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여왕의 노래-운명의 끈]
-요마의 여왕, 라라가 운명의 끈을 노래하였습니다.
-당신은 326년을 살아온 풋풋한 소녀 라라에게 첫 번째 운명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라라는 당신에게 영원한 복종을 맹세합니다.
-라라는 당신의 명령을 어길 수 없습니다.
-당신과 라라가 운명의 끈으로 연결된 보상으로 서로의 마나력이 상승(+500)합니다.
라라의 노래가 끝났을 때, 한수호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였다.
복종의 맹세로서 운명의 끈이 사라지게 한다더니, 결국 끈을 한수호에게 이어 버린 것이다.
“너…. 노린 거지?”
한수호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묻자, 라라는 생긋 미소를 그렸다.
“소녀가 어찌, 감히.”
“휴…. 어째 너무 쉽게 복종한다 싶더니만. 그건 그렇고, 보상은?”
한수호는 이것도 크게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을 하며 보상을 요구했다. 그때, 보란 듯이 메시지가 두두두 떠올랐다.
>>던전 공략 완료 - [요마의 호수 정복]
>>던전이 보유한 포인트 110,000LP를 획득합니다.
>>스탯 (정신+2, 정신+1, 초감각+2)이 상승합니다.
라라에게 복종의 맹세를 받은 것만으로 던전 공략이 완료됐다.
추가로 11만 포인트를 얻은 데다가 스탯도 5씩이나 올랐다.
‘근데 정신 스탯은 왜 두 번 나와?’
보상으로 얻은 정신 스탯은 3.
생각해보니 라라가 약속한 정신 스탯이 3이라 원래 보상 2에서 1이 추가된 것 같았다.
‘이런 건 또 칼 같네.’
한수호는 뭐가 좋은지 헤벌쭉 웃고 있는 라라를 흘겨봤다.
그러다 라라의 신체 스탯을 확인해 봤다.
[가슴] : 110
*[마나량] : 930
좀 전까진 430이던 마나량이 930으로 확 뛰었다.
‘괜히 이 녀석만 득 보는 거 아니야, 이거?’
한수호 자신의 마나량도 500이 오르긴 했지만, 괜히 복종을 허락했나 싶은 기분이 든다.
한수호의 시선이 가슴을 향하고 있어서인지 라라가 질색을 하며 다시 손으로 몸을 가렸다.
“볼 생각도 없고, 볼 것도 없다. 그러니 엉뚱한 생각은 마라.”
“네 눈길이 음흉해서 그런다.”
“너 같은 어린애한테는 관심 없다니까?”
“내 나이가 너보다 10배는 많다! 어린애는 너지, 내가 아니라고.”
“주인한테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거 보소.”
“…. 쳇.”
한수호의 손에 불길이 피어오르는 걸 본 라라는 금세 꼬리를 말았다.
“내가 널 살려 두는 건, 나 좋자고 하는 거지 너 좋으라고 한 거 아니다. 그걸 꼭 명심하도록.”
“알았다.”
“혹시라도 이 던전에 들어서는 인간들이 있거든 절대 해치지 말고.”
“인간이 내 백성을 해친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다.”
라라의 말도 틀린 건 아니라 말을 좀 바꿨다.
“그럼 네 백성들 보고 인간 앞에 아예 나타나질 말라고 해.”
“…. 노력해 보겠다.”
“대신, 발자크와 관계된 인간이 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생포해. 너보다 강한 존재면 숨고.”
“숨어 봐야 어차피 결계 안이라 별 소용이 없을 거다.”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한수호는 대안을 내놨다.
“나한테 바로 연락할 방법 혹시 없어?”
“운명의 끈으로 연결된 상태라서 정신 집중으로 얼마든지 텔레파시를 주고받을 수 있을 거다.”
“참, 네. 별 게 다 되네. 알았어. 그럼 위험하다 싶으면 나한테 신호 보내고.”
“그러겠다.”
이제 필요한 말은 다 했다.
이로써 이 석천 호수 던전은 발자크에게서 떨어져 완전히 독립되었고, 던전의 보스인 라라는 자신에게 복종하게 되었으니 위험할 일도 없어졌다.
‘그런데 이 녀석은 던전 지키는 거 빼고 뭐 다른 일은 못 시키려나?’
다른 던전이나 게이트를 오갈 수 있다면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 듯했다.
그래서 데리고 다니면서 아스루나 세계에 대한 정보도 캐내고, 귀찮은 일까지 전담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라그나로크나 아스루나에 대해 좀 더 질문을….’
그때 완전히 넋이 나간 듯 우두커니 서 있던 김재우가 신음을 흘렸다.
“으으….”
그 모습에 한수호는 바로 라라를 바라봤다.
“네 사이킥 웨이브 시간제한 있었어?”
“아니다. 너에게 복종의 맹세를 했기 때문에 사이킥 에너지가 끊어진 것뿐이다.”
“알았으니까, 넌 일단 다른 데 가 있어.”
