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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작가의 막내도련님은 암살자-307화 (307/325)

제307화. 자격 (1)

-쿠구궁!

아르보르 나무에서 시작한 진동은 곧 프루이나 전체로 퍼져나갔다.

마리안의 둥지에 있던 가르니안 일행 역시, 진동을 느끼고선 급히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나오자마자 눈을 찡그렸다.

“빛?”

절벽을 등진 동쪽 방향에서 솟아오른 낯선 빛이 프루이나 전역을 밝히고 있었다.

“저 위치라면?”

“아르보르 나무가 있는 곳입니다!”

그 방향은 신의 비밀이 봉인되어있는 아르보르 나무가 자리한 지점이었다.

모두가 무슨 일이 벌어진 지 몰라 어리둥절한 사이,

“기, 기어이…….”

둥지 안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마리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혼자 속삭였다.

“신의 비밀을 탐하고 말았구나!”

* * *

사방으로 내뿜어진 아르보르의 빛.

그 빛을 목격한 엘프들은 저마다 경이로움을 감추지 못했다.

오직 장로 엘퓨리스만이 무덤덤한 시선을 유지했다.

“기어이 열쇠의 힘을 발현한 모양이군.”

그의 굳은 눈빛엔 하스티아를 향한 분노와 실망감이 담겨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이내 결심이 선 엘퓨리스는 대동한 엘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하스티아를 죽여라.”

“……!”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엘프들은 일제히 귀를 의심했다.

“자, 장로님? 지금 뭐라고 하셨는지?”

“우리 일족은 지고의 존재께서 내려주신 책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순 없으니, 책임이라도 빠르게 져야 한다.”

엘퓨리스의 의지는 확고했다.

허나 그 확고한 의지를 실행시켜줄 엘프들은 없어 보였다.

“하, 하지만 장로님! 말씀하신 대로 이미 벌어진 일 아닙니까? 이 지경까지 온 마당에 하스티아를 꼭 죽일 필요가 있는 겁니까?”

“저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엘프들은 전부 할 수 없는 일이라며 거부감을 드러냈다.

인간과 다르게 화이트 엘프 일족의 유대감은 매우 남달랐다.

200명 남짓한 적은 수에, 오랜 세월 인간들과 동떨어져 동족 간의 정을 키워온 만큼, 동족을 죽인다는 건 그들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비록 그녀가 돌아온 초반엔 일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암살 시도를 하긴 했지만,

이 이상은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일족의 마음을 엘퓨리스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럼 내가 하겠다.”

허나 그럼에도 엘퓨리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우리 일족의 생존을 위해서다! 모든 책임은 나와 저 아이가 감수할 것이야!”

곧 마나를 발현한 엘퓨리스는 하스티아를 향해 마법진을 겨눴다.

‘장로님…….’

허나 하스티아는 피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허탈한 시선으로 엘퓨리스를 바라만 볼 뿐.

대신 곁에 있던 시안을 꼬옥 껴안았다.

“고통 없이 끝내주겠다. 하스티아.”

마침내 그의 손을 떠난 차디찬 냉기의 마력이 하스티아와 시안을 향해 빠르게 날아들었다.

‘이게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겠죠.’

하스티아는 살며시 눈을 감으며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텅!

허나 그 그림자는 하스티아에게 닿지 못하고, 바로 앞에서 멈춰버렸다.

이상함을 느낀 하스티아는 바로 눈을 떴다.

‘……?’

그녀의 앞엔 검은 안개가 일렁이는 투명한 제한 결계가 생성되어 있었다.

“무, 무슨 일이?”

엘퓨리스를 비롯한 엘프들은 당혹을 금치 못했다.

하스티아 역시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 깜찍한 꼬맹이 봐라?]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선, 바로 고개를 돌렸다.

‘케, 케이람님?’

어느샌가 실체화한 케이람이 그녀 뒤에서 요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달아나도 모자랄 판에 아예 포기하고 눈을 감아? 왜? 연모하는 우리 주인의 품에서 함께 잠들고 싶었어?]

