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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작가의 막내도련님은 암살자-318화 (318/325)

제318화. 그가 만든 세상 (5)

“어라라?”

처음 보는 낯선 곳에서 눈을 뜬 나나.

얼추 봤을 땐, 전쟁 중에 비상시로 짓는 막사처럼 보였다.

‘깨어나셨군요 나나!’

익숙한 하스티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하스티아는 나나가 누워있던 간이침대 바로 옆에 자리를 지키며 앉아 있었다.

어째서인지 나나의 한쪽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뭐, 뭐에요? 내 손은 왜 잡고 있어요?”

‘아, 그러니까. 이건 다 이유가…….’

“나나!”

그때 밖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에밀리와 브라이언이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왔다.

나나에게 달려간 에밀리는 다짜고짜 그녀의 등을 내리쳤다.

“너 언니가 뭐라 그랬어? 이상한 거 함부로 먹고 다니지 말랬지!”

“아야! 아파요 에밀리 언니!”

나나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에밀리는 때리다가 말고 나나의 몸을 덥석 끌어안았다.

“걱정했단 말이야! 너까지 잘못되는 줄 알고!”

그러면서 갑자기 얼굴을 파묻으며 흐느끼니, 나나로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나나야. 너 이틀 동안 기절해 있었어.”

설명은 브라이언이 대신해주었다.

“이, 이틀?”

나나의 마지막 기억은 대피 중에 나타난 다크 엘프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치운 일이었다.

일단 맛이 굉장히 없었다는 건 확실하게 기억했다.

다 먹어치웠을 땐 속이 너무나도 안 좋아져서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던 것까지 어렴풋이 생각나긴 했지만,

설마 이틀 동안 기절했었을 줄이야.

나나는 아직 매스꺼움이 느껴지는 배를 살살 문질렀다.

‘다크 엘프의 피엔 생물의 몸을 녹이는 치명적인 독이 들어 있었어요.’

“독이요?”

말이 좋아 다크 엘프지, 사실은 죽은 엘프의 시체에 마수의 피를 주입해서 만든 기형체에 지나지 않았다.

나나의 몸이 강인한 드래곤의 신체였기에 망정이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미 피가 피부에 닿았을 때, 바로 중독되었을 것이다.

“그럼 중독된 제 몸을 누가 정화해준 거예요?”

‘…….’

하스티아는 손가락으로 조용히 자신을 가리켰다.

내심 부끄러움을 느낀 듯 새하얀 볼살에 홍조가 번졌다.

“하스티아가 너 간호한다고 이틀 동안 화장실도 못 가고 옆을 지켰어. 하스티아가 네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 못 하는 그녀를 대신해 에밀리가 덧붙이며 말을 이었다.

“그, 그래요?”

‘생명의 은인이라뇨?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에요! 나나 님도 우리를 지켜주시다가 이렇게 되신 건데…….’

하스티아는 당치 않는 말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묘한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고, 고마워요. 하스티아…….”

나나는 먼저 감사를 표하면서 슬그머니 하스티아의 손을 다시 잡았다.

‘저, 저야말로…….’

그동안 못내 어색했던 둘의 관계가 조금은 부드러워진 듯했다.

“아린 황녀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때, 아린이 도착했단 소식이 캠프 전체에 울려 퍼졌다.

현재 캠프가 위치한 곳은 쥬른 남쪽 성문으로부터 걸어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지점.

사실상 벨리아스 전선과 비슷한 북쪽의 또 다른 진영캠프를 차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착한 인원은 아린과 레시무스 단둘뿐.

루웬에서 출발해 캠프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딱 3일.

그 3일 동안 수면 시간을 합치자면 4시간도 채 안 되었다.

그럼에도 아린과 레시무스의 얼굴엔 작은 피로감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크 엘프의 진격이 멈췄다고요?”

이미 오면서 전령구를 통해 상황을 수시로 보고 받았기에, 어느 정도 파악은 된 상태였다.

쥬른 북쪽 성문에 나타난 다크 엘프 대군단.

