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양소혜와 장한설은 탁자 위에 놓인 특산 소주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중이었다.
“이거…. 정말 마셔도 될까?”
양소혜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에이. 안 될 게 뭐 있어? 그래 봤자 46도야. 석 잔까지는 버틸 수 있을걸?”
장한설은 17살 때부터 아주 가끔 아버지 장현오와 함께 술을 마셔본 적이 있어서 술에 아주 문외한 인물은 아니었다.
“46도면 독한 거 아니야?”
“맥주랑 같은 거 아닌가?”
양소혜는 술의 알코올 도수에 대해 문외한이었다.
그걸 옆에서 듣고 있던 신소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매, 맥주 도수는 보통 4.6%야. 46% 도수면 열 배고.”
“에엑? 열 배? 양소혜 너, 이거 나 먹이고 뭔 짓 하려고 했어!”
“어라라. 4와 6사이에 점이 하나 있었구나. 그걸 몰랐네. 헤헤.”
양소혜는 대충 얼버무리려고 했고, 장한설은 자길 독살하려고 했다며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
호텔 방의 창가 쪽에는 이하윤이 망원경을 이용해 아름다운 뉴에르다의 야경을 감상 중이었다.
얼굴의 상처로 인해 밖에 나돌아 다니는 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이하윤은 이곳에서만큼은 마음껏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아니, 한 사람을 생각하면 기분이 나빴다.
‘시간 내라고 딱 한 번 말해 놓고, 그 뒤로는 생까네.’
이하윤은 한수호가 야속스럽기만 했다.
대한식도락에서의 사건 직후, 기숙사 앞에서 만나 다음 만남을 약속했지만 이하윤은 언제 따로 만나는 게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중이었다.
딴에는 한수호가 먼저 그 약속을 언급해 주길 바랐는데, 그날 이후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한수호는 두 번 다시 따로 보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기분이 상했던 김에 이곳을 추천해 큰 비용을 쓰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도 1박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인당 5백을 예상했는데, 1박이 되면서 인당 5백이 더 추가되고 말았다.
물론 추가 금액은 백윤후가 낸 것이지만, 괜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 헤어지기 전까지는 꼭 약속 날짜를 잡아야겠어.’
이하윤은 직접 말로 할 상황이 안 된다면 칙톡을 써서라도 다음에 따로 만날 약속을 잡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망원경으로 순수한 자연 상태인 뉴에르다의 숲을 훑어보던 이하윤.
그녀의 시야로 낯선 불빛이 움직이는 모습이 잡혔다.
‘이 밤에 무슨 불빛이지?’
야간에 순찰이라도 도나 싶어 망원경을 불빛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그 장소에 있는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태산 오빠? 백윤후도 있잖아?’
특수 플래쉬로 길을 밝히며 숲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네 사람.
그 속에서 한수호와 백윤후를 발견한 것이다.
“한설 언니! 잠깐 좀 와 봐야겠는데?”
이하윤이 장한설을 불렀다.
“왜? 너무 멋진 야경이라 나한테도 보여주고 싶은 거야?”
“그게 아니라…. 저기, 저쪽 숲을 좀 자세히 봐봐.”
이하윤이 자리를 비키며 망원경의 각도를 고정했다.
“몬스터라도 봤어? 갑자기 뭘 보라고….”
장한설은 망원경에 얼굴을 가져다 댔고, 방금 이하윤이 본 장면을 그대로 목격했다.
“저놈들, 뭐야? 왜 쟤들이 밖에 나가 있는 건데!”
장한설이 놀라며 소리치자 신소이와 양소혜도 황급히 다가왔다.
“왜, 왜? 뭔데 그래?”
“너도 봐봐. 저기, 저 숲에 장태산이랑 백윤후가 보인다고!”
“뭐!”
양소혜도 망원경을 확인했고, 신소이 마저 확인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다가,
“당장 무기 챙겨!”
양소혜가 인상을 썼다.
“야, 오늘은 아무도 무기 안 가져 왔다고!”
“우, 우리도 나갈 거야?”
“저 둘이 뭔 짓을 하는지 따라가서 지켜봐야지! 그냥 여기 있게?”
양소혜는 여자들만 빼고 딴짓을 하려 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러자 신소이가 말을 더듬거리며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호, 혹시 태산이가 중간 평가 때 백윤후한테 당한 걸, 여기서 갚으려는 건 아닐까?”
“에이. 그건 아닐 거야. 장태산이는 한 번 친구로 받아들인 이상 옛일을 다시 끄집어내서 보복하는 놈은 아니거든.”
양소혜는 한수호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기에 신소이의 의견에 반박했다.
“우리 모르게 야간 이용권이라도 구매한 게 아닐까?”
이하윤은 삼도천 한식당에서 야간 이용권을 팔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꽤나 자세히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야간 이용권? 그런 것도 있어?”
“응. 1인당 천만 원 더 내면 마공사 두 명을 붙여 주고, 야간 사냥에 나설 수 있거든.”
“그거네. 저 녀석들 뉴에르다에 왔는데 그냥 있으려니 좀이 쑤신 게 분명해.”
