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6화. 그가 만든 세상 (3)
다크 엘프 대군단의 침공 소식은 복귀 중인 아린 황녀에게도 전해졌다.
아직 정확한 수는 집계되지 않았다.
다만 쥬른 앞에서만 못해도 천명 이상은 목격된 만큼 그들의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쥬른까지 얼마나 걸릴까 레시무스?”
“설마 쥬른으로 바로 복귀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하지. 황성에서 머리만 싸매고 있을 순 없잖아. 내가 직접 현장에서 지휘해야지.”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멉니다! 지금부터 달린다고 한들, 아무리 빨라 봐야 사흘은 걸릴 것입니다!”
그것도 잠 한숨 안 자고, 쉼 없이 달렸을 때나 가능할 일이었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못해도 나흘은 걸렸다.
허나 아린은 개의치 않고 다른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일단 백성들의 대피를 최우선적으로 해달라고 전령을 보내주세요.”
“알겠습니다!”
다시 말을 몰기에 앞서, 아린은 하늘을 보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알아. 내가 간다고 크게 도움될 건 없다는 걸.”
레시무스는 차마 아니라고 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지 않고는 도저히 못 참겠어. 지금 쥬른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이후로도 난 아무것도 지키지 못할 거야. 그러니 갈 수밖에 없겠지.”
결심을 세운 아린은 다시 말을 몰았다.
“조금만 더 버텨줘 시안!”
* * *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루나브님?”
“안 괜찮아요.”
“예?”
“안 괜찮다고요.”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전령 속 슈르츠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준 서신, 잘 갖고 있죠?”
“물론입니다. 하지만 아직 리겐스 학회장님께서 학회에 복귀하지 않으신 터라…….”
“다급할 필요 없어요. 그냥 오는 대로 드리세요. 그럼 얼추 시기가 맞춰질 것 같으니까.”
루나브의 말투는 평소와 다름없이 매우 무덤덤했다.
이에 슈르츠는 뭔가 결심이 선 듯 침을 한 번 삼킨 뒤 입을 열었다.
“혹시 서신의 내용이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별거 없어요. 다만 그 서신을 할아버지께서 보시면, 아마 가람 왕국도 연합군 창설에 동조하게 될 거예요.”
우시프 제국이 제안한 연합군 창설에 가람 왕국은 동조하지 않을 것임을, 루나브는 이미 예상한 듯 보였다.
슈르츠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또 한 번 물었다.
“전 루나브 님을…… 다시 뵐 수 있는 겁니까?”
루나브는 대답을 잇지 않았다.
“답을 못 드리겠네요.”
“어째서입니까?”
“전 확신하지 않는 일에 대해선, 답을 하지 않으니까요.”
“루나브 님! 그 말씀은……!”
“이만 끊을게요 슈르츠.”
루나브는 전령을 가차 없이 끊어냈다.
뒤늦게 잘 살라는 말도 전할 걸 하는 생각이 밀려왔지만, 부질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무심하게 몸을 돌렸다.
“끝났어?”
“네.”
성벽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세트가 맞이해주었다.
“좋아. 그럼 우린 저 시커먼 놈들이랑 어떻게 싸워야 하는 거지?”
“싸우지 않을 거예요.”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세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안 싸울 거라고?”
“정확히는 싸울 이유가 없다고 봐야겠죠.”
엘리스 또한 루나브의 말을 거들며 나섰다.
“그게 무슨 말이야? 싸우지 않고 어떻게 막아?”
“지금 쥬른에 남은 수비 병력은 우리 셋이 끝이에요. 저 앞엔 천 명이 넘는 다크 엘프들이 여길 노리고 있고요. 이런 압도적인 수적 열세를 과연 전투로 극복할 수 있을까요?”
“뭐 쉽진 않겠지만, 최선을 다해 싸우다 보면…….”
“저들이 인간이라면 또 모를까, 다크 엘프인 상황에서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해요.”
이미 다크 엘프의 힘을 눈앞에서 봤던 엘리스이기에,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럼 뭐 어쩌겠다는 건데? 싸우지 않고 저놈들을 어떻게 막아?”
난색을 표하는 세트와 다르게, 루나브와 엘리스는 벌써 생각을 맞춘 듯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크 엘프들이 오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우우웅
그러자 성벽 앞 50m 지점을 시작으로 주변에 거대한 장막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다크 엘프 군단의 접근을 막기 위한 제한 결계였다.
