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이제야 이걸 제대로 살필 수 있겠구나.’
할 일을 다 해놓고 나니 이제야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사실, 이 책자를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었다.
왜냐면 책자에 코스트가 부여된 순간, 책자의 정보를 볼 수 있었고, 그 정보엔 한수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구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캄의 비밀 책자]
-코스트: 7
-아스루나의 대신관 아캄이 기록한 책자입니다.
-아스루나의 역사와 멸망의 아픔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연자를 위한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인연자를 위한 비밀이라…. 그게 과연 무얼까?’
아스루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연자를 위한 비밀’이라는 문구를 보고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사람은 없으리라.
한수호는 이미 한 번 봤던 내용이지만,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다시 한번 책자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을 정독했다.
하지만 처음 내용을 봤을 때와 달라진 건 없었다.
아캄이 재건의 도시에서 한 일과 대마법사 엘로이와의 전투에 관한 이야기 말고는 특이한 사항이 보이지 않았다.
‘또 마나 회로를 건드려야 하는 건가?’
한수호는 입맛을 다시며 이제 막 백만을 넘긴 LP 포인트를 힐끔거렸다.
-보유 포인트: 176.0NP / 1,023,000LP
간신히 광폭화 특성을 5단계로 업그레이드시킬 LP를 모았는데, 책자의 마나 회로를 개조하다 보면 LP 10만 정도는 우습게 날아갈 터.
그러면 또다시 업그레이드가 물 건너가는 것이다.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한수호는 오기로라도 마나 회로를 건드리지 않고 책자의 비밀을 풀어보기로 했다.
우선 책자에 다른 틈새가 없는지 살폈고, 책 내용 속에 어떤 힌트가 들어있는 게 아닌지 다시 한번 자세하게 확인했다.
하지만 없다.
각 페이지의 모든 문장 앞글자를 따서 문장을 만들어 보려고도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뭐지? 뭘까?’
한수호는 이 책자에 담긴 비밀의 열쇠를 풀기 위해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한수호의 눈에 기이한 숫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페이지의 네 귀퉁이에 매우 작은 글씨체로 숫자가 기재되어 있었다.
[5p/12,17,25,33,59]
[11p/5,13,20,37,44]
…
..
마치 장난처럼 끄적거린 숫자여서 저자가 주석을 달아 놓은 건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거 혹시….?’
한수호는 5페이지를 펼치고 숫자에 해당하는 순서의 영문 단어를 조합해 봤다. 그런데, 그 단어 조합으로 문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문장을 읽어본 한수호는 기막힌 내용에 경악하고 말았다.
‘내 이름은 폰 노이만. 서기 1943년에 필라델피아의 레인보우 프로젝트의 개발자였다고?’
첫 문장부터 충격적이었다.
폰 노이만.
그는 아인슈타인과 더불어 최고의 천재로 추앙받던 인물이었다.
그가 오래 살아있었다면 그로 인해 제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거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
그의 이름이 유명해진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필라델피아에서 이뤄진 프로젝트 ‘레인보우’ 때문이었다.
프로젝트 레인보우는, 강력한 전압을 발생시키는 변압 장치 테슬라 코일을 이용해서 선체의 자기를 소멸시켜 레이더에 발견되지 않도록 하는 스텔스와 관련된 실험이었다.
폰 노이만은 아인슈타인과 함께 그 실험의 개발자로 참여했었다.
그런데 이 실험이 실행된 순간, 실험에 사용된 구축함이 순간 이동을 하는 기현상이 발생하게 되면서, 실험 참가자들의 몸이 선체에 들러붙거나 불타버리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혹자는 이 실험이 사실, 다른 세상으로 연결되는 포탈을 열기 위해서였다며 음모론을 펼치기도 했었는데, 나중에 확인된 바로는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었다.
놀랍게도 아캄의 책자에서 바로 그 폰 노이만의 이름이 나왔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까.
‘설마 아캄이 폰 노이만?’
문뜩 드는 의문.
한수호는 페이지마다 적힌 숫자를 토대로 계속해서 암호문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 1943년의 실험으로 난 포탈을 여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에서는 나에게 더 이상 이 실험을 지속하지 말라며 경고했고, 날 10년이나 철저히 감시했다.’
이어지는 내용은 한수호로 하여금 어째서 게이트가 생기게 되었으며, 그것이 누구의 손에서 시작된 것인지를 알려주었다.
폰 노이만은 아스루나의 대신관 아캄과 동일인물이었다.
그는 프로젝트 레인보우의 실험 결과로 포탈을 여는 원리를 발견해 냈고, 미국 정부가 그 원리를 이용해 본격적인 포탈 실험을 진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폰 노이만은 그 실험에서 제외되었다.
