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화륵. 화륵.
이하이는 자신의 검, 혼마청검을 뒤덮은 화염의 기운을 황급히 떨쳐냈다.
다행히 한수호가 후속 공격을 이어가지 않아 이하이는 자세를 바로잡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밀려나며 바닥에 만들어낸 두 줄기 자국을 훑었다.
‘내가 밀리다니.’
최근 들어 가장 놀라운 경험이었다.
비록 전력은 아니었다 해도 진급 끝자락에 오른 마공사까지는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위력을 담았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이 밀리고 말았다.
한수호의 검을 막은 손이 아직도 파르르 떨린다.
혼마청검도 그 강한 충격에 전율하는지 웅웅 소리를 내며 공명하고 있었다.
‘이 녀석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이하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캔 렌즈로 다시 한번 한수호의 마나력을 살폈다.
[362]
아무리 봐도 362다.
이 수치는 진급 중간 정도에 불과하다.
‘보이는게 다가 아니라는 건가?’
아버지 이산이 말하길, 세상엔 수치만으로 가늠하기 힘든 기이한 힘을 지닌 자들도 종종 등장한다고 했다.
그러니 스캔 렌즈의 숫자만 믿고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말라고 늘 강조했었다.
지금까진 스캔 렌즈로 읽힌 숫자에 예외는 없었다.
자기 앞에서 건방진 표정으로 자신을 깔아보는 녀석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이하이는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생각에 일단 대화로 풀어보기로 했다.
“식당에서 들은 것뿐이야. 귀가 좀 밝은 편이라서.”
한수호는 여전히 불길을 내뿜고 있는 라뮬을 거두어 다시 검집에 꽂았다.
이하이의 검을 쳐냈을 때의 충격으로 손바닥이 얼얼했지만,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여기까지 따라들어온 목적은?”
“네가 동행을 극구 거부하길래 대체 뭐 하려고 그러나 싶어 뒤를 밟았지. 호기심을 참을 만큼 인내심이 없는 몸이라.”
“웃기는 소리. 내가 바본 줄 알아? 넌 애초부터 이 곳에 들어오는 방법을 알고 있었어. 여긴 내 뒤를 밟는다고 쉽게 따라 들어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니까.”
이하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대신전에 설치된 비밀 장치를 알아야 지하 계단이 열리고, 거길 내려와도 마법의 벽을 지나야 한다.
미리 아는 게 아니라면 우연히 알게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
이하이는 한수호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이곳에 숨어들은 거라고 확신했다.
그녀의 반문이 너무 직접적이어서일까?
한수호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틀린 말이 아니긴 해. 그런데 말이야. 네 입에서 이프리트라는 이름이 나올 줄은 나도 생각을 못했거든?”
슬슬 정보를 캘때가 되었다.
한수호는 이하이가 이프리트와 한패가 아니라는 건 알아챘고, 그녀의 신체 스탯이 높긴 해도 자신에 비해 압도적인 수준까진 아니라는 걸 방금 전의 한수 교환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이하이에게 궁금한 걸 캐묻고 싶어졌다.
“너…. 이프리트도 알고 있군. 어디서 그 이름을 들었지?”
“여기저기 쏘다니다가 우연히 들었다고나 할까? 듣자 하니 수장이 혈마 신유라지?”
한수호는 은근슬쩍 혈마 신유의 이름을 꺼내 이하이의 반응을 살폈다.
이프리트의 수장이 누구냐고 직접적으로 물으면 대답을 해줄 것 같지 않기에 확률 게임하듯 신유라는 이름을 던져본 것이다.
그런데 이하이의 반응이 이상하다.
마치 한수호의 의도를 꿰뚫어 보는 듯, 눈매를 좁혔다가 피식 웃는다.
“후후. 그랬군. 아는 게 없어서 날 통해 정보를 캐내 보겠다, 이거였네.”
이하이는 머리가 꽤 잘 돌아갔다.
하지만 잔머리는 한수호가 한 수 위였다.
그녀의 이 말로 적어도 이프리트의 수장이 신유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아낼 수 있었으니까.
‘이제 대상은 넷으로 압축된 건가?’
단체 사진 속 인물 중, 현재까지 살아있는 사람은 단 일곱.
그중 이산과 신유가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니, 엄마 이태희까지 빼면 단 네 명만 남는다.
사자도왕 송혁.
특무부 본부장 유대룡.
새한교 교주 박새한.
정의국 국장 백진성.
‘이 중 하나, 어쩌면 둘 이상이 이프리트를 이끌고 있다는 건데….’
한수호는 유대룡 만큼은 대상에서 제외하고 싶었다.
그가 얼마나 아버지와 친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회귀 전의 자신에게 친아버지 이상으로 자신을 아껴준 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프리트의 수장을 특정함에 있어서는 작은 예외도 둘 수 없었다.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 때문이라도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그런데, 이하이. 네가 쥐고 있는 그 무기랑, 눈에 끼고 있는 렌즈도 제작 특성을 지닌 마공사의 작품인가?”
