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4화. 그를 위한 흐름 (4)
소유주의 영혼을 삼켜 그 힘을 탈취하는 검.
신의 힘을 계승 받은 무구 중 가장 파괴적이면서도 가장 끔찍한 성질을 지닌 검.
그 어느 검보다 피에 친숙한 검.
전부 마검 케이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인간, 마수, 마족을 비롯해 드래곤 같은 신의 힘을 직접 내려받은 존재들까지,
그녀는 종족을 불문하고 수백 년 동안 무차별적인 살육을 저질러왔다.
가히 언급만으로도 듣는이에게 두려움과 공포심을 주는 그런 존재였으며. 살육을 하는 동안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인계를 넘어 가히 신계에 있는 존재들까지 죽일 수 있는 무구.
허나 그런 그녀조차도 지금은,
심장이 매우 요동칠 만큼 긴장감이 차올라 있었다.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의 내부를 연상케 하는 붉은 공간.
그곳에 다다른 케이람의 앞엔 연기처럼 일렁이는 정체불명의 영령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마검 케이람이 이곳에 오다니. 이거 참으로 영광이로군.”
분명 형상은 하나인데, 그 안에선 수십 명에 달하는 목소리가 겹쳐서 울리고 있었다.
케이람은 말없이 팔짱만 낀 채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듯한 눈빛으로 영령을 바라보았다.
일전에 시안이 말했었다.
전생의 그녀는 마왕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의 무기인 사검(死劍)과 결전을 벌였었다고.
결과적으론 사검의 힘을 반 토막 내는 데엔 성공했으나, 그 대가로 그녀의 인격은 소실되었다고 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허풍이라 생각했다.
이 세상에 자신과 힘을 겨룰 수 있는 존재는 끽해야 성검 듀란다르크뿐.
신의 힘을 이어받은 자신에게 필적할 무구는 없다고 여겨 왔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살아왔다.
한데, 이제는 시안의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믿어야만 했다.
천하의 마검조차 믿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힘이 영령으로부터 느껴지고 있으니.
“너는 나를, 아니 우리를 만나러 와선 안 됐다.”
“와서 영광이라 할 땐 언제고, 무슨 되도 않는 소리를 하실까?”
“태초부터 지고의 힘을 물려받은 넌 모르겠지. 너와 네 주인은 그들의 피조물로서 은총을 받고 살아왔지만, 우리는 아니었다. 태초부터 아무런 생기가 없던 땅에 오직 살아야 한단 일념 하나로 끝이 보이지 않는 밑바닥에서 올라와야 했다. 살기 위해 고통을 겪어야 했고, 살기 위해 강해져야만 했던 우리 마족의 설움을 너희는 모르겠지.”
“왜? 니들도 무릎 꿇고 하늘에 빌지 그랬어? 제발 니들 땅에도 관심 좀 가져 달라고?”
“그 반대다. 우리는 너와 너를 창조한 존재들로부터 대적하기 위해 지금까지 그 힘을 키워왔다.”
비소를 머금던 케이람의 얼굴이 바로 일그러졌다.
“질서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그들이 인계에 했던 짓을 우리는 모두 봐왔다. 그들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정해진 법칙만을 따를 것을 인간에게 강제해왔지. 그 결과 인간은 철저한 신의 피조물이자 추종자로 진화해왔다.”
그 사실을 못내 인정하는 듯, 케이람은 부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걸 원치 않았다. 하지만 너희는 결국 선을 넘고 말았지. 그 대가를 지금부터 똑똑히 치르게 될 것이야! 이젠 누구도 멈출 수 없다!”
영령 속에서 살벌한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져 나갔다.
“네 길었던 살육의 역사도 오늘부로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너와 네 주인을 시작으로 인계의 영혼을 흡수해 그 힘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그 더럽고 추악한 지고의 존재들이 다시는 우리의 영역에 얼씬도 못 하도록!”
“…….”
“그 시작을 화려하게 장식해주거라. 마검이여!”
* * *
“대,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아까 하늘에서 아렘으로 낙하한 마족, 그거 마왕님 맞지?”
“마왕님이 지금 안에서 누구랑 싸우고 계신 거지?”
인간의 학살을 피해 아렘 밖으로 대피한 마계의 주민들.
그들로선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어, 두 손을 모은 채 발만 동동 굴렀다.
“누, 누가 가서 확인 좀 해봐?”
