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대법원 게이트를 벗어난 직후.
한수호는 스승 부부가 묵고 있는 모텔로 끌려가야 했다.
비돈귀살은 한수호에게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들은 한수호에게 대법원 게이트에 들어갈 거라는 사실을 말한 적이 없다.
그런데 한수호는 보란 듯이 대한맹 요원들과 팀을 짜서 정확히 그들이 있는 곳을 찾아왔다.
그것뿐인가?
전력을 다하진 않았다고 하나, 그들 부부도 상대하기 벅차했던 가면인을 상대로 한수호는 오히려 우위를 점했다.
만약 한수호에게 경고하지 않았다면 가면인을 쓰러뜨리는 것도 모자라 그곳에 있는 황도13궁의 궁도들까지 죄다 때려잡을 판이었다.
비돈귀살 부부도 한수호가 굉장히 강해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강해져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것뿐인가?
한수호는 작은 여우에서 전투 머신으로 변하고, 다시 어마어마한 크기의 드래곤으로 변신하는 괴물 같은 몬스터 봇까지 데리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존재.
무려 4급 게이트에서나 볼 수 있는 트윈헤드 오거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드래곤 봇이라니.
그런 봇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놀라웠고, 그걸 한수호가 애완동물처럼 다루는 모습은 경악 그 자체였다.
그래서 그 모든 의문을 풀고자 비돈귀살은 한수호를 끌고 모텔로 들어갔다.
그리고 약 1시간여에 걸친 심문이 이어졌다.
말이 심문이지 그냥 자식을 앞에 놓고 사실을 따져 묻는 편안한 분위기였다.
비돈귀살은 냉정하고, 인정머리가 없으며, 제멋대로인 인물이지만 한수호 앞에서만큼은 자식밖에 모르는 평범한 부모일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수호가 상당 부분을 숨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한수호는 비돈귀살을 찾아갈 수 있었던 이유로 서한광과 그의 딸 서은채를 핑계 삼았다.
우연히 서은채를 알게 되었고, 그녀의 각성을 도와준 인연으로 서한광까지 알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때마침 황도13궁의 은밀한 계획을 알게 된 서한광이 은밀하게 한수호를 불러들였고, 그로부터 비돈귀살이 대한맹을 적대시하지 않게 회유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갑자기 크게 강해진 이유는 깨달음을 얻은 덕분이라고 둘러댔으며, 드래곤 봇은 특무부의 봇 연구개발팀 소속이자 개인적으로 친해진 사기환에게 테스트 삼아 건네받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비돈귀살은 한수호의 말이 100% 사실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 없었기에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아무튼, 우리 수호가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했으면 그걸로 된 거지 뭐. 안 그래, 여보?”
주태란은 이쯤에서 그냥 넘어가자는 뜻을 넌지시 비췄다.
“그래야지. 이제 우리도 그 지긋지긋한 놈들에게서 완전히 해방되었으니 수호를 위험에 빠뜨릴 만한 일도 더 이상은 없을 거고.”
장한구는 목덜미에 새겨진 낙인과도 같았던 문신이 사라지자 무척이나 시원해했다.
“전 이전에도 위험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위험할 일 없습니다. 그러니 두 분께선 이제 섬에 돌아가셔서 혈맥보공법 수련에만 전념하시면 됩니다.”
“근데, 수호야. 너 스크롤에 이상한 함정이라도 숨겨져 있었으면 어쩌려고 무턱대고 그걸 찢어버린 거니?”
주태란은 황도13궁이 자신들을 쉽게 놔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스크롤에도 무슨 장난질을 쳐놨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바로 스크롤을 찢어 문신 효력을 없애지 않고, 신중하게 행동하려 했던 것이고.
“아, 그거요? 사실은 맹주께서 몰래 귀띔을 해 주셨어요. 스크롤에 아무 문제 없으니 그냥 사용해도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 서 맹주한테 그걸 알아볼 수 있는 아티팩트가 있었나 보구나.”
장한구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 이제 다 설명된 거죠? 그럼 이제 제가 한 가지 부탁을 드릴게요.”
“부탁? 부모 자식 사이에 부탁은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하면 되는 거지.”
주태란은 푸근한 미소를 띤 채 한수호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래, 뭐든 말해보렴.”
“지금 살고 계신 울도. 거길 떠나주십시오.”
갑자기 울도를 떠나라는 말에 장한구와 주태란 모두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유는?”
“황도13궁이 이대로 그냥 물러날 리가 없습니다. 제가 차지한 보랏빛 바위 아시죠? 그걸 다시 빼앗으려고 두 분이 사는 울도로 쳐들어갈지도 모릅니다.”
한수호는 그것이 가장 걱정이었다.
지금 당장이야 대한맹이 아무 타격도 없이 멀쩡한 상태로 촉을 바짝 세우고 있을 테니 잠잠하겠지만, 길어야 한 달? 어쩌면 한 달보다 이른 시점에 본격적으로 움직일지도 모른다.
