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새하얀 백지에 그려지는 풍경화와 같은 배경.
그 배경이 자신의 집이라는 사실에 한수호는 뿌듯함을 느꼈다.
‘언제 봐도 멋지단 말이지.’
전투 영역 속의 집은 외관이 거의 완성 단계에 도달했다.
멀리서 보면 소담스러운 3층 주택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웅장함에 주눅이 들 만큼 큰 건물이다.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진 집이라 튼튼함은 말할 것도 없고, 생활의 편의를 위한 구조로 만들어져 불편함도 거의 없다.
집 안에 1평 크기의 엘리베이터도 존재했고, 문화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여유 공간도 충분했다.
월은 살이와 범이를 데리고 엄청난 속도로 건축에 매진하는 중이었다.
월은 집 내부 인테리어를 맡았으며, 범이는 집 옆에 새로 추가된 벙커 시설에 투입되었다.
살이는 월을 따라다니며 무거운 짐을 옮기는 역할을 담당했다.
한수호가 이곳에 왔음에도 그들은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봇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한수호.
문득 체류 시간이 표시되고 있는 시야 상단으로 시선이 향했다.
[01:58:32]
2시간.
어느새 전투 영역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2시간까지 늘어났다.
딱히 전투 영역의 마나회로를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체류 시간이 늘어난 건, 한수호의 마나력이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예전엔 마나력 증가가 너무 요원한 일이라 억지로 마나회로를 건드려 시간을 늘렸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 무기도 가져다 둘까?’
지금 한수호의 계좌엔 23억이 넘는 거금이 들어 있다.
장갑차나 전차 같은 대형 무기는 안 되도 무반동포가 달린 지프 차나 RPG, 또는 소형 레일건 정도는 구매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구매하려고 하니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좀 더 여유가 있을 때 생각하자.’
무기 구매에 대한 건 뒤로 미룬 한수호는 월을 돕기로 하고, 밖에 쌓여 있는 가구들을 집 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제야 월이 한수호에게 관심을 가졌다.
[주인은 굳이 힘 쓰지 않아도 된다.]
착하게도 주인이라고 굳은 일을 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 가구 들여놔 봐야 다시 재배치 해야 해서 소용없다.]
알고보니 자기 일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어젠 고마웠다.”
우드캐슬의 마공사 둘의 안전을 위해 일하던 월과 봇들을 갑자기 밖으로 데려갔는데도 불평 한마디 없이 충실히 자기 역할을 다해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였다.
[덕분에 주인 친구들 만나서 좋았다.]
월 역시 어제의 경험이 나쁘진 않았던 모양.
“그런데, 너…. 이하윤만 예쁘다고 칭찬했다며? 내가 너한테 그런 얘까지 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지.”
[했다. 이하윤이 얼굴 흉터만 없었으면 가장 예뻤을 거라고.]
“그랬던가? 뭐, 아무튼. 그 애들 질투심이 장난 아니니까 면전에서 다른 사람 예쁘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앞으론 주의하겠다.]
월은 적어도 한수호와 이야기 할 때는 이런 저런 토를 달지 않았다.
가끔 장난은 쳐도 거기에 악의가 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늘은 시간이 되는데, 어때? 한판 붙어볼까?”
한수호의 제안에 월이 눈을 반짝였다.
[콜]
한수호는 월과 함께 집 옆에 건축 중인 수련장으로 향했다.
지하엔 벙커가, 지상엔 광활할 정도로 넓은 수련장이 세팅되는 중이었다.
범이와 살이도 한자리에 모였다.
한수호는 세 기의 몬스터 봇의 신체 스탯을 빠르게 훑었다.
‘월은 벌써 궁급을 넘어섰고, 범이는 진급 초반. 살이는 진급 중반이로군.’
실로 엄청난 녀석들이다.
이름난 마공사들이 대부분 진급 수준인데, 범이와 살이도 이미 그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게다가 범이는 ‘강타’라는 기술을, 살이는 ‘조르기’라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가.
월은 한술 더떠서 기존의 ‘잔상’ 기술 외에 추가로 ‘파동권’과 ‘뇌격’이 생겨 있었다.
“월. 너 새로운 기술이 생겼네?”
[그걸 이제 알다니.]
“마나력도 거의 900가까이 되고?”
[출력 높이려고 엄청 노력했으니까. 그런데, 주인 출력은 왜 아직도 400을 넘지 못하지?]
월은 여전히 한수호의 마나력을 부분적으로만 읽고 있었다.
“그래도 너보단 셀 걸?”
[출력이 약하면 힘도 약하다.]
“너희 셋 모두 덤벼도 내가 이겨.”
[그럼 시험해 보겠다.]
월이 뭔가 각오한 듯한 눈빛을 내보이자 범이와 살이가 한수호의 좌우를 막아섰다.
