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으윽!”
한수호는 머리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고통에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어두운 밤하늘과 반짝이는 별들뿐.
“악몽이라도 꿨니?”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한수호는 급히 고개를 돌려봤다.
그곳엔 단아한 얼굴의 한 여인이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엄마?”
그 얼굴은 이미 오래전 기억 깊숙한 곳으로 잠식되어 사라져버린 한수호의 엄마, 이태희의 것이었다.
“녀석. 그러게, 공포영화 좀 적당히 보라니까.”
근처에서 또 다른 그리운 음성이 들려왔다.
한수호과 이태희가 있는 곳은 모닥불 옆이었고, 건너편에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더 있었다.
곰처럼 큰 덩치, 굵은 중저음의 목소리, 그리고 모닥불을 들쑤시고 있는 털이 가득한 팔뚝.
“아빠!”
그는 17년 전, 알 수 없는 적으로부터 가족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한수호의 아빠, 한철형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17년 전에 죽은 부모가 나타났다. 아니, 나타났다기보다는 부모가 살아있는 장소에서 정신을 차렸다.
“얘 좀 봐? 너 왜 그렇게 식은땀을 흘리니? 여보. 잠깐 별이 좀 봐줘요.”
이태희는 품에 안고 있던 작은 포대기를 한철형에게 건네고는 한수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손으로 이마를 잠시 짚어보다가 목이며,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한수호는 그 손길을 거부하지 못했다. 방금 이태희가 한철형에게 건넨 그 무언가의 정체가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
‘설마…. 한별이?’
한수호의 막냇동생이었다.
태어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이제 막 뒤집기를 시작한 어린 동생 한별.
‘뭐지? 왜 한별이가 저런 갓난아이의 모습으로…?’
한수호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그리고 크게 놀랐다.
팔도, 다리도 너무 작고 짧았다.
160이 조금 넘는 작은 체구였던 이태희에 비해서도 너무나 작은 몸.
지금의 한수호는 9살 어린아이의 몸을 하고 있었다.
“휴우. 몸은 문제가 없는 것 같네. 하루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렴.”
이태희는 애정이 가득한 손길로 한수호의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엄마…. 엄마!”
한수호는 자기도 모르게 이태희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부모를 보자마자 17년 전의 악몽이 떠올랐다.
화목하기만 했던 한수호의 가족은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의 암습을 받고 몰살했다.
마공특무부의 전설적인 요원이었던 부모님에 형과 쌍둥이 여동생, 그리고 막내 여동생까지 2남 2녀로 이루어진 가족이 모두 살해당하고 오직 한수호 혼자만 살아남았다.
적의 정체는 17년이 지난 시점까지도 밝혀내지 못했다.
실눈으로 웃는 얼굴의 하얀 가면을 쓴 그들은 너무나도 강력했고, 잔인했다.
강철보다 강인한 육체를 지녔던 한철형이었지만 가족을 살리기 위해 적의 미끼가 되었다가 처참하게 목이 잘렸다.
특무부의 암살 요원으로서 누구보다도 은밀한 움직임을 보였던 이태희는 절벽에서 떨어진 어린 자식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하지만 한철형과 이태희의 죽음은 한수호만 살렸을 뿐, 다른 세 자식은 끝내 구하지 못했다.
한수호보다 4살이 많은 한성찬은 아빠를 살리겠다고 뛰쳐나갔다가 누군가의 검에 가슴을 베였고, 쌍둥이 여동생 한설아는 막내 한별이를 보호한다고 암습자의 칼에 눈을 찔렸다.
막내 한별이의 최후도 끔찍했다.
한 살도 되지 않은 아이를 이태희의 품에서 빼앗아 간 적들은 그 어린아이를 절벽에 떨어뜨려 처참히 죽여버렸다.
한수호가 살아남은 건 천운이었다.
정확한 과정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수호는 운이 좋게 적들의 포위망을 벗어났고, 뒤늦게 현장을 찾은 한철형의 친우이자 특무부의 간부인 유대룡의 손에 발견되었다.
그 후로 한수호는 유대룡의 손에서 성장했으며, 아버지 한철형의 뒤를 이어 마공특무부의 요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자 한수호는 이태희의 품을 떠날 수가 없었다.
“어머, 우리 수호…. 오늘따라 이상하네? 평소엔 창피하다며 엄마 손도 안 잡던 녀석이.”
“수호가 엄마 품이 그리운가 보구나. 성찬이하고 설아는 자고 있으니까 오늘은 수호가 엄마 독차지해도 되겠다. 하하하.”
한철형은 한수호가 늘 까불대지만 형인 한성찬보다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 깊고 넓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럼. 오늘은 엄마가 재워줄게.”
이태희는 한수호의 작은 몸을 품에 안고 팔베개를 해주었다. 엄마의 포근한 살 내음을 맡고 있자 한수호의 눈은 저절로 감기려 했다.