그들의 진격을 무려 이틀이나 저지한 세 명의 결사대.

그리고 캠프를 차리기 딱 하루 전, 쥬른 방향에서 거대한 빛줄기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경이 목격되었으며, 그 일을 기점으로 다크 엘프는 쥬른에서 진격을 멈췄다고 했다.

아린은 바로 그 세 명의 결사대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린 언니!”

가는 도중 막사에서 나온 나나 일행과 조우했다.

“나나야!”

무사한 나나의 모습에 아린은 크게 기뻐했다.

나나에 관한 일도 오면서 들었기에 내심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매우 활기찬 상태였다.

“몸은 괜찮아?”

“응! 이상한 거 먹고 배탈이 좀 나긴 했는데, 이젠 괜찮아졌어.”

아린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나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그러자 이번엔 그 옆 막사에서 전신에 붕대를 칭칭 감은 세트가 나왔다.

“얼레? 아린 황녀 언제 왔어?”

“세트 왕자? 몸은 괜찮은 거예요?”

깜짝 놀란 아린과 다르게 세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 정도야 침 바르면 낫는 수준이지. 이런 붕대 거추장스러워서 웬만하면 잘 안 하려 했는데……!”

“안 됩니다 왕자님!”

답답함에 붕대를 풀어헤치려 하자, 시종과 치유사들이 튀어나와 그를 만류했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난 괜찮으니까. 저기 있는 우리 후배 님한테나 가봐.”

세트는 소탈하게 웃으며 또 다른 막사를 가리켰다.

“저기에 루나브가 있는 건가요?”

“시안 그놈이랑 같이 있어. 진짜 이젠 놀라게 하는 것도 지칠 지경이야.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우리 둘을 보내고 혼자 버틸 생각을 한 거지?”

세트로선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가서 위로 좀 해줘. 무슨 심한 충격을 받았는지, 돌아와서도 통 말을 안 하더라.”

아린은 세트의 말에 따라 바로 루나브가 있는 막사로 향했다.

“루나브? 안에 있어요?”

들어가기 전, 막사 앞에서 조심스레 그녀를 불러 보았다.

-펄럭

그러자 한 여인이 천을 걷고 밖으로 나왔다.

“황녀님?”

바로 엘리스였다.

“엘리스 님! 무사하셨……!”

그녀가 무사한 것에 기쁨을 표하려던 것도 잠시,

엘리스는 손가락을 자신의 입을 막으며, 조용히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곤 말없이 몸을 움직여 아린이 막사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내주었다.

“루나브 양도 황녀님을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에요. 어서 들어가 보세요.”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아린은 그렇게 엘리스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

아린은 들어가자마자 몸을 멈칫했다.

“시, 시안?”

눈이 반쯤 떠 있는 멍한 상태로 의자에 앉아 있는 시안.

그리고 그 옆엔,

“오셨어요?”

무심한 눈으로 시안을 하염없이 보고 있는 루나브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린은 일단 말없이 루나브의 곁으로 다가갔다.

“회담, 잘 안 되셨죠?”

루나브는 바로 회담에 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응. 아쉽게도 가람 왕국의 지원은 이끌어내지 못했어.”

“당연할 거예요. 그런 이득 없는 일에 우리 학회가 나설 리도 없으니까.”

루나브의 눈은 여전히 시안에게 향해 있었다.

“원래 제 계획에 따르면, 전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됐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쥬른에서 최후의 최후까지 버티다가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중요한 재원인 절 잃고 분노한 가람 학회가 연합군 창설에 동조한다. 이게 원래 제 계획이었어요.”

“너 죽을… 생각이었어 루나브?”

루나브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왜? 어째서? 너 시안을 지키고 싶었던 거 아니야? 시안을 놔두고 네가 왜……!”

“전 선배가 깨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아린의 입은 허공에서 멈춰버렸다.

“제가 계산했던 선배가 깨어날 확률, 얼마나 됐는지 아세요?”

“…….”

“0.1프로였어요. 1프로도 아니고 겨우 0.1프로…….”