한수호는 괜히 대답을 회피하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상대가 답을 내주지 않으니 자신 또한 답을 줄 이유가 없었다.
이는 이하이도 마찬가지.
“네가 차고 있는 그 무기들도 보통 물건은 아닌듯 한데?”
이하이는 한수호가 허리에 찬 착용구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이거? 보통 물건은 아니지. 정보를 읽는 렌즈와 혼마청검과 비교해도 전혀 꿀릴게 없을 정도로.”
“그걸 어떻게…?”
이하이는 다시 한번 놀랐다.
한수호가 그녀가 지닌 아티팩트에 대한 걸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까.
이하이는 스캔 렌즈를 사용했음에도 한수호가 지닌 무기들의 정보를 거의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정보는 무기들의 이름뿐이었다.
[집념의 검, 라뮬]
[희생의 검, 그랑]
[용기의 검, 로크]
볼 수 있는 정보는 이게 다였다.
반면, 한수호는 개조 특성 덕분에 이하이가 지닌 아티팩트에 대한 정보를 꽤 자세히 읽어낼 수 있었다.
[스캔 렌즈]
-코스트: 38
-횟수당 5의 마나력을 소모하여 목표의 정보를 스캔한다.
[혼마청검]
-코스트: 74
-7대 마화기를 상대하기 위해 아캄이 제작한 혼돈의 무구 중 하나입니다.
-강력한 마나가 깃든 수(水) 속성의 검입니다.
-검을 쥔 자의 능력치를 높여주고, 검으로 펼쳐지는 모든 공격의 위력을 크게 증가시킵니다.
정보 중에 한수호의 눈길을 끄는 내용이 있었다.
7대 마화기를 상대하기 위해 아캄이 제작한 혼돈의 무구.
즉, 혼마청검과 비슷한 위력을 지닌 무기들이 더 존재한다는 것이다.
‘코스트가 74면, 그랑보다 가치가 떨어진다는 거네.’
그랑의 코스트는 80.
혼마청검보다도 6이 높다.
설명으로는 7대 마화기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무기라는 말.
한수호가 가지고 있는 기본 용마검만 해도 123이라는 코스트가 부여되어 있고, 진.용마검은 무려 700이 넘는다.
‘무기빨은 내가 확실히 좋구나.’
신체 능력은 아직 이하이보다 달리지만, 지니고 있는 무기의 능력은 압도적으로 자신이 높다는 사실이 나름 흡족했다.
“긴 말은 필요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날 네 아버지에게 데려가라.”
“뭐?”
“뭘 놀래? 네 아버지가 이산이라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아나 봐?”
한수호의 말에 이하이는 크게 격동하는 반응을 보였다.
자신의 이름을 아는 것과 아버지가 이산이라는 걸 아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이산은 이프리트의 요원들에게 쫓기는 상황이었고, 어디서 이름이라도 흘러나갔다간 당장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으니까.
게다가 자신의 마나력 6할이 담긴 공격을 받아낼 정도로 강한 녀석을 함부로 아버지에게 데려갈 수도 없었다.
“네 진짜 정체를 모르는 상태로는 어디도 데려갈 수 없어. 여길 나서는 것도 네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거다.”
이하이는 불안 요소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특성은 ‘귀검’.
이른바 귀신들린 검으로 한 번 펼쳐지면 상대의 생명을 반드시 빼앗는 공포스러운 특성이다.
아버지 이산을 알고, 이곳 보더쉘터에 대한 비밀까지 알고 있는 두 학생을 그냥 내보낼 수는 없는 일.
‘귀검으로 둘 다 이곳에 묻어버린다!’
이하이의 마음 속에 살기가 담아지기 시작했다.
그 즉시 백윤후가 반응했다.
그저 조용히 상황만 지켜보고 있던 그는 이하이가 살기를 품기 시작하자 바로 한수호를 바라봤다.
그런데 한수호는 묘한 웃음을 그리며 고개를 살짝 내젓는다.
[반응하지 말고 그냥 있어.]
마나전음까지 전해지자 백윤후는 검을 뽑으려다가 천천히 물러섰다.
“안타깝지만, 이곳이 네놈들 무덤이 될 거다.”
이하이가 입술을 꽉 깨물며 손을 쓰려는 순간, 한수호는 뒤로 훌쩍 물러나더니 착용구에서 세라믹 단검 한자루를 튕겨냈다.
튕겨나간 단검을 낚아채 심장 형태의 고치의 밑둥에 툭 가져다 댄 한수호.
“이놈이 진화하지 못하게 막거나, 감시하는게 네 임무 아니었냐?”
아예 시선까지 돌리고 하는 말이라 지금 공격을 감행하면 손쉽게 한수호를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하이는 손을 쓰지 못했다.
한수호가 던진 말이 그녀의 정신을 흔들었으니까.
‘내가 보더쉘터를 돌아다니며 결계를 유지시키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한수호의 말은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반면, 한수호는 이하이의 표정만으로 자신의 말이 적중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력은 강하지만, 심리전엔 약한 녀석이네.’
이하이는 속마음을 감추는 데 서툴렀다.
