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9화. 재앙의 전조 (2)
“꺄아아악!”
거리쪽에서 들려온 아찔한 비명.
세 여인은 직감적으로 비명에 고통이 동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바로 소리가 들린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 이게 뭐야?”
곧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세 여인은 전부 눈을 번뜩였다.
“굳이 정의하자면 학살, 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다.
세 여인의 앞에 펼쳐진 상황은 말 그대로 학살이었다.
전신을 로브로 감춘 낯선 괴인들이 마족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학살의 대상은 힘없는 마족들이었다.
“왜 갑자기 이런 상황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혼란에 빠진 아린은 곧 괴인들이 휘두르는 검에 시선을 집중했다.
“저건?”
그것은 아린에게 있어 매우 익숙한 검이었다.
“전선 기사들이 쓰는 검이야!”
벨리아스의 영주 베르트 공작의 지휘 아래 전선을 지키는 상급 기사들이 사용하는 순백의 장검.
그 검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은 즉,
“그럼 전선 기사들이 마계에서 학살을 벌이고 있단 뜻이네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란 뜻이었다.
“막아야 해!”
아린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바로 기사들을 향해 달려갔다.
이에 루나브와 나나도 그 뒤를 따랐다.
“비켜! 비켜!”
“빨리 도망쳐야 해!”
갑작스런 사태에 마족들은 전혀 대응하지 못했고, 전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바빴다.
이들에겐 인계에서도 최고라 불리는 상급 기사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위급 상황에선 자기 목숨을 최우선적으로 챙기는 인간의 모습과 다르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도와주세요!!”
현장에는 미처 달아나지 못한 어린 마족 아이가 거리 한복판에서 애달프게 도움을 구하고 있었다.
허나 아이의 뒤엔 어느새 죽음의 경계로 인도하기 위한 칼날이 드리워졌다.
아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해 눈을 질끈 감았다.
-챙!
“……?”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인지한 아이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괜찮니?”
아이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떡였다.
아이가 무사함을 확인한 아린은 안도하지 않고, 바로 기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기기긱!
허나 아린으로선 상급 기사의 강인한 무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균형은 순식간에 무너졌으며, 아린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텼다.
“불어라! 차가운 물의 돌풍이여!”
물과 바람 속성의 융합 마법 ‘아쿠아 블래스트’.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루나브의 지원공격이 더해졌다.
-퍽!
대응하지 못한 기사는 마법을 맞고 튕겨져나갔다.
“어서 도망가!”
“네! 고맙습니다!”
아이는 뒤따라온 루나브의 인도를 받으며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기사들은 바로 아린의 주위를 둘러쌌다.
“그대들은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전 그대들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숨기려 하지 마십시오!”
아린은 전혀 굴하는 기색 없이 기사들을 보며 당당히 외쳤다.
“이런 용납할 수 없는 학살을 저지르는 이유가 뭡니까?”
기사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의 가려진 얼굴엔 주체적인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인형을 보는 듯했다.
“딱히 대답할 생각은 없어 보이네요.”
“혹시 짐작되는 거라도 있어 루나브?”
“안타깝지만 없어요. 저도 마계에 와서 저 기사들은 처음 마주하는 거니까요.”
두 여인이 의문이 깊어갈 때쯤,
-스윽
돌연 대치한 기사들이 한 발짝씩 옆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벌어진 공간 사이로 잠시 후, 낯익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
그의 정체를 파악한 아린은 입술을 꽉 깨물며 검자루를 강하게 부여잡았다.
“기어이 여기까지 쫓아오셨군요. 아린 황녀님.”
“베르트 공작!”
* * *
힘.
그것은 이 혼란스러운 마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갖춰야 하는 절대적인 요소.
오로지 마왕이라고 하는 단 하나의 존재가 모든 것을 주름잡아야 한다.
이성? 평화?
그런 같잖은 그런 나약한 것들은 필요하지 않다.
이 마계는 인계가 아니기에,
힘이라고 하는 절대적 요소에 의해 전부가 지배되어야 한다.
“벨카리온?”
“…….”
“벨카리온!”
“응? 불렀어 베스티?”
두어 번을 부르고 나서야 벨카리온은 고개를 들어 반응했다.
“제 이야기 듣고 있어요?”
“무슨 이야기하고 있었더라?”
“아버지 아니, 아스카론과 있었던 일을 전부 설명하겠다고…….”
“그거야 이미 로저스에게 듣고 왔으니 말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 괜찮으니까 더 말 안 해도 돼.”
벨카리온은 이미 지나간 일이라며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베스티의 마음은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괜찮…… 아요?”
“왜? 내가 안 괜찮아 보여?”
베스티는 마음과 다르게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벨카리온은 뭐가 문제냐는 듯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나 걱정 말고 네 몸이나 잘 신경 써. 알잖아 나 너 없으면 안 되는 거.”
순간 베스티는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평소에 들었을 땐 굉장히 감성 돋는 말이었지만, 왜일까?
오늘따라 유난히 불안하게 들려왔다.
“저기 벨카리온. 제가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털썩
그의 손을 붙잡으며 말을 이으려던 베스티는 갑자기 마왕에 품에 쓰러져버렸다.
“베스티?”
벨카리온은 상황을 인지하지 못해 1초 정도 멍을 때렸다.
“뭐야? 갑자기 왜……?”
하지만 이윽고 뭔가 잘못되었단 것을 깨닫고선 급히 그녀를 떼어냈다.
“베스티 정신 차려! 베스티!”
