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화룡인을 쓸 줄이야.’
한수호는 자신의 손바닥에 새겨진 용의 문양을 바라보며 남몰래 감탄했다.
얼얼했던 손에 피가 다시 돌기 시작하자 용의 문양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최지혁의 주먹에서 용의 형상을 본 순간 뇌전의 힘을 담은 주먹을 풀고 방어로 전환했다.
밖으로 뿜어지는 강력한 힘을 갑자기 거둬들이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지만 최지혁의 주먹을 튕기지 않고 받아내야만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화룡인.
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사실 그다지 많지 않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대한민국엔 사왕오패를 뛰어넘는 극강의 마공사가 존재했다.
마공전뇌 이산처럼 1세대 마공사이며, 중국의 ‘북경삼림’에서도 인정할 정도로 강했던 인물인 ‘권존 김무성’.
원래는 일존사왕오패라 불리던 영웅들 사이에서도 최강자의 자리를 15년이나 차지하고 있던 강자였다.
하지만 20년 전, 갑작스럽게 권존이 실종되면서 사왕오패만 남게 된 것이다.
그런 김무성의 독문권법이 바로 화룡인이었다.
공격을 받은 상대의 몸에 용의 문양을 남기는 독특한 권법이었는데, 김무성이 사라지면서 화룡인도 세상에서 사라졌었다.
그 화룡인이 최지혁의 손에서 재등장했다.
세간에 알려진 날아오르는 용의 문양과는 다르지만, 이런 식의 문양을 남기는 권법은 화룡인이 유일했다.
‘적어도 김무성과 관련이 있는 녀석인 게 틀림없어.’
사라진 권존 김무성.
그리고 그의 화룡인과 유사한 권법을 사용하는 최지혁.
그에게 화룡인이라는 화두를 던졌으니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나올 게 뻔했다.
한수호는 그 반응을 기다렸다가 적당한 시점에 낚아 올리면 되는 것이다.
‘내 허락도 없이 날 감시하는 놈은 그냥 못 두지.’
누군가에게 주목받고 있는 건 그다지 유쾌한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
최지혁은 입을 달싹거렸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대신 한수호의 귓가로 직접 와 닿았다.
-저녁에 따로 좀 보자.
말로만 듣던 마나 전음.
이건 마나 제어 능력이 궁급에 이른 마공사들이나 사용할 수 있다는 전문기술이었다.
그런데 최지혁은 아직 진급에 달하지 못한 상태다.
-마나 전음에 놀랐나 보군. 그럴 거 없다. 방법만 정확히 알면 너도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기술이니까.
최지혁이 자신의 상태를 귀신처럼 눈치채고 한 말에 한수호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리고 충고 하나 하지. 네가 방금 한 말. 어디서도 떠벌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협박이라고 하는 말에 한수호는 웃음밖에 안 나왔다.
이건 최지혁이 김무성과 관계가 깊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똑똑한 거야, 아니면 저놈이 멍청한 거야?’
뭐가 답이 되었든 최지혁이 순진하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때, 양소혜의 손에 잠시 나포되어 있던 이재준 교수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너희들! 마나력을 쓰지 말라고 경고했는데도 무슨 짓이야!”
“마나력 안 썼는데요?”
“저, 저도요.”
한수호와 최지혁은 억울한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이를 믿을 교수가 아니었다. 그의 눈엔 분명 마나력의 응집이 보였고, 방금의 그 커다란 폭발은 마나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너희 둘 다 감점 5점이다. 월말 평가에 낙제하고 싶지 않으면 앞으로 특별히 조심해야 할 거다! 그리고, 여기 수리비는 네 녀석들 집으로 청구하겠다.”
이재준 교수는 푹 꺼지고, 부서진 단련실 바닥을 둘러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한테 직접 청구해 주시죠?”
“저도…. 요.”
