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너 뭐야?”
“네가 화장실이 저기에 있는지 어떻게 알아?”
“아무래도 여기 와 본 적이 있는거 같은데?”
우르르 쏟아지는 질문에 이하윤도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급히 입을 막았다.
하지만 그 모습이 더 수상했다.
“빨리 불어. 너 언니들 몰래 여기 와 본 거 맞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하윤이 당황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할 때, 한수호가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 툭 던졌다.
“저번에 요 앞에서 우연히 만나서 잠깐 집에 들렀었어. 한 5분 있었나? 근데, 왜?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냐?”
“…. 어, 맞다. 그랬었지. 하도 오래돼서 까먹었나 봐.”
이하윤도 급히 한수호의 말을 받았다.
상황이 이러니 양소혜 등도 더 따져 묻기가 뭐했다.
“아무튼, 수상해. 저번에 장태산 아플 때도 그렇고 말이야.”
양소혜는 미심쩍은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소혜야, 그만해. 괜히 둘 사이 초치지 말고 우린 우리의 굶주린 배나 채우면 되는 거야! 안 그래, 신소이?”
장한설이 화장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큰 소리로 말하자 신소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우리가 처음이라고 하윤이도 처음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의미심장한 말을 한 신소이는 싱크대에서 대충 손만 씻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그 옆자리를 백윤후가 냉큼 차지했다.
“라볶이는 뜨거운 불에 한 번에 확 끓여야 제맛이라더라고.”
백윤후가 라볶이를 준비하자 주변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한수호는 홈시어터를 준비하느라 가장 늦게 앉았는데, 재밌게도 이하윤의 옆자리만 비어져 있었다.
그렇게 7명이 거실 바닥에 앉아 즐거운 식사를 시작했다. 더불어 요즘 인기 절정을 구가하고 있는 초특급 SF 공포영화를 시청했다.
‘어스넷’이라는 비디어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를 통해 컨테이너 한쪽 벽면 전체를 화면으로 삼아 영화를 감상하니 영화관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2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식사와 영화 모두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최지혁의 희생이 남달랐다.
양소혜와 장한설 사이에 끼여 앉게 된 그는 무서운 장면이 나올 때마다 온몸을 두들겨 맞아야 했다.
영화가 끝났을 때, 최지혁은 엄청난 폭력에 넋이 나간 듯 멍해 있었다.
반면, 백윤후는 자기가 무서워 신소이 등 뒤에 숨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오히려 신소이가 머리를 잔뜩 내려뜨려 보이며 백윤후를 놀리기까지 해서 친구들 모두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 * *
드디어 목요일이 되었다.
이날은 스승 부부가 서울에 올라는 날이었기에 한수호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스승 부부를 만나러 길을 나섰다.
스승 부부가 숙소로 잡은 모텔은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였다.
한수호의 예상대로 모텔이 있는 지역은 서울 대법원이 위치한 서초구였고, 직선 거리 1.6킬로미터에 차량 이동시 13분이라는 상당히 가까운 장소였다.
한수호는 지하철을 이용해 고속버스 터미널 역으로 향했다.
‘2개월 만인가?’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스승 부부와 함께 살던 섬을 떠난 지 2개월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 놀랍다.
그동안은 한수호가 만들어준 혈맥보공법을 익히느라 섬에서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더니, 갑자기 이렇게 서울에 올라온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되었다.
5시 48분.
고속버스 터미널 입구에 서서 공법폰을 보고 있으려니 사모 주태란으로부터 문자가 날아왔다.
[방금 도착했다. 우리 아들 어디니?]
언제부터인가 주태란은 한수호를 정말 아들로 부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가족관계등록부상에도 아들로 올라가 있기 때문에 당연한 호칭이었지만, 한수호는 이 아들이라는 호칭에 늘 가슴이 떨렸다.
아들로 불릴 때마다 진짜 부모인 한철형과 이태희가 떠올랐기 때문.
그래서인지 아들처럼 대해주는 주태란이 너무도 고마웠다.
[터미널 입구에요.]
한수호가 답장을 보낸 지 몇 분 되지 않아, 장한구와 주태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드을~!”
주태란이 저 멀리서부터 엄청난 거구를 쿵쾅대며 뛰기 시작하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다.
175가 넘는 큰 키에 130킬로그램이나 되는 육중한 체구였으니 흡사 인간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
주태란은 ‘어, 어?’소리를 내고 있는 한수호를 와락 껴안았다.
한수호는 간신히 주태란의 육중한 무게를 견뎌냈다.
“수, 숨 막혀요!”
“어머! 미안, 아들. 너무 반가워서 오버했다. 호호호. 어디, 잘생긴 우리 아들 얼굴 한번 볼까나?”
