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일요일 아침.
컨테이너 하우스의 침실에서 눈을 뜬 한수호는 빵과 우유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뒤, 곧장 소원의 묘목을 꺼냈다.
아직 광폭화 5단계가 유지 중이어서 행여나 소원의 묘목이 부러질까 봐 극도로 조심했고, 가까스로 아무 문제없이 열매를 먹어 10NP를 획득했다.
‘어디 보자…. 오늘 일일 미션은 뭐가 나오려나?’
한수호는 즐거운 마음으로 오늘의 미션을 눈앞에 띄웠다.
[오늘의 미션]
-3대 900 각 8,000회
-획득 포인트: 0.5(x5)NP / 50(x5)LP
*광폭화 5단계 적용으로 일일미션 획득 포인트가 5배 증가합니다.
미션 내용을 본 한수호는 잠시 눈을 비볐다.
그런데 다시 살펴봐도 잘못 본 게 아니다.
‘5배 증가? 이거 실화냐?’
광폭화 5단계를 평상시에도 계속 적용시키고 있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광폭화 5단계를 사용하고 있는 상태에선 일일 미션으로 획득하는 포인트 또한 크게 증가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미션이 조금 빡세지긴 했지만, 어려울 건 없지.’
3대 900이면, 스쿼트, 벤치프레스, 데드리프트의 3대 운동을 총 중량 900킬로그램이 되게 하라는 의미다.
이미 궁급을 뛰어넘은 한수호에게 이 정도는 사실 어려울 게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 본다면 미친놈 소릴 듣겠지만, 한수호에겐 이 정도는 해 줘야 아, 이제 운동 좀 했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곧바로 운동실로 향한 한수호는 300킬로그램의 역기를 어깨에 올린 뒤, 정확한 자세로 스쿼트를 시작했다.
“훅…. 훅….”
한수호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이어질 때, 그 앞으로 고니가 쪼르르 달려와서는 가만히 쳐다본다.
그러다 마치 한수호를 따라 하듯 앞발을 들고 뒷발로만 일어서더니 무릎을 구부렸다 폈다.
하지만 사람과는 구조가 다른 다리였기에 바로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캬르릉
고니는 몇 번을 더 따라 해 보다가 자신은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철푸덕 엎어졌다.
그렇게 한수호 앞에 엎어진 고니는 운동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3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일일 미션을 마친 한수호는 10시쯤 광폭화 효과가 끝나자 다시 전투 영역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월과 대련을 한 뒤 나머지 시간에는 용의 박동과 용형4식을 연마했다.
전투 영역이 종료되기 10분 전, 한수호는 고니의 중형화 모습은 어떤 걸까 궁금해 변신을 요구했지만, 아쉽게도 아직 수리가 끝나지 않아 중형화와 대형화는 불가능했다.
대형화[1]에 해당하는 드래곤의 형태일 때, 이하이의 손에 워낙 큰 고장이 났기 때문에 앞으로 이틀은 더 지나야 했다.
한수호는 아쉬움을 접고 고니를 전투 영역에 그대로 둔 채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기숙사로 돌아가야 해서 고니를 데리고 갈 수 없었으니 전투 영역에 두어 월과 친분을 다질 기회를 준 것이다.
오후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오후 2시에 두 번째로 광폭화 5단계를 발동시켜 능력 2배를 획득한 상태로 힘 조절을 위한 적응에 들어갔다.
하지만 힘 조절은 쉽지 않았다.
쇄혼처럼 어느 한 부분만 강력해지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능력이 2배로 증가한 거라 몇 배는 컨트롤이 힘들었다.
그 덕분에 부숴 먹은 가구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의자, 침대, 탁자, 컵, 옷장, 티비 등등.
한수호는 급하게 다시 가구와 물건들을 구매하긴 했지만, 그날 하루가 완전히 저물 때까지도 힘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내일을 위해 기숙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 되어서야 간신히 제어가 되기 시작했고, 더는 집 안 물건을 부수지 않게 되었다.