나란히 자신들이 직접 비용을 처리하겠다고 하자 이재준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여기 수리비가 한두 푼밖에 안 할 것 같냐? 적게 잡아도 수백은 나온다. 백도 안 좋은 녀석들이 있는 척은….”
이재준이 말을 하는 동안 한수호가 공법폰을 꺼내 뭔가를 두드렸다. 그리고 담담한 얼굴로 한마디 했다.
“방금, 교수님 계좌로 1천 쐈습니다. 그럼 됐죠?”
“저, 저도 바로 이체하겠습니다….”
최지혁도 덩달아 이체해버렸다.
이 상황에 당황한 건 이재준이었다.
“어? 아니, 내가 뭐. 딱히 너희들 집안을 깔본 거는 아니고…. 아무튼 앞으로 주의 깊게 지켜볼 테니 조심하거라.”
이재준 교수의 빠른 마무리로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나고 말았다.
* * *
그날 저녁.
한수호는 아카데미 기숙사 한쪽에 마련된 정원을 홀로 걷고 있었다.
‘그냥 방으로 찾아오든가 하지 무슨 정원에서 보자고 지랄이래?’
그가 정원을 걷는 이유는 최지혁 때문이었다.
저녁에 따로 보자더니 하필이면 기숙사 뒤뜰 정원이다.
추웠던 날씨가 조금씩 풀리고 있어 벌써 꽃들이 화사함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정원은 꽤 낭만적이다.
남녀가 그저 같이 걷기만 해도 묘한 감정에 빠질 수 있을 정도로.
그런 곳에서 시커먼 사내자식을 몰래 만나야만 하다니.
한수호는 벌써부터 몸이 간지러워졌다.
‘그건 그거고. LP 수치가 꽤 짭짤하단 말이지?’
이곳에 오기 전, 일일 미션을 완수한 한수호는 미션 성공으로 0.2NP와 20LP를 획득할 수 있었다.
LP가 활성화 된다더니 NP보다 무려 100배나 많은 포인트를 추가로 얻었다.
‘하긴…. 특성 업그레이드에 들어가는 포인트가 보통 높은 게 아니니까.’
개조 특성을 3단계로 올리려면 50,000LP가 필요하고, 광폭화 특성을 4단계로 올리기 위해선 무려 100,000LP가 필요하다.
하루에 20LP씩 획득한다고 가정했을 때, 50,000LP를 확보하려면 거의 7년을 모아야 가능했다.
100,000LP를 모으려면 추가로 13년 이상이 더 걸리는 것이고.
‘하…. 그냥 내가 마나 공법 분석해서 진화시키는 게 더 빠르겠네.’
도합 20년 동안 죽어라 LP를 모을 생각을 하니 맥이 쭉 빠졌다.
지난번에 깜짝 쇼처럼 등장한 특별 미션이라도 나도 한 번에 대량의 포인트를 얻지 않는 이상은 닿기 힘든 신기루요, 오르기 힘든 절벽이었다.
“후….”
한숨밖에 안 나온다.
그때, 앞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연인들을 위해 설치된 그네 뒤쪽으로 사람 그림자가 스윽 나타났다.
딱히 몸을 숨길 만한 장소도 없는데 땅에서 솟아나듯 나타난 존재에 한수호는 살짝 어이가 없었다.
“야. 그냥 평범하게 다녀. 대놓고 나 수상한 사람입니다, 라고 선전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 말에 수상한 그림자, 최지혁이 살짝 비틀했다.
“스, 습관이 돼서 그렇다.”
“습관 같은 소리 하네. 네 스승이 알면 아주 잘한다고 칭찬하겠네.”
“크흠. 쓸데없는 소린 그만해라.”
최지혁은 그제야 가로등 불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170을 조금 넘는 키.
건장한 한수호의 체격에 비해 다소 왜소해 보이는 신체.
하지만 저 몸에는 권존 김무성의 화룡인을 펼쳐낼 수 있는 막강한 힘이 감춰져 있었다.