주태란은 살집을 출렁대며 굵직한 손으로 한수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여전히 잘 생겼구나, 내 아들. 그런데, 살이 좀 빠진 거 같기도 하고. 여보! 오늘 저녁 어디로 예약했다고 했지? 거기 아들 좋아하는 닭고기 무한리필 되는 곳 맞지?”
“고기 종류는 뭐든지 다 있는 뷔페니까 걱정 말라고.”
몇 걸음 뒤에서 장한구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간만이구나. 주말에 와야 네가 학업에 지장이 없을 텐데, 괜히 미안하구나.”
“아무 지장 없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일단, 자리부터 옮기죠.”
세 사람은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피해 우선 모텔로 움직였다.
* * *
3시간 뒤.
한수호는 스승 부부와 함께 근처에 이름난 뷔페에서 배가 터져라 음식을 먹은 뒤, 다시 모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베란다에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 동생을 찾았다니 정말 다행이구나. 그런데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건 의외인데? 대체 누가….”
장한구는 한수호가 동생 한설아를 찾은 것 같다는 말에 기뻐하다가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는 말에 걱정이 가득해졌다.
“기억 관련 특성이 있으면 제삼자의 기억을 제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하지만 장시간 동안 유지하는 건 힘들지.”
주태란은 한설아의 기억에 손을 댄 자가 누구일지 유추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귀부암왕 장현오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사람의 기억에 조작질을 할 위인은 못되지. 네 동생은 장현오의 양녀가 되기 이전에 이미 누군가에 의해 기억을 잃은 게 분명해.”
“특성이 아니라면,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할 인물은 딱 한 명 밖에 떠오르지 않는군.”
“내 생각도 똑같아. 광의(狂醫) 방태식. 그자의 의술이면 1년이든, 10년이든 긴 시간 동안 기억을 조작하는 게 가능하니까.”
스승 부부도 한수호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방태식도 한때는 신의로 소문날 정도로 의술이 뛰어났지만, 언제부터인가 타고난 의술을 이상한 생체실험을 하는 데 사용하면서 ‘광의’가 되었다.
“얼마 전에 방태식이 인천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더군요. 거기서도 한 가족을 또 무참히 살해했고요.”
“흠. 그 소식은 나도 들었다. 그런데 내가 아는 방태식의 평소 수법과는 조금 다른 듯하더구나.”
장한구는 방태식과도 잘 아는 사이였는지, 뭔가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수법이라니요?”
“방태식이 천륜에 어긋나는 잔악하고 괴이한 실험을 하는 미친놈은 맞다. 한데, 지금까지 방태식이 실험체로 삼은 인간은 모두가 죽음을 목전에 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자들이었지. 그것도 본인과 가족의 동의를 얻고, 막대한 대가까지 지불한 상태에서 시행한 실험이라 이거다.”
“그래서 이번에 인천에서 벌어진 인간실험이 방태식의 평소 방식과 다르다는 건가요?”
“그렇지. 놈이 잔혹한 괴물이긴 해도, 멀쩡한 가족을 무턱대고 납치해 실험체로 삼을 정도로 무식하진 않거든.”
“그럼…. 방태식이 그 가족을 실험체로 쓴 건, 이미 그들이 죽기 일보 직전이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까?”
한수호는 장한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바로 이해했다.
장한구는 방태식이 희생자들을 실험체로 삼은 건 사실이지만, 납치부터 살해에 이르기까지 모든 걸 방태식 혼자 저지른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누군가 더 얽혀 있을 거 같단 말이지.”
“나도 같은 생각이야. 방태식 그자를 마지막으로 본 게, 9년 전쯤이었나? 그때까지만 해도 아예 정신 나간 미친놈은 아니었으니까.”
주태란 역시 장한구와 같은 의견을 냈다.
“두 분 말씀 꼭 참고하겠습니다. 혹시라도 방태식, 그자를 만나게 된다면 한설아에 대한 일을 꼭 알아봐 주시길 부탁드릴게요.”
“허어, 녀석도 참. 그야 당연한 거 아니겠냐? 녀석을 보게 되면 무슨 수를 써서든 붙잡아서 주리를 틀어야지.”
“그자도 보통이 아니어서 당신한테 붙잡힐 일은 없을걸? 나 정도는 돼야 어이쿠 이거 사람 잘못 건드렸구나 할거야.”
“수호야. 잘 봤지? 네 사모라는 사람이 이렇다. 네가 준 혈맥보공법으로 성취 좀 봤다고, 이젠 나까지 무시한단다. 서러워서 살겠나, 이거.”
“성취가 있으시다니 축하드릴 일이죠. 스승님의 파랑격에, 사모님의 벽력권이 합쳐진 ‘파랑벽력기’가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보일지 기대가 되네요.”
한수호는 파랑벽력기라는 단어를 말할 때 속으로 웃었다.