그 전에 스승 부부를 울도에서 빼내야 했다.
그런데 한수호의 걱정 가득한 말과는 달리, 비돈귀살의 굳었던 표정은 금세 여유롭게 바뀌었다. 오히려 자신들을 걱정하는 한수호를 대견하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스승님. 사모님! 이건 그냥 이렇게 웃고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수호야. 이미 말했지 않느냐? 우린 황도13궁과는 두 번 다시 얽힐 생각이 없다고.”
“네.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럼 너도 알 것이다. 나와 네 사모가 아무 대비도 없이 그런 말을 했겠느냐?”
장한구가 주태란을 힐끔 돌아보며 환하게 웃는다.
“우리가 제자 하나는 참 잘 키워냈어. 제 앞가림보다 우리 걱정을 먼저 하는 아이라니…. 마음이 따뜻해지는구나.”
주태란도 더욱 환하게 웃음을 그리며 한수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제야 한수호는 장한구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했다.
“이미 울도를 떠날 준비를 마치신 거군요?”
“물론이다. 한 달 전, 네게 서울에 올라오겠다고 말한 시점부터 준비를 시작했지. 지금은 준비가 모두 끝났다.”
“그럼…?”
“오늘은 네 사모와 함께 여기서 푹 쉬었다가 내일 울도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리고 마지막 물건들을 챙겨서 그곳을 떠날 것이고.”
“아….”
한수호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황도13궁의 문신이 효력을 잃은 이상, 스승 부부가 마음먹고 모습을 감춘다면 아무리 그들이라도 찾아낼 수 없을 테니까.
“그럼 되었습니다. 이젠 저도 안심하고 학업에 전념할 수 있겠네요.”
“그래. 넌 다른 생각은 말고 학업에만 열중하거라. 네가 아카데미에 있는 이상은 아무리 황도13궁이라고 해도 널 어쩌지 못할 것이니.”
장한구의 말대로였다.
황도13궁은 이미 대한맹을 비롯해, 정의맹과 특무부까지도 척결 대상 제1호에 올려놓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이 아카데미에 있는 한수호를 목표로 삼아 조금이라도 이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오히려 큰 역풍을 맞아 존폐의 위험을 감수해야 할 상황에 처할지도 모른다.
그런 면으로 볼 때, 한수호는 상당히 안전하다 볼 수 있었다.
“수호야. 그런데, 넌 우리가 울도를 나와 어디로 갈지 궁금하지도 않니? 어쩜 물어보지도 않네?”
“당연히 궁금하죠. 이번엔 어딥니까? 내륙인가요? 아니면, 섬?”
한수호가 눈을 반짝이며 궁금해하자 주태란이 작게 한마디 했다.
“횡견도란다.”
횡견도.
울도에 비하면 상당히 작은 섬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외부의 접근이 어려운 장소였다.
그런데 섬 이름을 들은 한수호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횡견도라면….’
횡견도는 한수호의 미래 지식에 존재하는 섬이었다.
지금이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인도지만, 1년 정도 뒤에 그 섬에 5급 게이트가 발생하게 된다.
사실 5급 게이트면 스승 부부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한수호의 표정이 변한 이유는 다른 것에 있었다.
바로 그 게이트 안에서 엄청난 무구가 등장한다는 것.
그 무구의 이름은 바로 ‘뇌격창’이었다.
회귀 전의 2052년 9월, 횡견도의 산 정상에 5급 게이트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파악한 특무부와 정의맹이 섬에 대규모 마공사를 파견하게 된다.
하지만 게이트가 발생한 지 상당히 시간이 흐른 데다가 게이트 형성 당시의 웨이브로 뛰쳐나온 몬스터들이 하나도 처리되지 않은 상태라 숫자가 상당했다.
섬에 퍼진 몬스터를 처리하는 데만도 시간이 오래 걸렸고, 그로 인해 게이트 폐쇄가 늦어지고 말았다.
그것이 문제였다.
교활한 황도13궁은 그 틈을 이용해 몰래 게이트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뇌격창이라는 절세의 무기를 먼저 손에 넣게 된 것이다.
황도13궁이 뇌격창을 손에 넣은 이후, 정의맹과 특무부는 그들을 처리하는 데 더욱 애를 먹게 된다.
회귀 전의 한수호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특무부 요원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시점까지, 뇌격창에 목숨을 잃은 마공사가 70명이 넘는다.
또한 황도13궁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저항하며 특무부에 큰 피해를 남긴 것도 바로 그 뇌격창이었다.
결국, 사왕오패의 하나인 삼패창 강지훈이 뇌격창의 주인을 쓰러뜨린 뒤에야 황도13궁을 지상에서 지울 수 있었다.
