직이 얼마나 방대한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기회였다.
가장 놀라웠던 건, 현이 소속된 조직에서는 ‘조짐’이라는 특성을 지닌 마공사 덕분에 게이트나 던전이 열리기 2시간 전에 장소를 특정할 수 있다는 정보였다.
이에 한수호는 그자를 어떡하든 만나볼 계획을 세웠다.
자신이 지닌 인챈트 스톤을 활용하면 열화판이긴 해도 ‘조짐’ 특성을 얻어낼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를 어떻게 만나는 것이냐였다. 그때, 현이 팀장을 깨우며 먼저 입을 열었다.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한수호는 자신의 하려고 했던 말을 현이 먼저 꺼내자 옳다구나 싶었다.
“글쎄요. 서로 소속된 곳이 다르니 공식적인 만남은 쉽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비공식이 되어야겠죠.”
현이라는 사내는 꽉 막힌 인물이 아니었다.
“좋습니다. 저도 현 씨와 같은 분과는 인연을 이어가고 싶군요.”
“다행입니다. 이건, 제 개인 번호입니다. 다양한 보안이 걸려있는 번호라 안심하고 이용해도 됩니다.”
현은 한수호에게 하얀 명함 카드에 번호를 하나 적어서 건넸다.
“며칠 내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기다리죠. 아무튼, 감사했습니다.”
현이 인사를 할 때, 팀장이 깨어났다.
그는 한결 나아진 상태로 정신을 차렸고, 이곳이 김포의 삭시고개 중턱임을 확인하더니 바로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눈 한수호는 다시 차를 몰고 삭시고개 아래쪽으로 빠져나갔다.
백미러로 멀어지는 두 사람을 힐끔거리던 한수호.
그때, 삥 하는 경고음과 함께 앞면 유리 위로 삭시고개 주변의 지도가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한수호는 홀로그램을 살피다가 바로 인상을 구겼다.
“고니. 이거 설마, 주변을 스캔한 결과를 보여주는 거야?”
홀로그램 중앙엔 자동차 모양을 한 파란 점이 있었고, 약 200미터 후방의 삭시고개 중턱 쪽엔 하얀 점 두 개가 보인다.
그런데 그 하얀 점 주변으로 꽤나 많은 수의 붉은 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대충 세어도 40개는 충분히 넘는 숫자.
그중 하얀 점 세 개는 붉은 점과 딱 붙어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거 설마…?’
한수호가 멈춰선 방향으로 움직이는 붉은 점도 꽤 된다.
[Warning! Warning!]
앞 유리창 한가득 붉은색 글씨로 경고 문구까지 떴다.
고니가 엄청난 감지 능력을 이용해 반경 300미터 내의 모든 지역을 스캔해 적과 아군을 구분지어 홀로그램으로 띄워준 것이다.
‘내가 빠지면 저 둘은 꼼짝없이 붙잡히겠어.’
붉은 점 숫자가 많긴 해도 한수호가 마음먹고 도망치면 절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현과 그의 팀은 달랐다.
지금 상황으로 보아, 탈출했다던 팀원들은 모두 붙잡힌 것으로 보였고 그들을 이용해 현과 팀장까지 붙잡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도와줘야 할까?’
한수호가 끼어들면 그들이 도망칠 기회를 확실히 만들어 줄 수 있다. 다만, 그러려면 제 실력을 발휘해야 했다.
이건 현이라는 사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속한 조직이 어디인지를 알아낼 좋은 기회였다.
‘얼굴을 확실하게 숨길 필요가 있겠어.’
현을 돕기로 한 한수호는 라그나로크 중 그랑검만 꺼내 허리에 끼웠다.
라뮬이나 로크는 몇 차례 꺼내서 사용한 적이 있어서 정체를 발각당할 위험이 있었지만, 그랑은 아직 제대로 사용해본 적이 없어 안전했다.
한수호는 허리에 그랑을 끼우고 고니에게 물었다.
“너 아까 그 현이라는 사내가 쓰고 있던 헬멧으로도 변신할 수 있어?”
[OK]
차량 앞 유리에 떠오른 오케이 글자를 확인한 한수호는 피식 웃고는 곧장 차에서 내렸다.
“고니. 바로 헬멧으로 변신 부탁한다.”
그르릉
차의 엔진이 대답하듯 소리를 낸 순간,
촤르르륵. 철컥.