마족들은 용기 있는 누군가가 가서 안의 상황이라도 확인해주길 바랐다.
허나 아렘의 주변엔 어느샌가 제한 결계가 생성되어서 사실상 들어가는 것조차 불가했다.
나겔의 지시에 따라 결계를 생성한 드래곤들은 각자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결계가 파괴되지 않도록 온 집중을 가했다.
사실 그들로서도 안의 상황이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다.
좀처럼 멈출 줄 모르고 계속 터지는 힘의 격돌에 등에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챙!
한 번, 한 번 검이 부딪힐 때마다 붉은 마기와 검은 안개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챙! 챙! 챙!
연격을 가하던 벨카리온이 돌연 손을 멈추고 마주 선 시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안은 막기도 벅찬 듯 거친 숨만 내뱉었다.
이에 벨카리온은 다량의 마기를 발현해 강력한 검기를 날렸다.
-쾅!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한 시안은 그대로 몸이 날아가 처박혀버렸다.
건물은 바로 와지끈하며 무너져 내렸다.
허나 곧 잔해가 들썩이며 휘날리는 먼지 속에서 시안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간신히 몸을 끌고 나오려는 순간,
“……!”
시안의 얼굴 앞으로 벨카리온의 무지막지한 주먹이 날아왔다.
-퍽!
피할 수 없던 시안은 급히 팔을 교차해 간신히 막아냈다.
허나 마왕의 주먹은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으며, 시안은 이렇다 할 반격도 못 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끝내 다시 한번 몸이 날아가 땅에 처박히고 말았다.
“너 뭐하냐?”
격전이 시작된 이후 벨카리온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시안의 예상 밖 모습에 굉장히 실망한 듯 보였다.
“이전과 다르게 눈부터 퀭하다 싶더니만, 이제 보니 제정신도 아니었던 모양이네? 그 상태로 지금 나랑 싸우겠다고 온 거냐?”
시안은 말없이 일어나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미 대답할 여력조차 없어 보였다.
“완전 맥 빠지네…….”
전의를 상실한 마왕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투욕을 해소시켜 줄 유일한 상대라고 생각했건만, 당장 상태만 봐선 헬하운드에게 잡아먹혀도 안 이상할 것 같았다.
벨카리온은 사검을 내리고 뚜벅뚜벅 시안을 향해 나아갔다.
이에 시안이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휘익!
허공을 가르는 의미 없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벨카리온은 시안의 배를 강하게 걷어찼다.
“좀 힘을 내봐. 젖 먹던 힘까진 끌어올려 보라고. 내가 이대로 네 주변 인간들을 다 죽여도 괜찮아? 나 막아야 하지 않겠어?”
“…….”
“됐다. 그냥 죽어라.”
더 지속해봐야 의미 없는 일.
벨카리온은 시안의 목을 쥐고 일으켜 벽에 밀어붙였다.
시안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저 무기력하게 숨만 헐떡였다.
“너무 한스러워하진 마. 네가 좋아했던 인간들, 네가 역겨워했던 인간들까지 죄다 몰살시켜서 전부 네 곁으로 보내줄 테니까.”
“…….”
벨카리온은 천천히 사검을 들어 올렸다.
사검의 끝엔 점차 붉은 마기가 모여들었으며, 마치 시안의 영혼을 탐하기라도 하듯 선명한 빛이 일었다.
그렇게 사검의 기운이 시안을 덮치려는 순간,
“지금….”
“……?”
“지금이야.”
시안이 입을 열었다.
소리가 워낙 옅었던지라 잘 안 들리긴 했지만, 시안은 틀림없이 ‘지금’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뭘 의미하는진 아직 알 수 없었다.
당황한 벨카리온은 검을 내지르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먹어.”
이윽고 뱉어진 다음 말.
“먹으라고…….”
지금에 이어 시안은 먹어 치우라는 의미 불명한 말을 반복했다.
“먹어 치워. 케이람!!!”
주변 잔해가 흔들릴 정도의 거센 외침.
벨카리온의 시선은 이내 마검을 쥔 시안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
허나 저지할 틈도 없이 이미 검 끝에선 주변 시야를 완전히 가릴 정도의 엄청난 안개가 쏟아져나왔다.
“키하하하하!”
기괴한 웃음소리는 덤.