‘하필이면 횡견도라니.’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한수호의 미래 수첩에 횡견도에서 발생하는 게이트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게이트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달려가 뇌격창을 손에 넣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스승 부부가 그 횡견도를 새로운 터전으로 삼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다니.
회귀 전과 뭔가 흐름이 달라지고 있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횡견도 게이트는 일반적인 게이트와 달리, 사람이 하나도 없는 무인도에서 발생한 특이한 경우라 특무부가 이를 알아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수호가 알기로, 특무부 마공사가 섬으로 파견된 시점은 2052년 9월이지만 게이트가 열린 건 그보다 수개월이나 앞선 시점이었다.
‘어쩌면 훨씬 더 빠를 수도 있고.’
한수호는 섬에 게이트가 열리면 스승 부부의 보금자리가 외부에 발각될까 봐, 그것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게이트가 열리는 시점을 누구보다 빠르게 알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게이트가 발생해도 곧바로 폐쇄한다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겠지.’
한수호는 뇌격창을 황도13궁에게 빼앗길 수 없었기에 스승 부부가 횡견도로 보금자리를 옮기는 걸 막지 않기로 했다.
대신, 충분한 주의를 줄 필요는 있었다.
“섬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바로 알 수 있게 미리 방비를 해 두셔야 합니다. 혹시 알아요? 무인도에 무서운 게이트라도 발생할지.”
농담처럼 은근슬쩍 꺼낸 말에 주태란과 장한구는 크게 웃었다.
“농담을 해도 말이 좀 되게 하렴. 무인도에 무슨 게이트가 열린다고…. 아무튼, 섬에 경계 시스템까지 잘 마련해 두었으니 걱정 말거라.”
“우리만 사용하는 보트도 미리 준비해 놨다. 놀러 오려면 미리 말해라. 그래야 우리가 널 데리러 육지로 나갈 수 있으니.”
나름 경계 시스템을 준비해 두었다는 말에 한수호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두 달 후면 방학이니 그때 찾아뵐게요.”
“그래. 그땐 우리 셋이 아주 거하게 파티를 벌여 보자꾸나.”
“괜찮으면, 서은채라는 아이도 데려오렴. 그 아이 덕분에 네가 우리를 찾아 게이트까지 들어올 수 있었으니 사례는 해야지? 수호, 너와의 미래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눌 겸. 호호호.”
주태란은 벌써부터 두어 걸음 먼저 앞서 나가고 있었다.
“15살짜리 애 데리고 무슨 미래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시네요.”
“어머, 얘 얼굴 빨개지는 거 봐? 말은 그래도 속마음은 아닌가 본데?”
“얼굴 하나도 안 빨갛거든요!”
한수호는 주태란의 장난에 휘말려 곤란해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하하호호 웃으며 편하게 담소를 나눴다.
마음 같아서는 오늘 이곳에 묵으며 하루를 더 스승 부부와 함께 보내고 싶었지만, 한수호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김재우와 친구들을 만나 인천 공항에 다녀오기로 했기 때문에 이곳에 길게 머물 수 없었다.
한수호는 스승 부부와 저녁까지만 함께하고 컨테이너 하우스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제 가려는 게냐?”
근처 음식점에서 식사를 마친 한수호가 모텔 앞에서 머뭇거리자 장한구가 바로 이유를 알아채고 물었다.
“네. 아직 할 일이 좀 남아 있어서요.”
“그 물건은 어쩌려고? 너 혼자 감당할 수 있겠니?”
주태란은 계곡에서 한수호의 몬스터가 꿀꺽해버린 보랏빛 바위에 대해 묻고 있었다.
“그건 제가 가지고 있는 편이 나아요. 보셨다시피 저한텐 아공간 아티팩트가 있어서 귀중품을 숨기는 데는 딱이거든요.”
“놈들도 그걸 어떡하든 얻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테니 조심하거라. 그 물건을 다룰 때도 특히 주의하고.”
“네. 걱정 마세요. 두 분 모두 건강 잘 챙기시고, 내일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냐. 자주 연락하마.”
스승 부부와의 즐거운 시간은 여기까지였다.
한수호는 스승 부부에게 환한 웃음을 그려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비돈귀살 또한 한수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한참을 서 있었다.
“못 본 사이, 정말 많이 컸네. 그치, 여보?”
주태란이 흐뭇한 얼굴로 묻자 장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다 이 스승이 훌륭해서 아니겠어? 뿌듯하구만.”
“스승만 훌륭해? 나는? 내가 젖 먹여 키운 건 아니어도, 업어서 재운 게 얼만데!”
“그야, 앞으로 안으면 수호가 숨 막혀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등에 업은 거….”
“뭐가 어째고 어째?”
주태란이 팍 인상을 쓰자 장한구는 괜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딴청을 부렸다.
“비가 오려나? 갑자기 삭신이 다 쑤시네. 크흠.”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는 장한구를 따라 주태란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뒤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