포탈의 최초 발견자나 마찬가지였던 폰 노이만은 자신을 배제한 미국 정부를 증오했고, 감시를 피해 몰래 자기만의 연구를 계속했다.
미국 정부는 본격적으로 포탈 연구와 각종 미스터리를 파악, 분석하기 위해 51구역을 설립했지만, 끝내 폰 노이만의 도움을 거부했다.
그건 폰 노이만이 너무 깊숙이 관여하게 되면, 세계를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폰 노이만은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말았다.
1955년에 51구역이 설립될 즈음, 폰 노이만은 혼자만의 힘으로 포탈 연구를 현실화시켰다.
자신의 집, 지하 연구실에서 포탈을 열어버린 폰 노이만은 미국 정부를 비웃으며 포탈을 넘어갔던 것.
포탈은 완벽하지 않았기에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그로 인해 폰 노이만은 아스루나 대륙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는 아스루나의 삶에 빠르게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의 천재적인 두뇌는 마법이 존재하는 아스루나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폰 노이만은 아스루나 대륙에 새로운 언어로서 영어를 퍼트렸다.
아캄어로 명명된 이 언어는 몇 년 만에 대륙 공용어가 되었고, 수많은 마법사와 공학자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대신관 아캄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폰 노이만은 아스루나의 대공학자 지크로우와 함께 힘을 합쳐 수많은 아티팩트를 제작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고, 아스루나 곳곳으로 퍼져나가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를 시기한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대마법사 엘로이였다.
오직 자신만이 칭송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엘로이는 아캄과 지크로우의 명성을 시기했다.
시기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고, 급기야 아스루나의 귀족들이 아캄파와 엘로이파로 나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 와중에 아캄은 아스루나에서도 포탈을 개발해 내고 말았다.
아무리 아스루나에서 명망이 높고, 추앙받는 존재가 되었다 해도 지구에 남겨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 봉인된 발자크가 태동하기 시작한 터라, 몬스터들의 발호를 막는다는 핑계로 포탈 개발에 모든 걸 쏟아부을 수가 있었다.
그 결과 포탈을 열었고, 지구로 돌아갈 길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
‘폰 노이만이 아캄이라니….’
이건 한수호로서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사실이다.
아스루나에서 영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이 의아했지만, 설마 지구의 과학자가 오래전에 포탈을 타고 넘어갔기 때문이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게이트가 포탈이었고, 그 포탈을 처음으로 열었던 인물이 폰 노이만이었구나.’
폰 노이만이 이 내용을 책자에 비밀스럽게 남겨 놓을 만했다.
만약 이 사실이 대중에게 알려진다면, 미국 정부는 작금의 게이트 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했다.
미국 정부는 폰 노이만의 가족을 빌미로 절대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일이 없게 하라며 협박했던 것이다.
그 내용은 이어지는 내용에 담겨있었다.
아스루나에서 포탈을 열게 된 폰 노이만은 10년 만에 다시 지구로 돌아왔지만, 놀랍게도 지구의 시간은 단 1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의 가족은 이미 미국 정부에 붙잡혀 간 뒤.
뒤늦게 폰 노이만이 포탈을 열고 그 너머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국 정부가 그의 가족을 인질로 삼은 것이다.
미국 정부는 비밀리에 포탈에 관한 모든 자료를 요구했다.
폰 노이만은 분노했고, 아스루나에서 얻은 이계의 마법으로 미국 정부와 외로운 전쟁을 시작했다.
역사엔 기록되지 않았지만, 폰 노이만과 미국 정부의 전쟁은 굉장히 치열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아무튼, 그 전쟁의 결과로 폰 노이만의 가족은 모두 살해되고 말았다.
결국 폰 노이만은 복수를 외치며 다시 포탈을 열어 아스루나로 도망쳤다.
그리고 지구 시간으로 삼십여 년이 흘렀을 때, 봉인 중인 발자크가 몬스터 군단을 일으켰고, 폰 노이만은 포탈을 지구로 열어 몬스터들을 지구로 보내버린 것이다.
아스루나의 시간은 지구 시간보다 100배나 빠르게 흐른다.
그만큼 아스루나의 인간들도 긴 수명을 살아가기 때문에, 처음 게이트가 열렸을 때까지만 해도 아스루나의 인류는 멸망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대마법사 엘로이가 발자크의 편에 붙게 되면서 아스루나의 인류는 빠르게 멸망하고 만 것이다.
‘지금은 폰 노이만도, 엘로이도 모두 죽은 거겠지?’
폰 노이만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150세에 가깝다.
아스루나의 시간으로 따지면 천 살이 넘게 되는 것이고.
그들이 살아있을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능성은 열어놓아야 했다.