커다란 중형차가 사라지고 사막여우가 나타났다. 고니는 곧바로 한수호의 얼굴을 향해 점프했다. 그리고,
슈아아아악
한수호의 얼굴에 달라붙더니 눈 아래 전체를 검은색의 뭔가로 휘감아 버렸다.
“고니야. 이건 헬멧이 아닌데?”
마치 스키나 보드를 탈 때 쓰는 두꺼운 안면마스크를 목까지 두른 것 같았다.
그런 한수호의 눈앞으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Upgrade]
“이게 헬멧 업그레이드 버전이라는 거냐?”
[YES]
고니가 그렇다는데 따질 수도 없다.
얼굴만 잘 가려지면 되니 문제 삼을 것도 없었다.
한수호는 골목길 벽에 바짝 붙어선 뒤, 마나를 일으켜 주변으로 마나파동을 뿌렸다.
감각의 동심원 안으로 살금살금 다가오는 적들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럼…. 시작해 볼까?”
작게 중얼거린 한수호. 그의 모습이 길쭉하게 늘어나는가 싶은 순간,
스슥
그 자리엔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현은 아직 혼자서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팀장을 부축하며 공터 쪽으로 향했다.
공터 위쪽은 숲이었고, 아래쪽은 주택가로 2, 3층짜리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야, 인마. 내가 누군지 까먹었어? 나 이윤철이야, 이윤철. 국가수호대 최강의 요원이라고. 이깟 상처에 비실거릴 내가 아니다.”
“지금 발에 힘 풀렸는데요?”
“잠시 피가 안 돌아서 그래. 금방 힘 붙을 거니까 걱정 마.”
자신들의 탈출을 도와준 고마운 사내가 떠나자마자 이윤철은 본래의 성격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다.
“아직 도착을 안 했나? 제가 연락해 보겠습니다.”
현이 공터 중앙에 서서 주변을 돌아보며 한 말에 이윤철은 바위 하나를 찾아서 그 위에 털썩 앉았다.
“휴…. 그래도 그 당채룡한테 걸리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냐. 죽다 살았다. 요단강 건널 뻔했다고. 짜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욕심을 부려서….”
“놈들의 세력 구도를 알 수 있는 정보가 코앞에 있으면 나라도 그랬을 거다. 그런 일에는 목숨을 걸 만하지. 위험하긴 했지만, 네 녀석 덕분에 천갈궁의 데이터 칩을 훔쳤으니 된 거지 뭐. 칩은 잘 가지고 있지?”
이윤철은 헬멧을 벗어 목 뒤로 넘겼다.
이들의 헬멧은 방검복에 부착된 형태로 되어 있어서 벗는다고 해도 손에 들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헬멧을 벗자 굉장히 순해 보이는 20대 후반의 사내 얼굴이 나타났다.
짧게 자른 머리에 까칠하게 자란 수염이 귀밑까지 이어져 있다.
며칠을 제대로 쉬지 못했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 잘 챙겼습니다. 본부에 귀환하면 바로 대장님께 전달해야죠.”
현은 자기 가슴을 툭툭 쳐 보였다.
“그래. 이걸 기회로 그 간악한 놈들을 싹 다 쳐내자고. 그런데, 이 녀석들 너무 늦는데?”
이윤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도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헬멧으로 계속 팀원에게 통신을 시도했다.
“송신은 되고 있는데, 수신을 못 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통신장비에 고장이 난 게 아닌….”
“아니. 이건 고장 따위가 아닌 거 같다.”
이윤철은 심각해진 얼굴로 주변을 살폈고, 곧 국가수호대 전용 무기인 소음총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자세를 낮추며 헬멧을 다시 뒤집어썼다.
현도 빠르게 전투 태세를 갖췄다.
적이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주변에서 밀려드는 불쾌한 감각이 그의 심장을 빨리 뛰게 만들었다.
“팀장님.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거 같습니다.”
현은 서북쪽 숲을 빤히 바라보며 조용히 뇌까렸다.
“시발, 운도 더럽게 없지. 힘들게 도망쳤는데, 그곳이 범의 아가리였구나.”
이윤철도 이미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의 느낌이 현실로 드러났다.
공터를 둘러싼 숲 전체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온갖 개인 화기를 들고 있는 양복 차림의 사내들.
그들 중 몇몇은 마공사의 탈출을 막기 위한 대형 매쉬건까지 들고 있었다.
매쉬건은 마나봉인 효과가 실린 그물을 발사하는 장치로, 단번에 반경 10미터를 뒤덮어 도망칠 수 없게 차단할 수가 있었다.