웃음소리에 이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날 희생시킬 일 없을 거라더니, 이딴 식으로 부려 먹어? 하여튼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두는 구석이 하나도 없어요.”
벨카리온은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리도 가깝고 선명한 목소리로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는 결코 있을 수 없다.
단 한 명.
시안을 제외하고선.
서서히 안개가 걷히며, 가려져 있던 시안의 얼굴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시안의 입가엔 등골이 절로 서늘해질 정도의 오싹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좀 지루했지? 이해해. 우리 주인이 워낙 고지식해서 말이야. 융통성이 없어요. 융통성이. 혼자만 잘났지 아주…….”
머리에 뇌가 없지 않고서야 모를 순 없을 것이다.
지금 마왕과 마주하고 있는 시안은 절대 시안이 아니라는 것을.
정체 모를 또 다른 누군가의 인격이 그 자리를 대신한 것만 같았다.
“마족의 생존이니, 신을 향한 경고니.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는지 모르겠네? 그냥 당장 내 욕구만 충족하고 살아도 모자랄 판에…… 안 그러니?”
벨카리온은 대답하지 못했다.
“다시 제대로 놀아볼까? 근데 누나가 지금 좀 많이 화난 상태라. 좀 긴장해야 할 거야.”
시안은 손에 쥐고 있던 마검을 보란 듯이 들어 올렸다.
“2라운드 시작이야~!”
마검을 쥔 시안의 모습은 그야말로 검과 하나를 이룬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 * *
무성한 나뭇잎이 하늘을 가릴 만큼 울창한 숲속 한가운데.
하니엘은 양팔로 몸을 감싼 채, 나무에 기대고 있었다.
성검의 아공간이 붕괴한 상황에서 거기에 더 있어 봐야 흔적도 없이 소멸할 뿐이기에, 그녀 역시 밖으로 나와 허탈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윌리어스 베르트. 그 남자는 대체 어디서 그런 자식을 낳은 건지…….”
시안이 보여준 말도 안 되는 힘에 그녀 또한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였다.
“허나 공간을 깨부수고 나가봐야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그런 엉망진창인 상태로 싸운다고 한들, 마왕을 어찌 막겠습니까? 마왕의 힘을 조금이라도 빼면 다행이겠지요.”
하니엘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마지막엔 제 아들에게 도움이라도 주고 가는 격이니, 마냥 미워할 순 없겠군요. 에쉘을 위해 친히 그 목숨을 바쳐주어 참으로 고마울 따름입니다. 시안…….”
결국은 모든 것이 에쉘에게 돌아갈 일.
뜻대로 잘 흘러가고 있단 생각에 하니엘은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저벅저벅
그런 와중, 보이지 않는 저 앞에서 낯선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를 들은 하니엘은 바로 웃음을 멈추었다.
무겁지 않고 가벼운 것이 마수는 아니었다.
느낌상 마족도 아닌 사람의 발자국처럼 느껴졌으며, 그 느낌은 적중했다.
“……!”
발소리의 주인을 마주한 하니엘은 놀란 나머지 눈을 부릅떴다.
“뭐,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제가 여기 있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을까요?”
힘겹게 일어난 하니엘은 바로 그녀에게 다가가 멱살을 붙들었다.
“무슨 꿍꿍이야? 너까지 여긴 왜?”
-툭
이내 바닥에 무언가가 떨어진 소리가 들리자, 바로 눈을 돌렸다.
충격에 주저앉은 하니엘은 눈을 부들부들 떨며 땅에 떨어진 그것을 주웠다.
물건의 정체는 펜던트.
그녀가 에쉘을 건너 마왕의 수중으로 들어가길 유도했던 바로 그 펜던트였다.
“이 펜던트가 왜 여기 있는 거야?”
“…….”
“말해! 설마 네가 풀어준 거야? 현혹의 힘을 무효화시키고?”
“굳이. 제가 답해야 아실까요?”
하니엘은 기어이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왜? 어째서?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일을 망친 거야? 도대체 왜?”
“전 에쉘 도련님의 사람이 아니니까요.”
“뭐?”
“전 예나 지금이나 쭉 시안 도련님의 사람이었거든요.”
충격에 휩싸였던 하니엘의 얼굴은 순식간에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런 하니엘의 얼굴을 무심히 내려보는 그녀.
바로 오랜 시간 시안의 곁을 묵묵히 지켜왔던,
에밀리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