‘이미 부순 물건은 아깝긴 해도, 광폭화에 적응했으니 된 거지 뭐.’
한수호는 자신이 부순 물건들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자, 이제 기숙사로 가 볼까나?’
한수호는 가벼운 걸음으로 아카데미 기숙사로 향했다.
* * *
평범한 월요일.
한수호는 광폭화 5단계를 발동시킨 상태로 강의실에 와 있었다.
지금은 손으로 가볍게 툭 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평급 마공사가 전력으로 공격한 파괴력이 나올 수 있기에 극도로 조심해야 했다.
“야, 장태산! 너 요즘 그 아재하고 너무 붙어 다니는 거 아니야?”
양소혜가 큰 덩치를 위협적으로 내세우며 다가왔다.
“그 아재?”
“와, 모르는 척하는 거 봐. 특무부 요원 있잖아, 그 김 어쩌구 하는 요원 아저씨.”
양소혜는 한수호가 2주에 한 번은 김재우와 함께 서울 곳곳을 쏘다니고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자세히 모른다.
“그분 28살밖에 안 먹었는데, 아저씨는 아니지 않나?”
어느새 최지혁도 나타나 한수호 옆 계단에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28살이면 내일모레 서른이잖아? 그럼 아저씨 맞지.”
“네가 28살 돼서 아줌마 소리 들으면 좋겠냐?”
“걱정 마셔. 난 나이 먹어도 얼굴은 끝장나게 동안일 테니까.”
“말은 잘한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장한설과 이하윤도 강의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장한설은 한수호와 친구들을 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고, 이하윤은 정확히 한수호만을 향해 미소를 그려주었다.
“최지혁! 너 이따가 다시 봐!”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기에 양소혜는 서둘러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최지혁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린다.
“왜? 할 말 있으면 해.”
“음. 다른 건 아니고…. 오늘 저녁에 따로 좀 볼 수 있을까 해서.”
“따로?”
“응. 따로. 내가 저녁 살게.”
“뭐 하러 그래? 그냥 내 방으로 와. 같이 라면이나 끓여 먹지 뭐.”
“그래도 되고. 암튼 저녁에 보자.”
“그래.”
최지혁은 그제야 조금 가벼워진 얼굴로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저러지?’
최지혁이 저렇게 무거운 표정을 하는 건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처음 최지혁과 대련을 펼쳤을 때, 한수호가 화룡인을 알아보자 최지혁의 표정이 딱 지금과 같았다.
남이 몰라야 할 비밀이 들통났거나, 남들은 모르는 누군가의 비밀을 알게 된다면 저런 표정이 나오는 것 같았다.
‘둘 중에 뭘까?’
한수호는 최지혁의 태도에 살짝 의구심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일이기에 그냥 러려니 했다.
수업은 지루했다.
중간 평가도 끝났고, 이제 기말 평가를 위해 천천히 빌드업을 해야 하는 중간 과정이라 당연했다.
수업을 진행하는 지평학 교수도 그런 지루함을 익히 아는지, 중간중간 농담을 섞어 가며 흥미를 끌어내려 했지만, 그건 잠깐뿐이었다.
학생들은 금방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오후에 실습도 없이 이론 강의가 계속되는 날이라 지루함은 더했다.
집중력이 남다른 한수호도 이날 만큼은 식곤증에 시달렸다.
스승 부부에게 배운 청심법을 사용하고서야 집중력을 되찾은 한수호는 어렵게 오후 이론 수업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 수업이 모두 끝났을 때, 학생들은 유난히 지친 기색이 되어 서둘러 강의실을 벗어났다.
하지만 몇몇 학생은 달랐다.
장한설을 비롯하여, 이하윤과 양소혜, 신소이는 수업이 끝나자 곧장 생기를 되찾더니 자기들끼리 재잘대며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1시간 뒤에 갈게.”
“어, 그래.”
최지혁은 슬쩍 눈치를 보고 한마디 한 다음 후다닥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때, 뒤쪽에서 조용히 있던 백윤후가 한수호 쪽으로 다가왔다.
