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백윤후의 몸에서 생기가 빠르게 사라졌다.
온몸의 핏기가 사라지며 하얗게 변했고, 눈동자는 탁 풀렸다.
축 늘어진 채 도플갱어에게 붙잡혀 순식간에 미라화됐다.
도플갱어는 어느새 피를 다 빨고 근육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새빨간 놈의 근육이 더욱 두꺼워지며 불끈거리고 있었다.
그때 한수호가 한 번 더 날아들었다.
‘지금이다!’
한수호는 백윤후의 숨통을 직접 끊어낼 생각이었다.
그는 정확히 백윤후의 심장을 향해 정글도를 찔러 넣었다.
푸욱.
정글도가 백윤후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리고 그를 끌어안고 있던 도플갱어의 심장까지도 함께 관통했다.
“캬아아아아악!”
근육을 흡수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도플갱어는 강렬한 통증에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몸을 빼낼 수가 없었다.
어느새 한수호가 왼손으로 도플갱어의 목을 콱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
“움직이면 이대로 목을 뽑아버릴 거다. 그러니 잠자코 있어.”
그 말에 도플갱어가 홍안을 부릅뜨며 한수호를 노려봤다.
아무리 생명 코어가 따로 존재한다 해도 목이 뽑히면 죽어 버리기 때문에 도플갱어는 발광하지 않았다.
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지금 한수호가 무엇을 하려는지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한수호는 지금 도플갱어의 신체 스탯을 읽는 중이었다.
이 모든 건 3초마다 위치를 옮기고 있는 생명 코어를 낚아채기 위함이었다.
놈의 생명 코어는 왼팔에서 가슴으로 움직였다가, 다시 오른팔로 향했고, 이내 머리로 움직였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한수호는 정확히 2초를 세고 엄지와 검지를 도플갱어의 목에 푹 박아넣었다.
“캬아악!”
도플갱어가 다시 비명을 지르는 그때, 한수호의 손가락을 스쳐 가려는 이물질이 느껴졌다.
‘이거다!’
한수호는 그걸 놓치지 않고 콱 움켜잡았다.
“끼아아아아아!”
한수호에게 뭔가를 잡히자 도플갱어가 몸부림쳤다.
두 팔로 한수호를 공격하고 머리를 들이밀며 목을 물어뜯으려 했다.
하지만 한수호는 목에서 구슬 같은 걸 잡아챈 즉시로 백윤후의 시체를 뻥 차내며 멀찍이 물러났다.
한수호는 도플갱어와 4미터 정도 떨어진 상태로 하얀 구슬을 엄지와 검지로 쥔 채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네놈 생명 코어지? 지금부터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이걸 박살 내겠다.”
“캬아악! 카악!”
도플갱어는 대충 뜻을 이해했는지 괴성만 질러댈 뿐, 덤벼들지는 않았다.
“좋아. 그럼 이제 네 앞에 있는 시체를 취해라.”
백윤후는 잠시간의 소란 속에서 차가운 시체가 되어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엎어진 그의 몸 주변으로는 꿰뚫린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가 한가득이었다.
도플갱어한테 절반이나 되는 피를 빨렸음에도 꽤 많은 양이었다.
한수호는 백윤후가 완전히 죽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개조 특성으로 상대의 신체 스탯을 읽어내는 건, 생명 반응이 있어야만 가능했고 지금 백윤후에게서는 스탯을 읽어낼 수 없었으니까.
도플갱어는 잠시 머뭇거리다 한수호가 자신을 당장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슬금슬금 백윤후의 시체 쪽으로 다가섰다.
녀석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은 놈은 입을 쩍 벌리더니 큰 입으로 백윤후의 머리통을 콱 물어 버렸다.
순간, 도플갱어의 새빨간 근육 몸통이 슬라임처럼 흐물흐물 변해 버렸다.
그 상태로 백윤후의 시체를 천천히 뒤덮어가며, 마치 춤을 추듯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슬라임 같은 근육 덩어리가 백윤후 쪽으로 옮겨 가면서 원래 도플갱어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육체는 뼈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백윤후의 육체를 모두 삼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그 사이 한수호는 도플갱어의 생명 코어를 어떡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너무 작아서 가지고 다니기는 영 불안한데….’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 두면 되겠지만, 몸에 늘 지니고 있다 해도 누가 훔쳐 가거나 도플갱어가 무력으로 강탈해 갈 수도 있기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냥 내가 삼켜?’
가장 안전한 곳은 바로 자신의 몸속이었다.
도플갱어처럼 자기 몸속에 가지고 있다면 잃어버리거나 누가 훔쳐 갈 걱정이 전혀 없었다.
‘잠깐. 먹을 필요 없이 저놈처럼 코어를 내 몸에 박아 넣는 건?’