매쉬건에서 발사된 그물은 진급 마공사가 전력을 사용해야 간신히 뚫을 수 있을 만큼 방어력이 엄청났다.
그걸 본 이윤철은 탈출도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때, 이윤철과 현이 눈을 부릅떴다.
숲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사내, 오중현.
그의 뒤로 이윤철의 팀원 세 명이 포박된 채로 끌려 나오고 있었기 때문.
국가수호대 침투3조의 대원 다섯 명 중, 셋이 여기저기 상한 몸으로 무릎 꿇려진 모습에 이윤철의 얼굴에 분노가 피어올랐다.
그건 현도 마찬가지.
그래도 이윤철은 팀장답게 침착성을 잃지 않았다.
“네놈. 원하는 게 뭐냐?”
이윤철의 질문에 오중현이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는다.
“원하는 게 뭐냐고? 내가 반대로 묻지. 네 녀석들이 나한테 줄 수 있는 게 뭔가?”
오중현은 이들이 잠진도의 비밀 기지에 침투해 각종 정보가 담긴 데이터칩을 훔쳤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 칩이 지금 누구한테 있는지를 몰랐기에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윤철도 단번에 이를 눈치챘다.
“내 목숨을 원한다면 주겠다. 그러니 죄 없는 내 대원들은 풀어줘라.”
“하하, 이를 어쩌나. 네 목숨 따윈 필요 없는데? 네 동료들을 살리고 싶으면 목숨값에 맞는 계산을 치르면 되는 거고.”
오중현은 차갑게 웃으며 무릎 꿇은 국가수호대의 대원에게 다가섰다.
그런 그의 손에는 어느새 날이 잘 선 장검이 하나 들려있었다.
“긴 시간은 못 줘. 지금 당장 값을 치르거나, 목이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지.”
오중현의 손이 올라갔고, 장검은 당장이라도 내리칠 기세였다.
그때 현이 앞으로 나섰다.
“목을 치려거든 내 목을 쳐라! 내가 네놈의 인질이 되어줄 테니, 동료들을 놔줘!”
현은 자신으로 인해 동료들이 잡혔다는 죄책감에 스스로를 위험에 내던지려 했다.
하지만 그런 현의 마음은 오중현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거, 미친놈일세? 내가 뭐 하러 그리 귀찮은 일을 해야 하지? 거래는 간단하다. 값을 치를 테냐, 아니면 목을 치게 내버려 둘 테냐?”
현의 손이 움찔거렸다.
그의 품에는 데이터칩이 있었고, 그걸 내줘야 동료들을 살릴 수 있었으니까.
그런 현의 마음을 알아챈 이윤철이 그에게 통신을 날렸다.
-정신 차려, 현! 놈이 원하는 건 하나다. 그걸 내주는 순간, 우린 전부 죽는다.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다면, 데이터칩이라도 대장한테 넘기는 게 맞다. 너만이라도 도망쳐라. 기회는 내가 만든다. 우리의 죽음을 헛되이 하기 싫다면, 죽을힘을 다해 여길 벗어나야 한다!
이윤철의 각오서린 말에 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도 모르는 게 아니다.
오중현이 인질로 협박하는 건, 혹시라도 데이터칩이 파괴될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다.
데이터칩을 넘기면 두고 볼 것도 없이 몰살이었고, 주지 않는다면 동료들이 죽는다.
두 가지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외통수.
그렇다면 동료들의 희생을 발 판삼아 한 명이라도 살아남는 게 정답이었다.
-현. 너 같은 녀석을 팀원으로 둘 수 있어서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귀환하면, 대장한테 우리 모두 할 일을 다 했다고 꼭 전해 주고.
이윤철의 말에 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현은 눈물을 머금고 이곳을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팀장님. 부디…. 부디….
현이 마지막 말을 이윤철에게 전하려는 그때,
“시간은 길게 주지 못한다고 분명 말을 했을 텐데….”
오중현이 높게 치켜든 검을 가볍게 내리쳤다.
스칵
검이 스친 자리엔 현의 동료이자 선배였던 박원효의 목이 위치해 있었다.
툭. 투르르르.
박원효의 머리가 떨어져 바닥을 구르는 장면을 본 순간, 이윤철의 눈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죽여 버리겠다!”
분노에 가득 찬 외침이 터져 나왔을 때, 이윤철의 손에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유탄발사기가 들려있었다.
그건 이윤철의 특성, 무기 소환의 효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