‘어쩌면, 미국 정부에서는 이 게이트를 닫을 수 있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처음 포탈을 만들어 낸 폰 노이만에게서 받은 자료가 있을 테니, 그때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히든 카드를 손에 꼭 쥐고 그 어디에도 풀지 않다니…. 과연 미국 답네.’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지가 벌써 35년이 지났는데도 폰 노이만의 포탈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1943년의 필라델피아 레인보우 프로젝트도 모두 거짓이라며 사건을 은폐한 것만 봐도 미국이 바라는 건, 게이트의 폐쇄가 아니라는 걸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아스루나를 정복하려는 거겠지.’
지구의 자원은 이미 고갈되고 있었고, 언제 대재앙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데 지구와 유사한 환경에, 개발되지 않은 땅이 80%가 넘는 아스루나가 발견되었으니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한수호는 미국이 지금 아스루나를 침공하려는 허황된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발자크의 손에 지구가 먼저 멸망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하고 있겠지.’
그러다 문뜩 드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설마, 미국에도 이프리트의 힘이 닿고 있는 건 아닐까?’
이프리트의 힘이 대한민국에만 국한되어 있을 거라는 건, 너무 편협한 생각이다.
이프리트 정도면 미국뿐만이 아니라 다른 국가에 까지도 세력을 갖추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젠장. 내가 무슨 세계 정복을 노리는 악당 처치하는 히어로도 아니고.’
처음엔 악몽급 게이트의 발발을 막고, 가족의 안전을 챙기겠다는 간단한 생각이었는데 이젠 너무 많은 걸 알게 되었다.
2057년에 발발하는 악몽급 게이트가 발자크의 봉인이 풀리면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건 거의 확실해 졌다.
그리고 그 사건의 내면에는 이프리트라는 거대 조직이 깊숙하게 관여되어 있으며, 그들은 지금도 발자크의 봉인을 풀기 위해 틈새를 벌릴 궁리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 말고도 회귀자가 셋이나 더 있고 말이지.’
현재 예상되는 회귀자는 이산과 방태식, 그리고 김명중이다.
그들이 어느 시점에, 어떻게 회귀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도 한수호처럼 미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그걸 이용해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아, 복잡하다. 이제 그만 쉬고 싶네.’
전투 영역 잔류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직 40분이나 남아있다.
공법폰에 찍혀진 시간으로는 밤 10시 3분.
아직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래도 끝은 봐야지?’
아캄의 책자에 담긴 비밀도 풀었으니, 이제 남은 건 하나뿐.
한수호는 아캄의 책자도 아공간 관통 장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광폭화 특성에 대한 설명창을 눈앞에 띄웠다.
[특성: 광폭화]
-육체에 과부하를 걸어 30분간 상상 이상의 힘을 획득합니다.
-특성 단계: 4단계(4/7)
-4단계 효과: 근육의 밀도가 크게 강화되어 방어력이 증가하며, 모든 신체 능력을 5배로 상승시킵니다. 추가로 타인의 능력을 2배까지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단, 본인의 신체에 4단계 사용 시, 살인 충동이 급증합니다.
-주의사항: 2단계부터 광폭화를 적에게 걸 수 있으며, 70%의 확률로 자살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단, 이 경우 사용자의 몸이 주박에 묶여 적에게서 5미터 이상 떨어질 수 없게 됩니다.
-쿨타임 60분
-5단계 업그레이드 포인트: 1,000,000LP
광폭화 특성의 5단계 업그레이드를 위해 필요한 포인트는 백만.
이 광폭화는 4단계 상태만으로도 엄청난 효과를 가졌지만, 패널티가 있어 다소 사용이 꺼려졌던 특성이다.
‘5단계가 되면 어떻게 달라질까?’
한수호는 묘한 기대감에 설레이는 마음으로 업그레이드를 시작했다.
>>’특성: 광폭화’의 단계를 업그레이드합니다. 1,000,000LP가 소모됩니다. YES/NO
이제는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는 기분으로 YES를 선택하자, 온몸에서 기이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마치 약한 전기에 감전된 듯 저릿함이 느껴졌고, 춥지도 않은데 몸이 부르르 떨렸다. 잠시 후,
>>’특성: 광폭화’가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4단계=>5단계
-5단계 효과: 광폭화 2단계 효과를 12시간 동안 패시브로 전환합니다. 패시브 전환 시, 1회에 한해서 추가로 1분 동안 능력을 2배로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패널티가 사라집니다. 타인의 능력을 2배까지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드디어 광폭화 업그레이드가 끝났다.
그런데 새로 등장한 5단계 효과에 놀라운 문구가 보였다.
‘광폭화 2단계를 12시간 동안 패시브로 전환할 수 있다고?’
패시브.
이 말은 지금보다 2배나 되는 능력을 기본처럼 12시간 동안이나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는 기막힌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