‘이대로….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다른 그 무엇도 바라지 않았다.
부모가, 형제가 살아있던 이 시점에서 모든 게 멈추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한수호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
지금 이 장소, 이 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한수호는 이태희의 품에 안긴 채 옆구리 쪽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는 부모 몰래 눈을 뜨고 주변을 빠르게 확인하고 있었다.
‘지금 난 17년 전으로 돌아온 게 분명해. 내 가족 모두가 죽은 그날로.’
17년 전, 한수호과 이태희는 마공특무부 요원 생활을 청산한 지 5년이 지났을 때, 큰아들 한성찬의 생일을 맞이해 가족만의 여행을 떠났었다.
그리고 그 여행에서 가족은 파국을 맞이했다.
지금 시점은 지리산의 깊숙한 곳에서 보내는 여행의 첫날 밤이었고, 바로 이날 한수호를 제외한 모두가 죽는다.
그때의 충격이 너무도 컸기에 모든 게 생생하게 기억났다.
부모와 했던 말과 행동들, 그리고 그들이 처절하게 죽어가던 모습까지도.
어떻게 이 시점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
자신은 이대성의 검에 심장을 찔렸고, 분명히 죽었을 터.
검은 구체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대체 그 구체는 뭐지?’
이대성이 만들어낸 것으로 생각되는 구체.
그 구체는 모든 걸 빨아들일 만큼 강력한 흡입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블랙홀과 같은 느낌.
‘새로 얻었다는 특성 때문인가?’
이대성은 새로 특성을 얻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걸로 한수호의 광폭화 특성을 흡수할 수 있는 것처럼 말했다.
어쩌면 이대성이 광폭화에 걸려 이지를 상실하고, 개조 특성 때문에 정신력이 1로 낮아져서 특성을 잘못 사용한 부작용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17년 전으로 되돌리는 부작용이 존재한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지금 한수호가 존재하는 이곳은 절대 꿈 같은 것이 아니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상현실 같은 곳으로 빨려든 것도 아니다.
이곳은 엄연히 현실이었고, 한수호에겐 두 번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의 시작점이었다.
일단 한수호는 17년 전으로 회귀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기로 했다.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다소 편해졌다. 그리고 좀 더 폭넓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상태부터 점검해보자.’
한수호는 여전히 이태희의 품에 안긴 채,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어디 불편하거나 문제가 있는 곳은 없었다. 오히려 너무 깨끗해서 낯선 기분이 들 정도.
‘특성은 사용할 수 있는 건가?’
9살의 몸으로 회귀했다면 특성도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광폭화<<
>>개조<<
특성이 존재했다.
특성을 떠올리면 사용할 수 있는 특성이 메뉴처럼 눈앞에 뜨게 되는데, 놀랍게도 두 가지 특성이 모두 떴다.
천만다행이었다.
광폭화만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었는데, 개조까지 존재했으니 오늘 일어날 참상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힘은 갖춘 셈이다.
한수호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두 가지 특성을 어디까지 사용할 수 있는지 한 번 더 확실하게 확인했다.
‘먼저 광폭화부터.’
[특성: 광폭화]
-육체에 과부하를 걸어 30분간 상상 이상의 힘을 획득합니다.
-특성 단계: 3단계(3/7)
-3단계 효과: 기존 능력의 3배까지 상승이 가능하지만 이지력을 상실합니다. 또한 특성 사용 후 페널티로 인해 1시간 동안 정신을 잃게 됩니다.
-주의 사항: 2단계부터 광폭화를 적에게 걸 수 있으며, 70%의 확률로 자살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단, 이 경우 사용자의 몸이 주박에 묶여 적에게서 5미터 이상 떨어질 수 없게 됩니다.
-쿨타임: 60분
-4단계 업그레이드 포인트: 100,000LP
특별히 달라진 건 없는데, 마지막에 한 줄이 추가되어 있었다.
‘4단계 업그레이드 포인트?’
처음 보는 문구였고, 수치는 무려 10만이었다. 그 포인트라는 단어에서 뭔가 감이 왔다.
한수호는 곧바로 개조 특성에 대한 설명을 확인했다.
[특성: 개조]
-1일 1회 주어지는 미션을 수행하여 포인트를 모으고, 그 포인트를 스탯에 분배하여 육체를 개조합니다. >>잠김
-특성 단계: 1단계(1/5)
-1단계 효과: 기본 개조에 해당하며, 신체 외형을 부분별로 특정하여 스탯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3회 한정으로 상대방 스탯 조정이 가능합니다. 쿨타임 [3649:23:56:38]
-보유 포인트: 10,000LP
-단계 업그레이드 포인트: 10,000LP
<오늘의 미션 확인>
개조 특성은 뭔가 많은 게 달라졌다.
일단 효과에 대한 설명과 상대방 스탯 조정에 대한 내용이 잠긴 상태가 되었고, 보유 포인트는 0에서 1만으로 바뀌었다.