그녀를 붙잡고 흔들어봤지만,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진 베스티는 눈을 뜨지 못했다.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펜던트만큼은 손에 꽉 쥐고 있었다.
“빨리 아무나 달려와! 베스티가 쓰러졌다고!”
곧 성의 치유사들이 달려와 그녀를 이송했다.
다행히 아직 목숨은 붙어있었지만, 처음 쓰러졌을 때보다 훨씬 위독한 상황으로 전락해 있었다.
“생명의 기운이 전부 소진되신 것 같습니다.”
베스티의 상태를 살핀 로저스가 쓰러진 이유를 말해주었다.
이전까진 루나브가 생명의 기운을 지속적으로 보충해주어, 그녀가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루나브가 시안을 찾기 위해 성을 떠나 버린 지금, 베스티의 생기를 회복할 수 있는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베스티가 착용한 펜던트에선 이전보다 더 강렬한 빛이 일고 있었다.
“펜던트의 강화된 힘의 베스티님의 생기를 더욱 빠르게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뭘 해야 한다는 건데?”
“일단 긴급 조치를 위해서라도 성을 나간 루나브 양을 데려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봐야 어차피 임시방편에 불과한 일.
베스티를 구할 수 있는 직접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마, 마왕님!”
그런 와중, 문밖에서 다른 마족이 급하게 달려왔다.
“지금 아렘에서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 합니다!”
“큰일?”
“예! 정체 모를 괴인들이 주민들을 학살하고 있다고……!”
-꽈악
마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어느샌가 다가온 마왕이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학살이라니? 그게 무슨 말 같잖은 소리야?”
마족은 말을 잇지 못해 괴로운 신음만 남발했다.
“진정하십시오 마왕님!”
로저스가 급히 만류했다.
숨을 헐떡이던 마족은 이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간들이 아렘에 나타나 주민들에게 검을 휘둘렀답니다!”
“……!”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한 벨카리온 대신, 로저스가 물었다.
“인간이라니? 인간이 우리 마족을 공격했단 말이야?”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전해온 말론 다행히 다른 인간들이 나타나 마족들을 구해……!”
-쨍그랑!
마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벨카리온은 날개를 펼치며 창문을 뚫고 날아가 버렸다.
“마왕님!”
로저스의 간절한 외침도 깡그리 무시했다.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아렘으로 날아가던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름아닌 레메아 협곡이 있는 쪽이었다.
-턱
그때와 정확히 같은 장소.
날개를 접고 지면에 안착한 벨카리온은 눈을 날카롭게 세우며 블러드 리버의 줄기를 따라 나아갔다.
그러자 머지않아 금발 성검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뵙게 되는군요. 마왕이시여.”
그토록 찾고자 했던 이와 다시 마주하자, 벨카리온의 몸에서 마기가 폭발하듯 분출되었다.
“마치 내가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네?”
“이때쯤이면 마음이 매우 급해지실 것 같아.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절 간절히 찾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에쉘은 이전보다 한층 더 기묘해진 웃음을 흘리며 벨카리온의 심기를 자극했다.
벨카리온의 얼굴은 매우 살벌했다.
“넌 이미 선을 크게 넘었어. 네놈의 미래는 정해졌다. 설사 이 마계가 네놈 손에 놀아나서 망한다고 해도! 내 손으로 널 갈기갈기 찢어 버릴 거야!”
이제와서 그가 베스티를 살려낸다 해도 상관없다.
벨카리온은 자신의 손으로 반드시 에쉘을 죽일 것이라며 당사자 앞에서 선포했다.
“절 죽이실 땐 죽이시더라도, 구해야 할 자는 구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나 이 역시 예상된 일이라는 듯, 에쉘은 눈웃음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베스티 양을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이신 가요?”
-쐐액!
기어이 참지 못한 마왕이 주먹을 앞세우며 에쉘에게 달려들었지만,
-슈슈슉
그의 머리 위로 순백의 칼날 여러 개가 벼락 치듯 떨어졌다.
벨카리온은 가소롭다는 듯 칼날을 온몸으로 받았다.
수십 개의 칼날이 몸에 꽂혔음에도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
“절 죽이시면 베스티 양은 못 구합니다.”
“그건 내가 두고 보고 판단할 일이겠지!”
벨카리온은 다시 손을 뻗어 그의 몸을 붙잡으려 했지만, 손이 닿는 순간 그의 몸이 물결처럼 일렁거리더니, 이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본체가 아닌 환영이었다.
“딱 하나만 해주시면 됩니다.”
몸은 사라졌지만, 그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남아 벨카리온의 귀를 맴돌았다.
“시안을 죽여주십시오.”
“……!”
“그럼 베스티 양을 구하실 수 있습니다. 이후엔 절 죽이러 인계에 오시든, 그냥 내버려두시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에쉘의 목소리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홀로 남겨진 벨카리온은 하늘을 보며 돌연 웃음을 흘리더니, 급기야 크게 포효했다.
“그래! 네놈이 원하는 대로 해주마! 이후엔 다 때려 부숴줄게! 네놈의 존재도 네놈이 사는 세상도 전부 내가 파멸로 이끌 것이야!”
선포를 외친 마왕은 곧 한쪽 손을 뻗어 마기를 집중시켰다.
-화르륵
곧 손에선 검은 불꽃이 일어났고, 불꽃은 점차 아래로 뻗어 나가는가 싶더니, 이내 붉은 검의 형태로 변해갔다.
마왕의 잔혹한 본성이 마침내 깨어난 것이다.
협곡엔 정체 모를 영령의 웃음소리가 살벌하게 퍼져 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