사실상 0에 가까운 확률이었다.

“그래도 완전한 제로는 아니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비록 실낱보다 못한 가능성이긴 하지만, 전 믿어보려 했어요. 그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점점 현실을 깨달았죠. 난 이젠 두 번 다시, 선배의 원래 모습을 못 볼 거란 걸……. 그런 무서운 세상에서 전 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혼자 죽으려고 했다는 거야? 그런 무책임한 생각이 어딨어? 널 소중히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은 전부 무시한 거니?”

“그랬을지도 모르죠. 그냥 선배가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죽어야겠다. 이 생각뿐이었으니까.”

루나브는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

“제가 꿈꾼 미래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남자 덕분에 알게 됐으니까…….”

아리송한 말과 함께 루나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려고?”

“선배와 둘이 있을 시간을 드리려고요. 하고 싶은 말 있으셨으면 부담 갖지 말고 하세요.”

뭐라 만류할 새도 없이, 루나브는 빠르게 막사를 나갔다.

얼떨결에 시안과 둘이 남겨져 버린 상황.

“하아…….”

아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다가도 측은한 눈으로 시안을 마주하였다.

“그거 아니 시안? 넌 참 난해한 남자라는 거.”

“…….”

“그야말로 안개에 가려진 사람처럼,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남자였어.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아린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넌 아마 이해 못 하고 있을 거야. 우리가 왜 그렇게 너를 지키려고 애를 쓰는지. 다른 이유는 없어. 나도, 루나브도, 그 외에 너를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세상을 네가 만들었기 때문이야.”

시안이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그 세상.

정작 당사자만 그 가치를 모르고 있는 세상이었다.

“난 사람들에게 말했어. 너를 향한 진심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런데 정작 난 내 진심을 네게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

말을 마친 아린은 시안의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곤 살며시 손을 들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그의 뺨을 부드럽게 거머쥐었다.

“이게 내 진심이야.”

깊고, 뜨겁게,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아린의 붉은 입술이 시안의 마른 입술과 맞닿았다.

이 순간, 아린은 그 어느 때보다 진실된 마음으로 시안에게 온기를 불어넣었다.

그 마음이 닿을 수 있을진 모르지만,

아린은 그걸로 충분했다.

이제야 비로소, 그동안 꾹꾹 눌러 담았던 자신의 진심을 전할 수 있었으니.

-뚝

눈가에 맺힌 뜨거운 눈물이 아린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시안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교감을 마친 아린은 그대로 다리를 펴고 일어났다.

“다크 엘프의 진군은 잠시 멈췄대. 하지만 네가 살아있는 한, 그들의 진격은 멈추지 않겠지. 그걸 우리가 막을 수 있을진 모르겠어.”

아린은 시안의 앞에서 주먹을 쥐며 의지를 굳혔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막아낼 거야. 이 세상은 네가 만들어준 소중한 세상이니까. 내가 꼭 지켜줄게!”

“…….”

“설사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린은 치솟는 미련을 애써 억누르며 과감하게 몸을 돌렸다.

진심을 전했으니, 이제는 나아갈 일만 남았다.

비록 그 앞에 넘을 수 없는 커다란 산이 있다고 할지라도.

-턱!

“……!”

다시 발을 움직이려던 아린의 몸이 돌연 얼음처럼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녀가 멈추고 싶어서 멈춘 게 아니었다.

그녀의 고운 오른손을 꽉 붙들고 있는 또 하나의 손.

지금 이 막사 안에는 방금 전 입을 맞추었던 두 남녀 외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린은 숨조차 제대로 못 쉴 만큼 심장이 미칠 듯이 뛰고 있었으며,

그런 흥분되는 마음을 간신히, 정말 간신히 억누른 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한결같이…….”

“……!”

듣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칠만큼 무뚝뚝하면서도 그리웠던 그 목소리.

“미련하시군요.”

목소리의 주인은 늘 그래 왔듯 부정적인 마음이 잔뜩 느껴지는 말투로 아린을 나무라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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