“난 살살할 테니까, 너희들은 전력을 다해 봐.”
[알았다. 그럼 시작한다.]
월의 눈에 시작이라는 단어가 나타났을 때, 범이와 살이가 먼저 달려들었다.
녀석들은 지금 네 발 짐승의 형태라 땅을 살짝 박찼을 뿐인데도 엄청난 도약력으로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이에 한수호는 가볍게 얼음불 특성을 일으켜 이동속도 30%를 높인 뒤, 양손에 불과 얼음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시작은 가볍게.”
퍼벙
양손에서 붉고 하얀 구체가 마법처럼 뿜어졌고, 그 구체는 범이와 살이의 얼굴을 후려쳤다.
쿠웍
크럭
범이와 살이는 검보다 날카로운 발톱을 채 휘두르지도 못하고 뒤로 튕겨져 나뒹굴었다.
불곰처럼 커다란 짐승형태의 봇 두기가 그에 비해 왜소하기 이를데 없는 한 사람의 가벼운 손짓에 나가떨어지는 모습은 굉장히 낯선 광경이었다.
하지만 두 봇의 내구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크와아아앙
크르르르릉
한차례 나뒹굴다가 바로 자세를 바로한 범이와 살이가 자세를 낮추며 한수호를 향해 으르렁 거렸다.
월의 컨트롤에 의해 전투 모드에 들어가서 그런지 적어도 지금만큼은 주인이 아닌 적으로 인식하는 모양.
한수호는 그런 두 봇을 돌아보다가 어서 덤벼 보라며 손을 가딱거렸다.
그때, 두 봇이 형태를 변화시켰다.
콰드드득. 차르륵.
신체 곳곳이 튀어나오고 벌어지더니 접히고 펴지면서 두 발로 선 거인 몬스터로 모습이 변했다.
범이는 호랑이 얼굴을 한 3미터의 거인이 되었고, 살이는 코끼리 코를 한 4미터의 거인이 되었다.
두 거인은 마치 숄더어택을 하려는 듯 쿵쾅대며 달려들었다.
범이는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런데 주먹을 휘두르는 폼이며, 방식이 마치 복싱 선수를 연상케 했다.
3미터의 거구로 풋워크를 해보이며 한수호의 머리와 복부를 향해 스트레이트와 어퍼를 빠르게 꽂아 넣었다.
살이는 더욱 무식했다.
4미터의 거구로 한수호를 찍어 누르려고 했고, 어깨며 팔, 다리를 거머쥐려고 안간힘을 썼다.
범이의 강타 스킬과 살이의 조르기 스킬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었다.
한수호는 범이와 살이가 지닌 스킬에 어느 정도 위력이 담겼는지를 알기 위해 일부러 움직임을 멈췄다.
단숨에 살이의 우왁스러운 손길에 어깨를 붙잡혔다.
살이는 한수호의 어깨를 짓누르며 팔꿈치쪽으로 손을 미끄러뜨렸고, 그대로 관절을 꺾어 겨드랑이에 끼웠다.
왼손으로는 한수호의 목을 휘감고, 오른손으로는 팔과 다리를 고정해 옴짝달싹 못하게 고정시켰다.
그사이 범이의 스트레이트가 정확히 한수호의 얼굴을 가격했다.
꽈앙
번개가 치는 듯한 임팩트가 터지며 한수호의 머리가 홱 돌아갔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범이는 마치 샌드백을 치듯 거침없는 타격을 이어갔다.
스트레이트에 어퍼컷, 훅이 속사포처럼 뿜어져 나왔다.
퍼버버버벅
한수호의 온몸에 사람 머리만 한 주먹이 마구 꽂혔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우득
뭔가 관절이 어긋나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쿠웨에에엑
살이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튕겼다.
녀석의 두 팔은 마치 뜯겨나간 듯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축 늘어져 있었다.
뒤이어, 쉼없이 주먹을 꽂아넣던 범이의 옆구리가 확 꺾이더니 10여미터나 날아가 바닥에 내팽게 쳐졌다.
휘슈우….
한수호의 팔과 다리에서 희뿌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의 손과 발은 새빨갛게 달궈진 상태였다.
쇄혼.
한수호는 최소한의 마나력만을 이용해 3할 수준으로 쇄혼 특성을 발휘한 것이다.
그런데 한수호의 눈에 놀라움의 감정이 담겼다.
그는 자신의 팔다리를 훑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젠 팔과 다리 모두에 쇄혼을 걸 수가 있는데?’
원래는 팔 한쪽, 또는 다리 한쪽에만 쇄혼이 적용되었다. 그런데 방금 한수호가 쇄혼을 발동시켰을 땐, 쇄혼을 적용할 수 있는 범위가 확 늘어나 있었다.