‘그, 그건?!’

하스티아의 얼굴은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내가 허락 못 하지 그건!]

케이람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며, 그녀의 머리를 잡고선 살벌한 눈웃음을 날렸다.

“에, 엘퓨리스 님! 저 여자는?”

“마검이다.”

마검이란 말에 엘프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마, 마검이 이곳엔 왜?”

“저 쓰러져 있는 인간이 마검의 주인이기 때문이겠지.”

마치 시안이 이 사태의 원흉이라는 듯, 엘퓨리스는 미간을 좁힌 채 쓰러진 시안을 노려보았다.

[어이, 거기 엘프들!]

케이람이 그들을 보며 거만하게 소리쳤다.

[우리 서로 피 보는 짓 하지 말고 적당히 합의 보자? 그러는 편이 니들한테도 좋잖아?]

엘프들은 대답하지 못해 서로 눈치만 보았다.

[그러기 싫으면 들어오던가? 난 딱히 상관없어!]

표정만 봤을 땐, 오히려 그러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당신들을 살릴 이유가 전혀 없소.”

주저하는 엘프들을 뒤로한 채, 엘퓨리스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럼 들어오라니까? 나도 내 주인 죽이겠답시고 달려드는 놈들을 살려줄 생각은 없어.]

살얼음판 같은 아슬아슬한 대치가 이어지는 상황.

‘저, 케이람 님?’

이내, 시안을 쭉 껴안고 있던 하스티아가 케이람에게 조심스레 감응을 전했다.

[살고 싶으면 입 닥치고 있어. 괜히 나설 생각하지 말고.]

‘아니, 그게 아니라…….’

하스티아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안 님이 숨을 안 쉬어요…….’

* * *

우시프 제국 중서부, 퀴젤 공작가의 영지 아퀴젤.

서쪽 성문으로부터 약 30분 정도 떨어진 개울에 도착한 아린은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황녀님!”

그러자 개울 너머 바위에서 아린을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녀의 기사이자, 황녀의 검, 레시무스였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레시무스는 바로 달려가 한쪽 무릎을 꿇고선, 경의의 인사를 올렸다.

“일어나 레시무스.”

아린은 그런 레시무스를 단호한 말투로 일으켜 세웠다.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지만, 지금은 이 말 한마디만 할게.”

그러곤 다짜고짜 레시무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내 검을 자청했으면 내 옆을 지켜. 혼자 딴 데 가서 해결하려 들지 말고.”

레시무스는 피식 웃으며 화답했다.

“황녀님이야말로 말도 없이, 제게서 벗어나진 말아 주십시오.”

둘은 짧은 교감 끝낸 뒤, 바로 신분을 감추기 위한 위장 작업을 시작했다.

위장을 마친 뒤엔 즉시 아퀴젤로 향했다.

성문에는 다수의 용병들을 비롯해 견갑 한쪽에 붉은 황실의 문장을 새긴 기사들이 잔뜩 자리하고 있었다.

본래 황실 소속을 상징하는 문장은 붉은색이 아닌, 금색이다.

즉, 지금 보이는 저 붉은 문장의 기사들의 황군이 아닌, 전혀 다른 소속의 기사들이었다.

“신분증 보여주십시오.”

경비병이 신분 확인을 요구하자, 레시무스는 미리 준비된 가짜 인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

인장을 확인한 경비병은 바로 레시무스와 그 뒤에 있는 아린의 얼굴을 확인하였다.

그러곤 약 1초 정도, 눈으로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들어가십시오.”

이윽고 출입이 허가되니, 둘은 다른 기사들의 눈을 피해 빠르게 영지 안으로 진입했다.

이후엔 퀴젤 가의 저택으로 향하지 않고, 민가가 모여있는 변두리 지역으로 향했다.

잠시 후 도착한 어느 평범한 민가.

레시무스는 주변을 살피며 보는 이가 없음을 확인한 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이쪽입니다.”