“야, 장태산.”
“너 표정이 왜 그래? 아버지한테 혼났냐? 요즘 사고 안 쳐서 괜찮은 거 아니었어?”
백윤후의 얼굴에 오늘따라 주름살이 가득하다.
마치 긴 시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사람처럼.
“그건 아니고…. 너, 혹시 요즘 뭐 이상한 거 못 느꼈냐?”
“이상한 거?”
잠시 머리를 굴려봤지만, 딱히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 거 없는데?”
“흐음. 이상하네. 분명 뭔가 이상한걸 느꼈을 텐데…”
“갑자기 뭔 소리야?”
“잠깐만 기다려봐.”
백윤후가 갑자기 미간을 좁히더니 강의실 주변을 샅샅이 훑는다.
그러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한수호 옆 계단에 털썩 앉았다.
“지금은 괜찮은 것 같네.”
“너 뭐 하는 건데? 주변에 너 감시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있지. 나 말고 너를 감시하는 사람이.”
“…나를?”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었다.
한수호의 감지 수치는 10이나 되고 있어서 반경 10미터 내에서는 그 어떤 움직임도 정확하게 잡아낼 수가 있었다.
게다가 시각과 청각도 10까지 늘려놓은 상태라 누군가가 자신의 주변에서 얼씬거리면 모를 수가 없다.
그런데, 백윤후는 한수호를 감시하는 자가 있다고 말했다.
“너도 기다려 봐.”
이번엔 한수호가 백윤후를 기다리게 하고는 마나력을 끌어올려 주변 탐색을 시작했다.
아직 강의실에 남아있는 학생 세 명과 강의실 밖 복도를 오가는 많은 학생이 모두 감각에 잡히고 있다.
좀 더 감각을 확장해 건물 밖으로 넓혀 봤지만 특별히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은 발견할 수 없었다.
“방금 한 말, 무슨 뜻인지 말해 봐.”
“…. 너도 나 같은 아티팩트 가지고 있냐? 마나 파동이 엄청 멀리까지 퍼지는데?”
백윤후는 방금 한수호가 뭘 하나 싶어 슬쩍 마나력 탐지장치를 가동시켰고, 그 결과 한수호의 마나 파동이 반경 50미터까지 뻗어 나갔음을 알게 되었다.
“난 너 같은 금수저가 아니라 아티팩트를 쉽게 구할 수가 없거든? 헛소린 관두고 얼른 불어. 무슨 일이야?”
“하여튼, 융통성 없다니까. 다름이 아니라….”
백윤후는 어제 집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짧게 요약해서 한수호에게 말해주었다.
그 내용은 한수호로서도 매우 의외였다. 아니, 어찌 보면 의외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다.
백윤후의 아버지인 백진성이 아랫사람을 시켜 한수호를 감시하게 시켰고, 그에 대한 결과보고를 우연히 엿들었다는 게 백윤후의 말이었으니까.
백윤후의 말로는, 자신도 본 적이 없는 이상한 차림새의 사내가 백진성의 서재에 불쑥 나타났다고 한다.
문이 고장 난 건지, 아니면 실수로 완전히 닫지 않았던 건지 때마침 서재 앞을 지나고 있던 백윤후는 문틈으로 그 상황을 목격했다.
서재 안에서 백진성 앞에 서 있던 사내는 온통 검은색 옷차림이었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백진성은 그 사내에게 최근 한수호가 무엇을 하고 다녔는지에 대해 보고받고 있었기에 꽤나 놀랐다는 것.
검은 사내는 한수호가 친구들과 함께 가양 게이트로 1박 2일 다녀온 사실도 알고 있었고, 주중엔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도 다 알고 있었다.
놀라운 건, 검은색 옷차림의 사내가 보고를 마치자마자 촛불 꺼지듯 훅 하고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다.