그때였다.
콰앙
저 앞에 있던 월이 바닥을 박차며 날아들었다.
좌우로 빠르게 발돋움을 하던 어느 순간,
스륵
월의 신형이 다섯 개로 늘어나더니 한수호의 사방을 덮쳤다.
월의 스킬, 잔상.
이젠 분신술이나 다름없게 된 잔상 스킬에 한수호는 온몸으로 월의 공격을 받아내야 했다.
그 공격을, 한수호가 모조리 막아 냈다.
896이나 되는 마나력을 지닌 월의 공격에는 엄청난 파괴력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쇄혼을 팔과 다리에 두르고 있는 이상 그 어떤 공격도 통할 수가 없었다.
꽝꽝꽝꽝꽝
월의 공격과 한수호의 방어가 마주칠 때마다 엄청난 타격음이 터졌다.
평범한 시력으로는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의 빠른 움직임이라 허공에서 번쩍거리는 이팩트만 보일 뿐이었다.
월은 잔상이 통하지 않자, 바로 공격 방법을 바꿨다.
뒤로 훌쩍 물러난 뒤, 기를 모으는 자세로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순간, 월의 주먹 위로 푸르스름한 기운이 맺혔다.
마나력의 응집.
과연 이게 몬스터 봇이 펼치는 기술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월은 그대로 날아들며 한수호를 향해 주먹을 뻗어 냈다.
후웅
묵직한 파공성과 함께 날아든 주먹.
한수호도 피하지 않고 주먹을 마주쳤다.
붉게 달아오른 손으로 월의 푸른 주먹을 마주친 순간,
꽈아앙
주변이 크게 진동할 정도의 폭발이 일었고, 그 폭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꽈앙. 꽈과과광.
마치 물 위에 떨어진 돌맹이가 수면 위에 파문을 일으키듯, 연속적으로 충격파가 뿜어졌다.
촤르르르륵
한수호가 그 충격파에 밀려 뒤로 10여미터나 밀려났을 때, 월은 양손을 하늘을 향해 뻗어 올렸다.
콰지직
월의 손으로 엄청난 뇌전이 떨어져 내렸다.
뇌전을 손에 담은 상태에서 월이 양손을 한수호 쪽으로 내린 그 순간, 어마어마한 양의 뇌전이 정면의 모든 걸 쓸어버리듯 뿜어져 나갔다.
한수호도 이번 공격만큼은 정면에서 받아내기 힘들었는지, 급히 손바닥을 펼쳐 내며 얼음불로 방어막을 형성시켰다.
우웅
손바닥 끝에서 시작된 작은 울림.
그 울림은 순식간에 3미터 넓이에 1미터나 되는 두께의 얼음 방패를 만들어 냈고, 뇌전은 그 방패 위에 직격했다.
꽈지지지지직
뇌전은 얼음 방패의 표면으로 미끄러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치 뇌전의 소나기를 얼음 우산을 펼쳐 막아 내는 듯한 장면이 펼쳐졌다.
찰나의 번쩍임 직후, 눈부신 뇌전의 빛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희뿌연 연기 속에서 드러난 자리엔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얼음 방패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한수호는 그 자리에 없었다.
어느새 멀리 떨어져 있던 월의 옆으로 움직여, 손가락으로 월의 뺨을 꾹 밀어내고 있었다.
“끝났지?”
한수호가 히죽 웃으며 하는 말에, 월이 눈으로 말했다.
[주인. 강하구나?]
“강하지. 그러니까 네 주인이고.”
[출력이 362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나니까.”
[주인이라서?]
“어. 나라서.”
한수호는 피식 웃고는 몇걸음 물러섰다.
주변을 보니 이제 막 공사가 시작된 수련장이 난장판으로 변해버렸다.
자재들 상당수가 월의 뇌전에 맞아 녹아 버렸고, 바닥 곳곳이 뒤집어져 있었다.
“이거, 내가 한 거 아니다? 월, 네가 만든 결과야.”
[나도 안다. 파동권 스킬과 뇌격 스킬을 쓰면 주변이 초토화되니까.]
파동권과 뇌격은 방금 월이 사용한 스킬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왠지 낯설지가 않은 이름이요, 스킬 효과였다.
“월. 너 혹시 내 파랑격하고 벽력권을 가지고 파동권이랑 뇌격을 만들어 낸 거냐?”
[당연하지. 내가 저번에 말했다. 혼자서도 충분히 학습할 수 있다고.]
하긴, 그런 말을 월이 하긴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대단한 스킬을 월 혼자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 했다.
한수호는 다시 월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척 올렸다. 그리고 눈을 반짝거렸다.
“월. 파동권이랑 뇌격, 나도 가르쳐 줘라.”
한수호에게 있어 배움에는 쪽팔림도 필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