문뜩 떠오른 생각.
먹는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몸 밖으로 배출될 위험이 있었다.
그럴 걱정이 없는 방법은 도플갱어와 똑같은 방법을 쓰는 것이었다.
놈처럼 수시로 코어의 위치를 옮길 수는 없어도 몸 한 곳에 코어를 박아 넣는 건 가능했다.
한수호는 생각을 바로 실행에 옮겼다.
가슴팍을 열어젖히고 정글도로 오른쪽 가슴 근육을 십자 형태로 찢었다.
생명 코어는 새끼손톱 크기여서 얕은 상처로도 충분했다.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그다지 아프진 않았다.
그 즉시 십자 상처의 교차점에 코어를 밀어 넣었다.
따끔하고 화끈거리는 느낌은 있었지만 고통 내성이 34%나 되어서 그런지 아프다는 느낌은 크게 없었다.
코어를 상처에 밀어 넣고 그 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짧고 강하게 열화기를 일으켰다.
화륵.
뜨거운 열기가 상처를 지져 버렸다.
흉한 화상이 생겨났지만, 싸구려 포션 하나면 이삼일 내에 깨끗이 사라지리라.
한수호는 도플갱어의 생명 코어가 담긴 가슴팍을 내려다봤다.
다른 생명체의 물건을 자신의 몸에 쑤셔 넣어서인지 괜히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이로써 도플갱어의 생명 코어는 한수호의 것이 되었고, 놈은 이제 무조건 한수호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변화가 있으려나?’
한수호는 자신의 신체 스탯을 눈앞에 띄워봤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를 발견했다.
[가슴]: 60(+32)
▶[마나]: 487(+265)
도플갱어의 신체 스탯에서 계속 이동하던 수치 32가 고스란히 한수호의 것으로 전환되어 있었다.
게다가 새롭게 ‘마나’ 항목이 생겨났다.
개조 특성을 지닌 한수호였지만 지금까진 이 마나량 수치는 읽어낼 수 없어서 굉장히 아쉬웠었는데, 이젠 마나량까지 읽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수치 조정도 가능할까?’
한수호는 자신의 다른 신체 스탯처럼 마나 수치도 임의 조절이 가능한지 확인해 봤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이 마나 수치는 읽는 것만 가능할 뿐, 조절은 되지 않았다.
‘이것만 해도 어디야. 완전 대박이구만.’
한수호는 지금의 이 상황에 매우 흡족해했다.
편안한 얼굴로 도플갱어를 바라보니 어느새 백윤후의 몸 전체가 붉은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꿀렁이던 움직임은 어느덧 잦아들었고, 붉은 근육 덩어리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핏기가 사라져 미라화되었던 백윤후의 몸은 다시 전과 다름없이 생기로 가득해졌다.
정글도에 꿰뚫렸던 가슴의 상처는 이미 완전하게 재생된 상태.
한수호가 두 걸음 다가서자 백윤후가 눈을 번쩍 떴다.
새빨간 눈이 한수호를 응시하는 듯하더니 이내 붉은색이 사라지고 정상적인 눈동자로 되돌아갔다.
“크르륵. 크악. 흐음.”
도플갱어, 아니 이제는 백윤후가 되어 버린 놈이 목을 가다듬으며 일어섰다.
한수호를 빤히 응시하던 녀석은 주변을 훑다가 자신의 몸을 여기저기 주무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몸이다.”
새롭게 태어난 백윤후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도, 말투도 백윤후 그대로였다.
“내 코어는…. 네가 가진 것인가?”
백윤후가 한수호의 가슴팍을 빤히 바라본다.
자신의 생명과 같은 코어를 빼앗겼으니 분할만도 한대, 지금의 백윤후는 전혀 분통해 보이지 않았다.
“네 이름은 뭐지?”
한수호는 백윤후의 신체 스탯을 확인했다.
생혈에 근육을 흡수한데다가 백윤후의 몸까지 새롭게 먹어 치워서인지 평균 스탯이 81이나 되었다.
특급에 불과했던 백윤후가 죽고 나서야 진급으로 진화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내 이름은 백윤후. 저 뼈다귀는 가르티아다.”
백윤후는 완전히 백골화된 이름 모를 시체를 가리켰다.
“가르티아? 넌 아스루나의 생명체인가?”
한수호는 이곳이 뉴에르다의 세상인 이상 가르티아 또한 지구의 생명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잘 아는 군. 가르티아는 아스루나의 평범한 트롤이었다.”
“트롤이 왜 이런 곳에 갇혀 있는 거지?”
한수호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아스루나의 존재와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르티아는 엘로이에게 잡혀 이곳을 유지하기 위한 결계의 축으로 소모될 용도로 갇혔다.”
“엘로이? 결계의 축은 또 뭐고?”