쿨타임도 원래 24시간이었는데 타이머로 바뀌어 3,649일 하고도 23시간이 넘게 남은 상태였다.
‘내가 이대성, 그 개자식의 정신 스탯을 1로 조정해버려서 쿨타임 10년이 적용된 거구나.’
아마도 앞으로 저 쿨타임 시간이 0이 되기 전까지는 포인트를 스탯에 배분할 수 없으리라.
그 외에도 바뀐 건 또 있었다.
설명창 옆에 떠 있는 한수호의 인체 해부도 상의 수치도 싹 바뀌어 있었다.
팔, 다리, 머리, 가슴, 배의 모든 부위가 똑같이 10으로 떨어졌다.
9살의 몸이 되어버렸으니 스탯이 내려간 건 이해가 됐지만, 이전에 비해 형편없이 낮아진 것을 보니 괜한 상실감이 들었다.
‘이 10이라는 수치가 얼마나 되는 힘일까?’
궁금했지만 지금은 확인할 방법이 전무했다.
‘근데 보유 포인트가 1만이나 있으니 개조를 2단계로 올릴 수 있다는 거잖아?’
이건 다행이었지만 미션을 딱히 수행한 게 없는데 어디서 포인트가 생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오늘의 미션’을 확인했다.
[오늘의 미션]
-팔굽혀펴기 10,000회
-획득 포인트: 0.1
>>특별 미션, ‘봉인 특성 해제하기’가 달성되어 10,000LP가 지급되었습니다.
포인트 1만은 개조 특성의 봉인 해제 덕분이었다.
대충 개조 특성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확인한 한수호는 1만 포인트로 무엇을 해야 오늘 일어날 끔찍한 참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자신의 신체 스탯을 높이는 건 잠긴 상태였고, 광폭화의 단계를 올려 위력을 높이는 것도 불가능했다.
‘개조 단계를 올리자.’
지금 가능한 건 그것뿐이었다.
과연 2단계로 올렸을 때 어떤 효과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뭐가 됐든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당장 얻어내야 했다.
한수호는 개조 특성의 단계를 어떻게 올리는지 몰라 잠시 헤매다가 무심코 ‘2단계 업그레이드’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특성: 개조’의 단계를 업그레이드합니다. 10,000LP가 소모됩니다. YES/NO
선택의 시간.
한수호는 이를 꽉 깨물고 YES에 시선을 집중했다.
>>’특성: 개조’가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1단계=>2단계
-2단계 효과: 특수 개조에 해당하며, 신체 내적인 부분의 스탯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잠시 후, 친절한 설명이 이어지더니 눈앞으로 두 번째 인체 해부도가 등장했다.
이건 이대성의 정신 스탯을 조정할 때 한 번 봤던 것이다.
심장, 폐, 위, 시각, 청각, 후각으로 구분된 해부도였는데, 모든 수치는 5로 통일되어 있었다.
그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슈아아아아아악
한수호는 갑자기 온몸을 시원한 바람이 훑고 가는 기분을 느꼈다. 무겁게 느껴지던 머리는 한없이 가벼워졌고, 온몸에서 힘이 넘쳐흘렀다.
게다가 어둠 속에서도 꽤 정확하게 사물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소리와 냄새에도 굉장히 민감해졌다.
숲의 먼 곳에서 나는 작은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상당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계곡물의 물 내음까지 맡을 수 있었다.
개조 특성의 2단계를 업그레이드하면서 여섯 개 항목에 스탯이 5씩 자동으로 분배됐다. 그것만으로도 한수호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변화에 한수호를 무릎에 안아 들고 있던 이태희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흠칫했다.
“어머? 이게 무슨 기운이지?”
“왜? 갑자기?”
“수호 몸에서 청량한 기운이 느껴져서요. 그런데 몸을 가늘게 떨고 있어요.”
“수호 녀석, 쉬한 거 아니야? 9살이나 된 녀석이 엄마 무릎에서 쉬나 하고 말이야!”
한철형이 농담을 하며 짐짓 인상을 썼지만 이태희는 웃지 않았다. 갑자기 뭔가를 발견한 듯 찌푸린 얼굴로 한철형을 바라봤다.
“여보. 누가 오고 있어요.”
“나도 느꼈어. 한둘이 아닌데?”
한철형도 이태희가 느낀 걸 바로 알아차렸다.
“좋은 일로 오는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아요.”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오는 기운들. 그들은 인기척을 최대한 숨긴 채 은밀하게 이쪽으로 접근 중이었다.
그때, 가만히 이태희의 무릎 위에 누워있던 한수호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한철형과 이태희를 바라보며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 어머니! 미친 소리 같겠지만 부디 제 말을 믿고 따라주세요.”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심각한 말투와 표정이었기에 한철형도 이태희도 아무 말 못 하고 한수호를 바라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