스승 부부가 혈맥보공법으로 파랑격과 벽력권이 합쳐진 기술을 만들었을 때, 그 명칭을 가지고 한참을 싸웠다는 걸 잘 알기 때문.
서로 기술명 앞에 자신의 무공을 내세우려고 아웅다웅했고, 결국 가위바위보로 장한구가 이겨서 파랑벽력기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주태란은 아직도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벽력파랑기’라고 부르고 있었다.
“벽력파랑기가 완성되면 가장 먼저, 너에게 가르쳐 주마.”
“허어. 나이를 먹더니 치매가 왔나? 수호는 우리보다 먼저 파랑벽력기를 펼쳐냈는데, 가르치긴 뭘 가르쳐? 혈맥보공법도 수호가 줬다는 사실을 까먹은 거야?”
“아니, 이 양반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시비조래? 수호야. 너 목에 걸고 있는 토템이랑 쇠고랑 다 내놔라. 아무래도 그거 네 스승이 써야 할 때가 온 것 같구나.”
주태란이 눈을 흘기자 장한구가 찔끔하더니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토템은 제가 아주 잘 쓰고 있습니다. 수련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고요.”
한수호는 팔목과 발목에 부착된 5킬로그램짜리 쇠고랑들을 주태란에게 내보였다.
사실, 이 쇠고랑들은 한수호에게 꽤나 중요한 제어장치로 활용되고 있었다.
최소 1킬로그램에서 최대 1,500킬로그램까지 무게를 축소, 확대할 수 있는 쇠고랑들.
한수호는 광폭화 5단계를 패시브로 사용할 때, 이 쇠고랑들의 무게를 1톤까지 늘려 몸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있었다.
오늘은 스승 부부를 만나기 위해 광폭화 패시브를 적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정말 의외로구나. 그 불편한 쇠고랑들을 아직까지도 그렇게 잘 차고 다니니 말이야.”
장한구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젠 제 몸처럼 느껴져서 불편함이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이게 없으면 이상할 정도라니까요?”
“거봐요. 수호는 당신처럼 저걸 구속 장치로 여기지 않는다니까?”
주태란이 삐죽거리며 한 말에 장한구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아마, 수호 이 녀석 취향이 SM 쪽이라 그런 게 틀림없다고.”
“아니, 이 양반이! 애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
스승 부부가 투닥이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한수호.
그는 때가 되었다는 판단에 스승 부부가 서울에 올라온 목적을 물어보기로 했다.
“저기…. 스승님. 그리고, 사모님.”
“응?”
“무섭게 왜 분위기를 잡니?”
스승 부부가 고개를 돌리자 한수호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질문을 꺼냈다.
“두 분이 오늘 서울에 오신 이유. 제가 알아도 되겠습니까?”
“여기 온 이유?”
장한구가 흠칫 놀라더니 주태란을 돌아본다.
주태란 역시 입맛을 살짝 다시며 장한구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말하기 불편하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한수호는 스승 부부에게 괜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편하게 말을 해준다면 가장 좋겠지만,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건 전적으로 스승 부부의 사생활이라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스승 부부가 대법원 게이트에 들어가서 그 게이트를 3급으로 진화시키는 주범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크흠. 뭐 불편할 것까지는 없다. 우리도 누군가와 거래를 한 것뿐이니까. 내일 네 사모와 난 서울의 한 게이트에 들어가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일을 해야만 우리가 네 앞에서 더욱 당당해질 수 있다는 것만 알아다오.”
“나도, 네 스승도 늘 너에게 미안했다. 고작 자존심 때문에 그 지독한 놈들의 마수에 빠져서 허우적댔으니 말이야. 그것도 내일이면 다 끝난다. 내일만 지나면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수호, 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게 될 거야.”
주태란이 한수호의 손을 꼭 쥐었다.
손에서 진정성이 느껴진다.
스승 부부의 말을 통해 한수호는 이들이 말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황도13궁! 아직도 놈들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거였나?’
한때 비돈귀살이 몸담고 있었던 거대 범죄조직, 황도13궁.
혈맥보전공라는 미끼에 걸려들어 어쩔 수 없이 황도13궁의 제자들을 거둬들여야 했지만, 이제는 그들과 연을 끊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자세한 건 말해줄 수 없어 미안하다. 하지만, 하나는 약속하마. 절대로 네가 생각하는 정의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장한구의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 간악한 황도13궁과의 거래이기 때문에 가볍게 볼 수만은 없었다.
어쩌면, 황도13궁에서는 이 순박한 스승 부부를 속여서 그들도 모르는 사이 대법원 게이트를 3급으로 진화시킬 트리거를 건드릴 계획인지도 모른다.
한수호는 잠시 고민했다.
스승 부부가 아예 대법원 게이트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야 할지, 아니면 스승 부부가 황도13궁과의 연을 확실하게 끊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