백윤후는 그 모습에 전율을 느끼고 자신도 똑같이 감시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바로 감지용 아티팩트를 몸에 가지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 검은 사내 말이야. 내가 어제나 그제 뭘 했는지도 알고 있어?”
“어제 내용을 없었고, 그저께는 도봉구 요양 병원 근처에 있는 던전에 들렀다고 하던데? 맞아?”
“그거뿐이야?”
“던전에 꽤 오래 머물렀다가 아카데미 근처에 있는 컨테이너 하우스로 돌아갔고, 거기서 죽치고 있었다던데?”
“그리고?”
“그리고 뭐? 내가 들은 건 딱 거기까지야. 아버지가 알았으니 앞으로도 감시 잘하라고 말하니까 훅 하고 사라졌어.”
백윤후의 이야기를 들은 한수호는 뭔가 퍼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내가 어딜 갔는지는 알지만 던전 안까지는 따라 들어오지 못했어. 게다가 내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정보도 없고.’
그렇다는 건 정말로 누군가가 한수호의 뒤를 밟은 건 아니라는 것.
직접 뒤를 따르지 않고서도 목표물의 이동 경로를 알아 낼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목표물에 위치추적기를 달아 놓는다거나, 특정 아티팩트를 이용해 목표물의 움직임만을 추적하는 등의 방법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냄새로 내가 움직인 경로를 파악한다거나.’
한수호의 감으로는 냄새가 가장 유력했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마공 가문들 중에는 독특한 기술을 한계에까지 발전시킨 경우가 종종 있는데, ‘통영심가’와 ‘상주박가’의 가문이 그러했다.
통영심가는 독에 관한 기술이 놀랄 만큼 발달하여 산소마스크 없이 그 가문에 발을 디뎠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중독되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상주박가도 비슷했다.
이 마공가문은 추적술이 비상식적으로 발달했는데, 사람의 능력으로 10리나 떨어진 장소에 있는 특정 인물의 냄새를 쫓아 추적이 가능했다.
‘백진성이 상주박가의 마공사를 부리고 있는 건가?’
한수호는 순식간에 여기까지를 생각해 내고 있었다.
이미 위치추적기나 아티팩트를 이용한 탐색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려버린 상태.
“백윤후. 너 나 몰래 내 물건 아버지한테 가져다 바친 거 있지?”
뜬금없는 질문에 백윤후가 흠칫 놀란다.
“어? 이야. 역시 장태산은 다르네. 안 그래도 그거 말하려고 했는데…. 저번에 중간 평가 끝나고 나서 아버지가 네가 쓰던 물건 아무거나 하나 가져오라더라고. 그래서 딱히 훔치긴 뭐해서 네가 마신 음료수 빈 깡통 가져다줬지. 그 정도는 상관없지 않냐?”
“음료수 깡통을 줬다고?”
한수호로서도 솔직히 기가 막혔다.
자신이 사용하던 물건이 백진성에게 넘어간 갔고, 그 물건에 스며든 냄새를 이용해 상주박가의 마공사가 위치를 추적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 물건이 음료수 깡통일 줄은 몰랐다.
‘그 정도 물건만 있어도 추적이 가능하다니….’
상주박가의 냄새 추적술이 그 정도까지 대단할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백윤후가 문틈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걸 백진성 같은 인물이 정말 몰랐을까?’
신도 실수를 하는 마당에 사람이라고 어찌 실수가 없겠냐만은,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마치….
‘일부러 백윤후한테 보여준 것 같단 말이지.’
한 번 그런 생각이 들자, 거의 확신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럼 백진성은 왜 백윤후에게 자신이 한수호를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을까?
백윤후에게 일부러 그런 모습을 보여줬다는 건, 백윤후를 통해 그 사실이 한수호에게 전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고 행한 일이라고 봐야 했다.
한수호는 이것이 백진성의 계획에 의해 전달된 정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자신이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지를 생각해 봤다.
그 행동을 예측해본 한수호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백진성…. 그가 날 부르고 있어!’
이건 다름 아닌 백진성의 초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