“스승님은 잘 계시고?”
한때는 부모나 스승의 안부를 묻는 건 상대를 도발하기 위한 패드립으로 여겨졌지만, 지금 한수호는 순수한 의도로 물은 것이다.
“너…. 그 문양을 어떻게 알아본 거지?”
세상에서 화룡인이 사라진 지가 벌써 20년이다.
이제 19살인 한수호가 화룡인을 직접 본 적이 있을 리는 없었고, 누군가한테 이야길 들었다 한들 한눈에 알아볼 정도의 흔적도 아니었다.
그런데 한수호는 손에 화룡인이 새겨지기 전에 이미 그것이 화룡인이라는 걸 알아봤다.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리라.
“내가 그걸 알아본 게 중요한 건 아니지. 나 같이 어린놈도 그걸 알아볼 수 있는데, 아무 생각 없이 그 기술을 막 펼쳐내는 네 놈이 문제라고.”
“내가 펼친 건 화룡인이 아니다!”
“그래, 뭐. 살짝 다르긴 하더라. 화룡인은 적어도 용 대가리는 아니니까.”
한수호는 그네에 털썩 앉았다.
조금 전에 미션을 완수한 터라 다리 근육이 조금 조여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최지혁도 바로 옆 그네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러고는 한수호를 빤히 바라본다.
“처음이었다.”
최지혁의 왠지 진지한 표정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마치 좋아하는 이성에게 고백이라도 할 것만 같은 분위기.
“거절한다. 난 남자 안 좋아해.”
한수호는 철벽을 쳤다.
아니겠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최지혁의 고백을 사전에 차단했다.
그러자 최지혁이 똥 씹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개소리지? 내가 말한 건 내 주먹을 그런 식으로 받아내고도 멀쩡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다는 뜻이다.”
“아, 그런 거였어? 그럼 다행이고.”
“부탁이 있다.”
최지혁의 표정이 또 한 번 이상해졌다.
고백할지 말지 고민하는 듯한 표정.
한수호는 온몸으로 개미가 기어 다니는 느낌에 두 팔을 마구 훑어댔다.
그 행동을 이상한 눈빛으로 지켜보던 최지혁은 결국 뭔가를 결심한 듯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화룡인을 본 사실은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응? 그거 화룡인 아니라며?”
“어쨌든, 그 명칭은 어디에서도 다시 거론되면 안 된다.”
한수호는 어차피 다른 사람한테 화룡인에 대한 걸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최지혁이 너무 진지하게 부탁하니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순진해 보이는 최지혁의 눈을 보면 장난을 치고 싶은 욕망이 절로 피어오른다.
“공짜로?”
“돈이 필요하면 돈을 주겠다. 나한테 부탁할 게 있다면 들어줄 것이고.”
“마나 전음.”
“뭐?”
“그거 쓰는 방법 알려줘.”
“…?”
최지혁은 조금 당황했다.
한수호에게도 스승이 있고, 그 스승이 궁급 마공사라면 마나 전음은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자신한테 그걸 알려달라고 하니 이상할 수밖에.
“진심인가?”
“어. 진심. 내 주변엔 그거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없거든.”
스승 부부는 아직 궁급에 이르지 못했기에 마나 전음을 사용할 줄 모른다.
회귀 전에도 궁급에 오른 유대룡에게서 마나 전음만은 배우지 못했었다.
‘마공사가 되어 사람들 몰래 마나 전음이나 주고받는 행위는 수치일 뿐이다.’라는 사고방식을 가진 유대룡이었기에 가르쳐 달라고 떼를 쓰지도 못했다.
반면, 최지혁 입장에선 매우 쉬운 조건이었다.
실력을 감추고, 신분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그에게 스승이 가장 먼저 가르쳐준 것이 바로 마나 전음이었으니까.
“지금 바로 가르쳐주겠다.”
“나야 땡큐지.”