김재우에게 라라를 복속시켰다는 걸 보여주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라라가 영어를 할 수 있고, 지구에선 뉴에르다로 불리는 아스루나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이곳이 위험해진다.
“네 동료의 상처는 방금 내가 치료해 줬다. 그리고…. 난 이곳에서 언제나 너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겠다. 굳이 한 달이 아니어도 언제든지 찾아오도록.”
라라는 수줍어하며 얼굴을 살짝 붉힌 채, 한수호가 준 옷을 만지작거리다가 호수로 첨벙 뛰어들었다.
“어린 녀석이 뭔 생각을 하길래 얼굴을 다 붉혀?”
작게 중얼거리던 한수호는,
“아, 300살 먹은 요마였지.”
콧잔등을 긁적이며 피식 웃고 말았다.
그때, 호수의 수면 위로 머리를 삐죽 내민 라라가 인상을 구긴 채 물을 확 뿌렸다.
“어쭈, 저게!”
한수호는 피했지만 근처에 있던 김재우는 물에 흠뻑 젖고 말았다.
그 덕분인지 머리를 거칠게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 어? 이게 뭐야?”
김재우의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그런데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허공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틈에 한수호는 라라를 살폈다.
다행히 라라는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야, 태산아. 이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냐?”
김재우는 그제야 한수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어디까지 기억해요?”
“기억? 음…. 그 커다란 세이렌이 던진 창에 허벅지를 다쳤… 어라?”
김재우는 자신의 허벅지를 보고 놀라워했다.
분명 삼지창에 맞아 허벅지 살이 크게 찢겼는데, 지금 보니 바지만 찢어졌을 뿐, 상처는 말끔하게 치료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수호는 그것이 라라가 치료해 준 것임을 알지만, 김재우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던전은 클리어했어요.”
“아, 그래? 정말 다행이다. 휴…. 생각보다 보스가 강력해서 걱정했는데. 근데 어째 보스 사체가 안 보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연으로 돌아가더라고요.”
한수호는 보스를 죽였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재우는 그 말을 보스가 죽어 사체마저 사라졌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네가 고생했구나. 이번에도 난 제대로 도움이 못 됐어. 널 보호해 주기는커녕, 내가 오히려 보호를 받았으니….”
“아니에요. 형이 어그로를 끌어 준 덕분에 가능했던 겁니다. 그보다 몸은 괜찮아요? 이상한 곳은 없고요?”
“이상한 곳? 아, 그러고 보니 방금 무슨 메시지가 눈앞에 떴다. 공략 완료 보상이라면서 마나력이 17이나 올랐다던데? 그리고 이것도.”
김재우가 손을 펼쳐 보이자 거기엔 주머니가 하나 올려져 있었다.
한수호가 가진 아공간 주머니와 상당히 유사한 형태.
“그거 혹시…?”
“이거 아공간 주머니인가 봐. 안에는 이런 게 들어가 있는데?”
김재우는 주머니를 열어 큼지막한 박스를 하나 꺼냈다.
그건 온갖 꽃과 요정의 그림이 잔뜩 그려져 있는 납작한 박스였다.
생긴 건 꼭 여자들이 쓰는 화장품 세트 같다.
김재우는 그걸 열어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 이거 정말이네? 뭔 포션 세트라고 해서 혹시나 했더니 진짜잖아?”
박스 안에는 총 다섯 종류의 포션이 예쁘게 담겨 있었다.
붉은색 포션 2개에 파란색 포션 1개, 그리고 흰색 포션이 2개였다.
“저기, 재우 형. 그 주머니요. 물건 꺼낼 때 혹시 칸 같은 거 보이지 않았어요?”
“너도 같은 보상을 받은 모양이구나? 맞아. 가로, 세로 2칸씩 해서 총 4칸이더라.”
한수호는 김재우가 받은 아공간 주머니가 자신의 소형 주머니보다 더 용량이 작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거보다 좋은 거였으면 화낼 뻔했네.’
어쨌든 김재우도 좋은 보상을 받은 걸 알았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나력 17이면 결코 적은 게 아니다.
마나 공법을 죽어라 수련해도 1년에 20 올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김재우는 한방에 1년 치를 얻어낸 거라 볼 수 있었다.
물론, 한수호가 받은 보상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지만.
“어쨌든 보스가 쓰러졌으니 이제 곧 게이트가 사라지겠구나? 우리도 얼른 나가자.”
김재우는 보상까지 챙겼기 때문에 한수호가 던전 보스를 잡았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네. 얼른 가죠. 힘을 좀 과하게 써서 그런가? 꽤 피곤하네요.”
“그래. 나가서 내가 크게 한턱내마.”
“비싼 거 먹을 겁니다. 각오하세요.”
“하하하. 얼마든지.”
두 사람은 곧장 고무보트를 타고 반대편 육지에 올랐고, 거기서 게이트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 * *
“…. 그렇게 된 겁니다.”