아린은 레시무스의 안내를 받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레시무스는 개의치 않고 중앙에 깔린 카펫을 걷었다.

그러자 작은 손잡이가 달린 네모난 철판이 나타났다.

바로 손잡이를 잡고 열어젖히자, 아래로 내려가는 지하 계단이 등장했다.

그렇게 아래로 내려가니, 지나온 민가보다 훨씬 더 넓은 지하 공간이 펼쳐졌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많은 인원이, 아린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아린 황녀님을 뵙습니다!”

아린은 평온한 표정으로 내부를 둘러보며, 인원들의 수와 얼굴을 확인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수였지만, 그렇다고 내색하진 않았다.

이들은 전부 황녀를 지지해주기 위해 어렵게 모여준 소중한 조력자들이었으니.

그 중엔 전 빛의 기사단장 제레온 알킨과 전 로열 아카데미의 총장 쿤델 퀴젤도 자리하고 있었다.

“자격이 부족한 저를 위해 이리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린은 그들을 향해 손수 고개를 숙이며,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마음을 전한 후엔, 바로 회의에 돌입했다.

“루이넬 황자가 이끄는 반군 세력은 이미 황성에 입성했습니다. 반란 소식을 듣고 급히 황성에 복귀하신 비올렛 황녀님께서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실패한 모양입니다.”

상황을 정리해주던 쿤델은 품에서 황실의 인장이 찍힌 서신 한 장을 꺼내 보였다.

“황실을 점령한 루이넬 황자는 황실의 이름으로 제국 각지에 서신을 보냈습니다.”

“서신의 내용은요?”

“예상하셨을 내용 그대롭니다. 자신을 황제 폐하의 뒤를 이을 황태자로 인정하라는 의사를 주어진 기간 내에 보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남았나요?”

“딱 이틀 남았습니다. 참고로 여기 모인 인원 전부는 아직 답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 기간을 넘기면 황실의 명을 따르지 않는 반란 세력으로 규정할 것임을 아린은 모르지 않았다.

“더불어 아린 황녀님의 신변을 보호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이 기간 내에 송환하라는 내용도 추가로 담겨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말도 함께 전해달라더군요.”

쿤델은 직접 확인해보라는 뜻으로 아린에게 서신을 건네주었다.

“…….”

아린은 서신을 한치의 표정 변화 없이 읽어 나갔다.

내용은 별거 없었다.

인도적 차원에서 해결해 줄 테니, 얌전히 황성으로 복귀하라는 것.

허나 그 뒤론 이를 따르지 않았을 시, 아린에게 발생할 잔인한 비극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아린은 다시 조력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먼저 여러분께 의사를 묻겠습니다. 제가 어찌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까?”

“당연하겠지만, 따르실 필요 없습니다.”

대답은 구석에 있던 제레온이 대표로 해주었다.

“이런 말씀 드리는 것도 그렇지만, 이대로 돌아가시면 황녀님은 모든 걸 잃게 되십니다. 정말 좋아 봐야 황녀의 자격을 잃고, 황성에서 쫓겨나는 일밖에 안 될 겁니다.”

쿤델 역시 이에 동의한다는 듯 거들었다.

“루이넬 황자는 지금 분노에 휩싸여 있습니다. 최상위에 군림해 있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것과 더불어, 자신을 나락으로 보낸 주동자들을 향한 반드시 복수하고야 말겠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을 겁니다. 절대 그의 요구에 응해주셔선 안 됩니다.”

다른 이들 역시 그게 맞다며 쿤델의 말에 동조해주었다.

대체로 병력을 모아 루이넬의 반군에 맞서야 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으며, 필요에 따라선 타국의 지원도 받아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아린은 모든 의견 및 조언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새겨들었다.

“그럼 이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주변엔 조용한 적막이 흘렀다.

“전 우시프 제국의 황좌가 또다시 피로 더럽혀지는 일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여태 조력자들이 제시한 의견에서 정 반대되는 의견이었다.

아린을 제외한 모두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지만,

“황성엔 저 혼자 가겠습니다.”

아린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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