양소혜는 이하윤의 말에 적극 동의했다.
“근데 최지혁은 왜 안 보이지?”
“걔는 도전 정신이 좀 부족한 애라 지금쯤 방에서 혼자 코 골며 자고 있을걸?”
“오호. 그렇단 말이지. 그럼 우리도 그냥 있을 수는 없지. 다 같이 가자!”
장한설은 곧장 짐을 챙겼다.
무기는 가져오지 않았지만 호신용 단검 정도는 있었으니까.
“지, 지금 시간에 나갈 수 있을까?”
“가보면 알겠지. 못 나가게 막으면 우리도 씨, 야간 이용권 구매하면 되는 거고!”
장한설은 양소혜 만큼이나 막무내가내였다,
순식간에 의견을 통일한 네 명의 여학생은 곧바로 방을 뛰쳐나갔다.
후다닥 뛰어 통합 안내판을 지나려고 하자, 근처를 순찰하고 있던 마공사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손님들! 이 시간에는 어디도 나갈 수 없습니다!”
“주의 사항 못 들었어요? 8시 이후로는 캐슬 엘리베이터는 운행을 안 한다고요!”
네 명의 마공사.
그들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장한설에겐 아무 상관이 없었다.
“야간 이용권요. 그거 구매할게요.”
“…!”
마공사들이 멈칫하더니 서로를 바라본다.
안 그래도 우드캐슬 주변이나 돌면서 순찰이나 하려니 심심했는데, 돈 받고 밖에 나가서 사냥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구미가 당긴 것이다.
“크흠. 야간 이용권에 대해 안다면, 비용에 대해서도 알겠군요?”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마공사의 말에 장한설은 바로 카드를 꺼내 들었다.
“1인당 천. 맞죠?”
백금색이 반짝거리는 플래티늄 카드를 알아본 마공사는 바로 옆의 동료에게 지시했다.
“지금 단말기 있지?”
“네. 있긴 합니다만…. 아직 순찰 구역이 남아 있는데요?”
동료의 말에 나이든 마공사가 귓속말로 작게 속삭였다.
“김종혁한테 전화해. 우리 순찰 대신 돌아주면 백 떼어 준다고.”
장한설 등도 모두 마공사인지라 아무리 작게 말해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장한설은 모르는 척 웃으며 카드를 넘겼다.
“네 분 다 잘 부탁드려요.”
손님 보호를 위한 마공사는 네 명으로 충분하다는 말.
원래는 손님 하나당 마공사 둘이 붙는 게 정상이었으니 4명이 더 있어야 했다.
하지만 장한설이 4명으로 콕 찍어 말했기에 더 부를 필요는 없었다.
마공사 하나가 일행에게서 살짝 떨어져 누군가와 통화하는 동안 나이든 마공사는 단말기를 받아 결재를 진행했다.
바로 4천만 원이 결재되자 마공사들의 태도가 갑자기 부드럽게 변했다.
“개인 행동만 주의하면 어디든 모셔다드리죠. 자, 이쪽으로. 자세한 설명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해 드리겠습니다.”
운행이 중지된다던 엘리베이터는 다시 열렸고, 네 명의 여학생과 마공사들이 모두 그 안에 올라탔다.
그리고 마공사의 설명이 잠시 이어졌다.
* * *
“이쪽이 좋을 거 같네요.”
한수호는 사냥팀의 리더라도 된 듯 직접 일행들을 이끌고 어딘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래서일까?
보호를 위해 고용된 이경호와 조미란은 기분이 조금 상한 듯 보였다.
거금의 비용을 지불한 VIP 손님이라 원하는 곳으로 움직여 주는 게 맞긴 하지만, 보통은 뉴에르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공사가 하자는 대로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수호는 이곳을 몇 번 정도 와본 것처럼 능숙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만약 길을 헤매거나 했다면 바로 주도권을 가져오려고 했는데, 딱히 그럴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한수호가 이끄는 방향은 묘하게도 유적지 방향과 일치하고 있었다.
그것도 정면 쪽이 아니라 측면으로 길게 돌아서 가는 우회로였다.
“학생. 혹시 목적지가 어딘지 알려 주면 안 될까? 우리가 그걸 알면 이동이 좀 더 쉬울 거 같거든.”
이경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한수호는 피식 웃었다.
“이미 알고 계시면서 물으시네요. 이쪽 길이 유적지로 향하는 우회로라는 걸 설마 모르시려고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였군. 그런데 왜 하필 유적지지? 그것도 굳이 왜 돌아가는 길을 택한 건지….”
“스카이 우드캐슬의 홍보 영상을 보니까 이곳에 있는 유적지는 굉장히 웅장하더라고요. 특히 밤에는 빛이 없어도 유적지 자체에서 은은한 빛을 뿜는다면서요?”
한수호는 미리 이곳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파악한 뒤라 말을 하는데 막힘이 없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지름길이 있는데 돌아서 가니까 그 이유가 궁금해서 말이다.”
“이쪽 길로 가면 파이라나 트롤을 만날 확률이 적다고 하던데…. 아닌가요?”