김재우는 게이트 밖에서 진압팀을 만나 그들에게 던전 안에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의 긴급한 요구대로 진급 마공사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팀이었고, 그들은 김재우보다도 더 확실한 장비를 착용한 채 막 진입하려던 차였다.
“정말 보스를 처리한 게 맞습니까?”
진압팀의 팀장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묻자, 김재우는 한수호를 바라보며 웃음을 그렸다.
“이 던전의 보스는 확실히 쓰러졌습니다. 하지만 게이트가 폐쇄될 거라고는 장담하기 어렵군요.”
그 말에 한수호가 깜짝 놀랐다.
김재우는 이 던전이 폐쇄될 거라고 알고 있을 텐데, 뭔가 묘한 뉘앙스의 대답을 내놓은 것이다.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팀장의 반문에 김재우는 짧게 설명했다.
“보스가 쓰러진 건 맞지만, 던전을 구축하고 있는 힘은 여전히 존재하니까요.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는 저도 모르겠군요.”
“그게…. 사실입니까?”
“그럼 뭐 내기라도 걸까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팀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
“저희가 좀 들어가서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이 던전이 뭐 제 소유도 아니니까요.”
김재우는 그 말을 하면서 또 한수호를 바라보며 눈을 찡끗했다.
그건 마치 나도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뭐야? 설마 내가 라라랑 이야기할 때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태연스럽게 한수호를 대신하여 거짓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원래 한수호는 이 던전이 폐쇄되어야 하는데 폐쇄되지 않는 상황이 오면 자기도 모른다고 발뺌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김재우는 보란 듯이 변명거거리를 만들어 줬다.
‘대체 어디까지 아는 거지?’
김재우가 어느 내용까지 들었고, 무엇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괜히 물어봤다가 긁어 부스럼 만들까 봐 꾹 참았다.
그래서 김재우에게서 시선을 떼고 괜히 딴청을 부렸다.
한수호는 던전의 입구인 게이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7급 던전 ‘라라의 호수’]
-보유 포인트: 1LP
-위험도: ★★★☆☆☆☆☆☆☆
-아스루나 대륙의 5급 몬스터 라라의 호수입니다.
-라라가 운명의 주인을 찾았습니다.
-호수의 여왕, 라라가 당신에게 복종하고 있습니다.
-발자크가 관심을 끊었습니다.
>>던전에 포인트가 축적되기 시작합니다. [29:22:43:26]
던전의 정보를 살펴보니 여러 가지가 달라져 있었다.
6급이었던 라라가 5급으로 바뀌었고, 발자크는 아예 관심을 끊었다고 나온다.
‘라라 말대로네.’
발자크로부터 완전히 독립되게 만들겠다더니 정말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장이 계속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라라가 운명의 주인을 찾았습니다.
라라의 고의성이 다분해 보이는 문장.
한수호의 강함을 알아보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운명을 끈을 이어 버렸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온몸이 간지러워지는 느낌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잠시 후, 진압팀은 김재우와의 대화를 마치고 상부에 상황을 보고한 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김재우는 한수호를 불러 차를 세워둔 곳으로 향했다.
“자, 어디로 갈까? 아직 7시밖에 안 됐으니까, 밥 먹을 시간은 충분해.”
“흐음. 일단 가면서 생각해볼게요. 편하게 아카데미 근처에서 먹기로 하죠.”
“오케이. 아, 그리고 이거.”
운전석에 앉은 김재우는 품에서 파란색 포션 하나를 꺼내 한수호에게 넘겼다.
“이건 왜요?”
“보답.”
“무슨 보답이요?”
한수호가 의아해하며 묻자 김재우는 씨익 미소를 그렸다.
“나한테 멋진 노래를 들려준 보답이랄까?”
김재우는 그 말을 하고는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이 형…. 설마 그때부터 깨 있었던 거야?’
김재우는 자신이 언제 정신이 들었는지 그걸 슬쩍 말한 것이다.
라라가 운명의 끈을 노래한 그 시점.
한수호는 그 시점 이후에 라라와 무슨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떠올려 봤다.
‘보상 얘기 잠깐 했고, 복종이니 어쩌니 이야길 주고받은 거 같은데…. 아! 발자크도 잠깐 언급했다!’
그 외에는 딱히 중요한 대화는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한수호가 라라의 가슴 스탯 확인하다가 라라로부터 눈길이 음흉하네 어쩌네 시비를 걸렸던 정도.
‘와, 씨. 재우 형한테 이런 면이 있었네? 그걸 다 보고 듣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 연기했던 거야?’
한수호는 휘파람까지 불면서 운전하는 김재우를 흘겨봤다.
그러다가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하긴. 회귀 전에도 형은 내 비밀 지켜 주다가 감봉까지 당한 적이 있었으니까.’
김재우에겐 미래의 일이지만, 자신에겐 먼 과거가 되어버린 기억을 떠올리며 한수호는 한참 동안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