장막이 도시 전체를 덮기까지 걸린 시간은 딱 1분.
“우워…….”
세트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렇게 거대하고 단단한 결계를 본적이 있던가?
신의 벼락이 내려쳐도 끄떡없을 기세의 강성한 제한 결계가 다크 엘프의 앞길을 떡하니 막았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희가 해야 하는 건 어디까지나 시간 벌기에요. 굳이 전투로 무의미한 힘 낭비를 할 필요는 없어요.”
단순히 결계를 생성한 것에서 끝내는 것이 아닌, 루나브는 내면에 깃든 마나를 최대한 끌어내면서 결계의 강도를 계속 강화하였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
저 멀리 보였던 다크 엘프의 군세가 어느새, 성벽 앞까지 이르렀다.
다크 엘프들은 정확히 결계 바로 앞에서 진격을 멈추었다.
“멈췄는데?”
“결계가 있다는 걸 알아챈 거예요.”
보일 듯 말 듯 투명한 결계를 빤히 바라보는 다크 엘프들.
그들의 붉은 눈동자는 곧 성벽 위에 자리한 세 남녀에게 향했다.
-턱!
돌연 선두에 있던 열 명의 다크 엘프들이 결계에 손을 얹었다.
곧 그들의 손에서 발현된 흑빛 마나의 흐름이 결계로 전이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쟤들 결계를 파괴하려는 것 같은데?”
“죽다 살아난 시체들이라고 하기엔, 굉장히 똑똑하네요.”
마수처럼 무턱대고 힘으로 들이받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그들은 어디서 발현했는지 모를 마력을 이용해 결계를 무력화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죠.”
이에 엘리스가 한걸음 나서며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삭풍(朔風)의 분노가 소용돌이를 일으킬 지어니…….”
그녀가 주문을 읊으니, 갑자기 다크 엘프들이 있는 결계 바깥으로 칼날 바람이 휘몰아쳤다.
바람의 중심엔 물웅덩이가 생성되었으며, 휘몰아치는 바람에 의해 회오리가 만들어지면서 다크 엘프들을 휘말리게 했다.
-퍼엉!
잠시 후, 회오리 중심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물기둥이 위로 솟구치니, 휩쓸린 다크 엘프들은 이렇다 할 저항도 못 한 채 무기력하게 나뒹굴었다.
“후…….”
마법을 무사히 완료한 엘리스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초반부터 너무 고등급의 마법을 쓰시는 거 아니에요?”
“어중간한 마법으론 저들을 막을 수 없어요. 한 번 하더라도, 제대로 해야죠.”
그러면서 아직은 끄떡없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대충 알겠네. 결계를 이용해 저놈들의 진격을 막고, 마법으로 방해하자는 계획인 거지?”
“맞아요. 그게 우리의 힘을 가지고 최대의 시간을 벌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향이에요.”
“이봐 숙녀님들 지금 장난해? 이렇게 시간만 벌어서 뭐가 남는데?”
“선배가 깨어날 시간을 벌겠죠.”
루나브는 당연하다는 말투로 답했다.
세트는 그 모습을 보며 손을 절레절레 젓더니,
“숙녀님들 마음은 알겠는데, 난 그렇게 심심한 일엔 못 어울려줄 것 같다.”
대뜸 성벽 밑으로 훌쩍 뛰어내린 뒤, 바로 다크 엘프들을 향해 질주했다.
“어디 가는 거예요 세트 왕자!?”
깜짝 놀란 엘리스와 다르게, 루나브는 덤덤한 눈빛을 유지했다.
“시간을 벌 때 벌더라도, 화끈하게 벌어줘야 하지 않겠어!!”
호쾌한 외침과 함께, 달리는 세트의 발밑으로 모래바람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모래바람은 머지않아 모래폭풍으로 진화했으며, 폭풍과 한 몸이 된 세트는 다크 엘프들을 향해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이럴 때 힘 좀 써보자! 신인지 뭔지 이 망할 놈의 존재야!”
그 부름에 응답하기라도 한 듯, 세트의 검은 눈동자가 순식간에 갈색빛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을 성벽 위에서 지켜본 엘리스는 난감함에 빠져버렸다.