“이하이. 네 눈에 끼운 렌즈로 이미 알아봤을거 아닌가? 이 고치 안에 든 놈의 진화가 4년이나 뒤로 미뤄졌다는 사실 말이야.”
“….그걸 정말 네가 한 거라고?”
“나 아니면 누가 했을까?”
한수호는 단숨에 주도권을 가져왔다.
알파 개체의 진화를 늦추는 건, 이하이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능력이었다.
세계에 이미 열린 게이트들과, 앞으로 열리게 될 게이트를 그냥 이대로 둔다면 6년 후, 헬급 게이트에 이어 악몽급 게이트까지 열리면서 세상은 멸망에 진입하기 때문이었다.
이곳, 보더쉘터 #108은 바로 헬급으로 진화하는 게이트 중 하나이기도 했고.
“나한테 뭘 원하지?”
이하이는 멸망으로 치닫는 미래를 바꿔보고자 아버지와 함께 고분분투하는 중이었다.
때문에 한수호의 능력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이미 말했을 텐데? 네 아버지한테 날 데려가라고.”
“널 어떻게 믿고? 네가 이프리트의 앞잡이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믿냐고!”
“내가 이렇게 한다면 믿을 수 있으려나?”
쫘악
한수호가 단검으로 고치의 밑둥을 찢어냈다.
30센티 정도만 찢었지만 고치 안에든 뭔가의 무게로 인해 찢긴 부위가 점점 범위를 넓혔다.
“무슨 짓이야! 알파 개체를 꺼내서 어쩌려고!”
고치 안에 있는 알파 개체는 이미 상당시간 진화가 진행된 상태였기에, 지금 깨어날 경우 거의 궁급에 가까운 능력을 보이게 된다.
물론 이하이라면 크게 어렵지 않게 쓰러뜨릴 수 있다.
하지만 이 보더쉘터에 충격이 가해져 시스템 상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고, 자칫 잘못해 보더쉘터가 파괴되기라도 한다면 곧바로 웨이브가 발생할 지도 모른다.
한수호는 지금 그런 위험을 자초한 것이다.
“증명해 주지.”
“증명?”
“내가 이프리트와 한편이 아니라는 증명.”
“그게 무슨…?”
“이 고치 안에 있는 몬스터를 처리해 주면 내가 이프리트가 아니라는 게 증명되는 거 아닌가?”
“미쳤어? 그놈은 이미 궁급에 가까워! 그런 놈을 잡자고 여기서 전투를 벌이면 여긴 파괴될 수도 있다는 걸 몰라?”
이하이는 찢어진 고치 밖으로 흘러나오는 찐득한 액체를 노려보며 자신이 직접 손을 쓸 각오를 했다.
알파 개체가 깨어나기 전, 고치 상태에서 손을 쓰면 죽이기 쉽지만, 그렇게 되면 웨이브가 터진다.
대마법사 엘로이가 보더쉘터에 설치한 장치가 위험을 인식하고 지하에 가득 채워 놓은 몬스터를 게이트로 일제히 방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알파 개체가 깨어난 이후에 해치우면 새로운 알파 개체를 찾아 다시 수면 상태에 빠져든다.
한수호는 그점까지 파악하고 일부러 알파 개체를 깨우려는 것이었다.
“두 눈 크게 뜨고 잘 봐둬.”
한수호는 왼쪽 착용구에 끼워진 그랑의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잔뜩 벌어진 고치 아래로 거대한 덩치가 웅크린채로 떨어져 내리는 걸 응시하며 검집의 버튼에 손을 올렸다.
쩌어억-
고치가 최대로 벌어졌고,
쿠웅
그 안에서 온몸에 반투명한 액체를 뒤집어쓴 거대 트롤이 떨어져 내렸다.
놈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
웅크렸던 몸을 펴고 거구를 일으켜 세우며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괴성을 내질렀다.
크아아아앙!
어찌나 강력한 음파였는지 괴성으로 보더쉘터가 통째로 흔들렸다.
바로 그때, 한수호가 그랑의 버튼을 눌렀다.
티잉-
앞쪽으로 그랑이 튀어나갔다.
한수호는 달려나가며 그랑을 손에 쥐었고,
[오른팔] : 110(+20)
한순간 그의 오른팔 스탯이 130까지 치솟았다.
한수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가슴과 오른팔을 제외한 모든 신체스탯에서 20씩을 빼어 오른팔에 때려 박았다.
[오른팔] : 210(+20)
총 스탯 230.
엄청난 스탯으로 올라간 오른손에 쥔 그랑은 시리도록 하얀빛을 뿜어내며 알파 트롤을 향해 뻗어나갔다.
검이 닫기도 전에 하얀 서리가 알파 트롤을 휘감았고.
쩌저저적
놈이 그 어떤 움직임을 보이기도 전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랑은 하얀 석상처럼 굳어진 알파 트롤의 온몸을 낭자해 버렸다.
촤좌좌좌좌좍
수천 조각으로 잘린 알파 트롤은 우박처럼 바닥에 우수수 떨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