“엘로이는 아스루나의 대마법사다. 그 외에는 나도 잘 모른다. 아, 이 결계는 아캄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다는 정도는 안다.”
아쉽게도 가르티아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여기까지였다.
평범한 트롤의 몸을 빼앗은 도플갱어여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 결계가 있는 모든 장소엔 가르티아 같은 몬스터들이 지하 깊숙한 곳에 갇혀서 결계의 축이 된다, 이거지?”
“대충 비슷하다. 그런데 인간의 몸은 처음이라 익숙하지가 않군. 마나를 축적하기에는 매우 유용하지만 그 외적인 부분이 너무 약하다.”
“인간의 몸은 수련을 통해서 얼마든지 강하게 만들 수 있어.”
“그렇군. 이 몸의 주인은 평소 수련을 게을리했어. 병신 같은 놈.”
백윤후는 자기 스스로를 병신이라 욕했다.
“아직 기억을 다 가진 게 아닌가 봐?”
“대충 70% 정도 소화했다. 한두 시간 정도면 완벽하게 적응이 가능하다.”
“좋아. 앞으론 네가 백윤후다. 네가 도플갱어라는 사실은 나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거고.”
한수호는 일부러 백윤후를 시험해 보는 중이었다.
방금 한 말은 자신만 죽이면 백윤후든, 한수호든 둘 중 한 사람의 몸을 빼앗아 아무도 모르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백윤후는 다시 한수호의 가슴팍을 보다가 시선을 위로 올렸다.
“나에게 뭘 원하지?”
“복종.”
한수호의 말에 백윤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내 코어를 차지한 이상, 난 네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 이것저것 따질 필요 없이 그냥 명령이나 내려라.”
“노노. 내가 원하는 건 그렇게 딱딱한 게 아니야.”
“…?”
백윤후가 무슨 말이냐는 듯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자 한수호는 환하게 웃었다.
“내 말에 복종하지만, 친구처럼 서로 협력하는 관계로 보여졌으면 하는데?”
그제야 백윤후는 한수호가 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도 마주하여 웃음을 그렸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해가 빨라 좋군.”
“인간의 머리는 생각보다 활용하기가 좋다. 예전엔 몰랐던 사실들이 빠르게 이해되는 중이야.”
백윤후는 시간이 흐를수록 쏟아져 들어오는 백윤후의 방대한 지식을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어디 보자…. 일단 네가 피와 근육을 흡수해야 하는 기간은 한 달이지?”
“신기하군. 이 지구라는 곳에 나 말고 다른 도플갱어가 등장한 적이 있었나? 도플갱어에 대해 너무 잘 아는데?”
“그럴만한 일이 있어. 많이 알면 다친다.”
“그 말을 들으니 별로 알고 싶어지지 않는군. 이런 게 인간의 얄팍한 마음인가?”
백윤후는 어느덧 한수호의 농담도 이해할 정도로 적응하고 있었다.
“맞다. 그러고 보니 왜 아스루나에서는 다른 인간을 만날 수가 없는 거야?”
“다른 인간을 만나지 못했다고?”
백윤후는 뭔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캡슐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안쪽에 머리를 들이밀더니 뭔가를 읽었다.
“892년?”
“그게 뭔데?”
한수호도 다가가 백윤후처럼 캡슐 안쪽을 바라봤다.
그곳을 본 한수호는 또 한 번 크게 놀랐다.
[Running Time] : [0892:03:15:22:37:58]
영어였다.
아스루나에서 만들어진 캡슐 안에 영어가 새겨져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옆의 숫자들은 이 캡슐이 작동한 총시간을 의미하는 걸로 보였다.
“설마 892가 년이고, 그다음이 월, 일, 시, 분, 초를 나타내는 거야?”
“바로 알아보는군. 내가 이 캡슐에 들어간 시간이기도 하지.”
“러닝타임이라는 글자는 너희 언어가 맞아?”
“그건 아캄어다. 아스루나의 인간들이 언제부터인가 새롭게 만들어 사용했던 걸로 기억한다.”
백윤후는 이전의 육체가 트롤이었기에 인간의 언어까지는 습득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영어를 아스루나에서 아캄어로 사용했다는 건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걸? 내가 캡슐에 갇힌 지 892년이나 흘렀다니. 어쩌면 아스루나의 인간들은 이미 멸망 당한 걸지도 모르겠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내가 가르티아였을 때, 아스루나에서는 마족과 인간의 전쟁이 한창이었지. 처음엔 인간이 우세했지만 자기들끼리 분열하더니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하더군. 이 지하 설비도 인간들이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만든 거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놀라운 이야기였다.
한수호가 아스루나에서 보아온 신전과 유적지를 떠올려 보니 아귀가 딱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아캄어가 영어라는 사실은 너무도 뜻밖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