“호쾌한 왕자라고 듣긴 했지만, 저렇게 무모할 수가…….”
“괜찮아요. 전 충분히 예상했던 상황이니까. 저희도 저희 할 일에 집중하죠.”
루나브가 다시 결계 보강에 힘을 집중시키니, 엘리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따라 힘을 지원했다.
“딱히 초를 치려는 건 아니지만…….”
그런 루나브의 머릿속에서 레미하람의 목소리가 아련히 울려 퍼졌다.
“이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길어봐야 반일에서 하루 정도 될 것 같네요.”
“…….”
“이 셋을 기준으로 했을 때…….”
뭔가 더 말을 이으려던 레미하람은 입맛만 다시고선, 그대로 말을 멈췄다.
* * *
쥬른을 벗어나 제국의 수도인 세벨리너스를 향해 빠르게 치달리는 마차.
하스티아와 에밀리는 시안의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각각 얼굴과 몸을 받쳐주었다.
“정말 그 세 분만 두고 와도 괜찮은 걸까요?”
“어차피 저희가 있어봤자 방해만 될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겁니다. 저희는 저희의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 일이란 바로 시안을 안전 지역까지 무사히 호송하는 것이었다.
“……!”
그때 바깥을 주시하던 미아의 눈이 갑자기 부릅떠졌다.
“마차를 멈추세요!”
갑작스러운 외침에 마부는 급히 마차를 멈췄다.
브라이언 역시 뭔가 낌새를 느꼈는지 검을 들고선 미아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스슥
멈춘 주위로 서서히 가까워지는 인기척.
이윽고 마차의 왼쪽에서 검은 복면을 두른 낯선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털썩
그는 힘이 다한 듯 나오자마자 바로 쓰러져버렸다.
“이 자는?”
“미스트의 대원이에요. 비밀리에 근처에서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던…….”
대원의 몸 상태는 이미 심각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그는 미아가 다가오자 간신히 고개를 들고선, 힘겹게 속삭였다.
“도, 도망…….”
허나 말을 다 잇기도 전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쓰러진 대원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었기에, 미아는 다시 주변을 주시했다.
“이거,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은 거 같은데요…….”
“뭐에요? 무슨 일인데?”
걱정스러운 마음에 에밀리가 얼굴을 내밀자,
“나오지 마십시오!”
브라이언은 나오지 말란 외침과 함께 마차 위로 뛰어오르더니, 검을 수평으로 갈랐다.
그와 동시에 양쪽 수풀에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이 튀어나왔다.
“윈드 트위스터(Wind Twister)!”
-슉!
검기와 발생한 소용돌이가 마차를 보호하니, 바람에 막힌 괴한들은 그대로 몸이 튕겨 나갔다.
미아는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튕겨 나간 한 명에게 달려들었다.
-챙!
흑빛 검날과 맞닿은 기다란 손톱.
미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이게, 다크 엘프?”
근거리에서 직접 마주한 다크 엘프의 실물은 생각보다 더 혐오스러웠다.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생물을 보는 듯한 느낌.
온몸에 절로 거부감이 들 만큼 매우 혐오스러웠다.
“위험합니다 미아!”
그런 미아의 머리 위로 두 명의 다크 엘프가 나타나 그녀를 덮쳤다.
브라이언이 급히 달려가 한 명은 저지했지만,
“아뿔사!”
나머지 한 명은 미처 처리하지 못했다.
다크 엘프의 칼날 같은 손톱이 그녀의 목을 가르려는 순간,
-슈욱
마차 쪽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무언가가, 다크 엘프를 순식간에 낚아챘다.
바로 드래곤으로 변신한 나나였다.
-까드득
듣는 것만으로 소름이 끼칠 정도의 살벌한 씹는 소리가 퍼졌다.
“하….”
허나 맛이 그리 만족스럽진 않았는지, 나나는 불편한 한숨을 내쉬었다.
“맛없어.”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의 앞엔 마차를 노리기 위해 찾아온 다크 엘프 무리가 어느샌가 나타나 있었다.
얼핏 봐도 열 명은 족히 넘어 보였다.
“짜증 나는데 그냥 눈 딱 감고 다 먹어버릴까?”
식욕이 아닌 분노와 증오와 젓은 나나의 눈빛이 점차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