“그런 것까지 알아봤어? 어린 학생이 준비가 철저하구만.”
이경호는 솔직히 놀랐다.
단순히 돈 많다는 거 생색내려고 오는 손님들이 대부분이었기에 한수호처럼 홍보 영상에 담긴 정보를 제대로 챙겨 보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
“돌아서 가는 만큼 굳이 몬스터를 만나서 시간을 더 뺏기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래, 그 말도 맞지. 이제 알았으니까 여기서부터는 내가 앞장서마. 지금까진 몬스터 영역이 아니지만, 이제부턴 다르거든.”
이들은 지금 유적지 뒤편에 거의 다다른 상태였고, 이 주변에선 파이라와 트롤을 쉽게 마주칠 수 있었기에 위험했다.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한수호도 순순히 물러났다.
이경호와 조미란이 앞장서자 한수호는 백윤후와 나란히 서게 되었다.
“위치는 확인됐냐?”
한수호가 작은 목소리로 묻자, 백윤후가 고개를 끄덕인다.
“좀 전에 유적지로 진입한 것 같다. 바람에 혈향이 담긴 거로 봐서는 한두 차례 몬스터들하고 전투가 있었던 모양인데?”
백윤후는 몸과 기억만 백윤후의 것이지 그 안에 든 존재는 도플갱어였기에 냄새에 굉장히 민감했다.
바람에 미세하게 실린 냄새조차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다.
도플갱어는 생존에 특화된 몬스터라 도망, 탈주 등을 위해 근처에 누군가가 있으면 바로 움직임을 눈치챌 수가 있었다.
“인원은 처음 그대로고?”
“응. 정확히 세 명이야.”
“오케이. 그럼 우리도 이제 준비해야겠다.”
“드디어, 사냥이냐?”
백윤후가 한수호를 따라나선 이유는 오직 사냥 때문이었다.
자신이 한때 트롤이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트롤의 근육이 얼마나 쫄깃하고 육질이 좋은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건 파이라도 비슷하다.
체구는 작지만 파이라의 근육 또한 트롤만큼이나 식감을 자극한다.
“먼저 저분들 안전부터 확보하고.”
한수호는 7미터 정도 앞서 나가고 있는 이경호와 조미란을 바라봤다.
“어쩌려고?”
“저 앞쪽으로 가면 곧 파이라 무리와 마주칠 거야.”
한수호의 감각도 백윤후 못지않았다.
오히려 백윤후보다 정확하고 확실한 상황을 감각으로 캐치하는 게 가능했다.
백윤후가 본능이라면, 한수호는 능력이었다.
“장태산. 넌 참 신기한 놈이라니까. 몬스터도, 동물도 아닌 녀석이 무슨 감각이 그렇게 좋을 수가 있지?”
“왜, 부럽냐?”
“그런 대단한 감각을 가졌으면서 그 노랑머리 여자가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나한테 왜 확인하는지 그게 궁금해서 그런다.”
백윤후가 투덜거리자 한수호는 쯧쯧 혀를 찼다.
“넌, 인마. 교차 확인도 모르냐?”
“교차 확인?”
“내가 아는 정보가 확실한지 다른 사람을 통해 중복으로 확인하는 거.”
한수호는 그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온다.”
“왔다!”
한수호와 백윤후 모두 자세를 낮추고 전방을 노려봤다.
이경호가 정글도로 울창한 나무 덩굴을 잘라내며 나아가던 그때,
“몬스터다!”
그제야 이경호도 몬스터의 존재를 눈치채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 외침에 조미란은 바로 뒤로 물러나며 한수호와 백윤후를 보호했다.
캬르르르르
어둠 속에서 새빻갛게 빛나는 여섯 쌍의 눈동자.
이경호는 몬스터의 숫자를 가늠해 보더니, 호기롭게 외쳤다.
“조미란, 너는 거기서 학생들 지켜. 놈들은 나 혼자 상대하마.”
진급 초반의 마공사인 이경호였기에 파이라 여섯 마리를 상대하는 건 어려울 게 없었다.
“네! 조심하세요!”
조미란도 이를 알기에 지원에 나서지 않고 후방을 지키기로 했다.
“잘 봐두라고 학생들. 이게 바로 베테랑 마공사들의 사냥 방식이다.”
이경호는 자신의 활약을 보여주고 싶은지 멋져 보이는 말을 내뱉으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이경호의 움직임은 매우 훌륭했다.
나무를 발판 삼아 날아오른 그는 어느새 붉은 눈들이 모인 장소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정글도를 화려하게 휘두르며 대형견 크기의 파이라들을 도륙 내기 시작했다.
생긴 건 고양이 같지만, 귀가 뾰족하게 세워져 있고 팔다리가 무척 길어 작은 기린 같은 느낌의 갈색 털의 몬스터들.
꼬리에서 불타는 화염구를 던질 수도 있는 8급 몬스터였지만 이경호 앞에서는 아무 힘도 쓰지 못했다.
여섯 마리의 파이라들은 채 2분도 되지 않아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