그렇게 최지혁의 마나 전음 전수가 바로 시작되었다.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마나력을 끌어올려 힘으로 전환 시키는 게 아니라 성대의 울림을 컨트롤 해서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음역대의 초음파를 만들어 내는 원리다.
말이야 쉽지만 성대 울림을 컨트롤 하는 건 굉장한 난이도였다.
조금만 삐끗해도 괴성이 되어 흘러나오거나 듣기 싫은 고음의 비명이 터져 나왔으니까.
하지만 한수호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방법을 알게 된 즉시 컨트롤이 가능했고, 곧바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에 최지혁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너…. 정체가 뭐냐?”
“나? 장태산.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울도리에 있는 울도 출신의 열아홉 청춘이지.”
한수호의 장난기 어린 말에 최지혁이 쓰게 웃었다.
“그리고 9살에 비돈귀살의 양자가 되어 쾌검과 뇌전 특성의 마나 공법을 습득한 자연 각성자기도 하고.”
한수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가 자연 각성자라는 사실은 스승 부부 외에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최지혁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날 감시한 게 아니라, 내 뒤를 캐고 있었던 거군?”
한수호의 몸에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폭발적으로 표출되는 분노보다 오히려 이런 살기가 최지혁에게 더욱 강한 저릿함을 선사했다.
“난 해야 할 일이 있고, 그걸 위해 내 목숨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
“그래서?”
차가운 반문.
한수호는 무슨 헛소리를 하냐고 따지지 않고 조용히 최지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일에 방해가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처치할 것이며, 내게 필요한 인물이라면 그의 조상 무덤까지도 파헤쳐 정보를 캐낼 것이다.”
“그럼 난 후자란 소린가?”
“스승께서 널 돌봐주라 하셨다. 우리의 대업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면서 말이야.”
최지혁은 한수호에게 믿음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스승의 말도 있었지만, 직접 경험해 본 한수호는 믿을 만했고 자신들이 상대해야 할 흑막의 주인공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으니까.
“대업은 뭐고, 무엇으로부터 날 돌봐주겠다는 거지?”
한수호는 최지혁의 스승이 김무성일 거라고 거의 확신했다.
그는 20년 전 불의의 사고로 아무도 모르게 죽은 게 아니라 일부러 모습을 감춘 게 분명했다.
“아직은 말해줄 수 없다. 스승님은 지금도 생명에 위협을 받고 계시니까.”
스승님의 안전을 위해 함부로 사실을 밝힐 수 없다는 뜻.
그런데 이럴 거면 굳이 자신한테 왜 이런 말을 하는 걸지 의아했다.
그렇다고 더 캐물어 봐야 더 이상의 명쾌한 대답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하아…. 그러니까 나 지금 무보수의 강력한 보디가드가 하나 생긴 거네?”
“섬 출신 촌뜨기한테 보수를 요구할 생각은 없다.”
“어이구. 그러세요? 그래도 소리비도가 둘째라고 돈 좀 있으신가 보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네 처지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돈 없는 자의 설움을 잘 안다는 듯한 투의 말에 한수호는 낄낄 웃고 말았다.
“이해 같은 소리 한다. 아, 됐고. 네가 보디가드를 하던, 경호를 하던 네 마음대로 하셔. 하지만 나보다 네 스승의 안전이나 더 신경 쓰는 게 좋을 거야.”
“스승님은 나 대신 내 사형이 잘 챙길 테니 걱정 마라. 나도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고.”
“그럼 다행이긴 하네….”
한수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최지혁이 그 또한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을 거라는 말에서 한 가지를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이 녀석 스승이라는 사람도 아카데미에 있다는 소리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여기서 자신을 보호하면서 스승의 경계까지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좀 이상했다.
이렇게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최지혁에 대해 알아본 결과 지금 상태에서는 그가 폭탄 테러를 자행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럼 대체 뭐지? 나 때문에 또 뭔가가 바뀐 건가?’
지금으로선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