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6화. 데빌 드래곤 (3)
“뭐 나한테 말할 거 없어, 로저스?”
싱글벙글 웃고 있는 벨카리온과 굳은 얼굴의 로저스.
“마왕님. 일단 진정해주십시오.”
“야. 누가 들으면 내가 흥분한 줄 알겠다? 아님 뭐 당장 일이라도 저지를 줄 알겠어?”
“아니라고 장담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건 듣고 나서 판단할 일이겠지.”
마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매우 나긋나긋했다.
허나 절대 속은 그렇지 않다는 걸 로저스는 모르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로저스는 결국 미명의 호수에서 있었던 일을 마왕에게 전부 털어놓았다.
“음,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도 참 다행이네? 그 루나브란 인간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로저스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마왕의 반응을 조심히 관찰하였다.
“그래서, 아스카론은 그냥 보낸 거야? 아무런 책임도 안 묻고?”
“협조를 약속받았습니다. 저희와 마찬가지로 그 에쉘이란 인간을 추적함과 더불어 얻어내는 모든 정보를 우리 쪽에 넘기겠다더군요.”
“협조는 무슨 얼어 죽을 협조? 방해나 안 되면 다행인 거 아니야?”
벨카리온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야. 로저스.”
“예. 마왕님.”
“내가 언제까지 참아야 하냐?”
올 게 왔다는 듯 로저스는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너랑 베스티는 이런 상황에도 내가 이성을 앞세우길 원하겠지만, 솔직히 지금 상황에선 정말 어려운 일 아닐까? 내가 본성을 제어한다 해서 뭐가 해결되는데?”
지랄 맞은 상황이 거듭 반복되고 있는데, 이렇게 등신같이 화만 삭이고 있어 봐야 해결될게 뭐가 있을까?
마왕으로선 진심으로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게 바로 이런 겁니다. 아스카론을 현혹한 것도 결국, 마왕님의 심기를 자극할 생각이었겠죠. 참기 힘드시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그놈들 뜻대로 움직여주실 순 없지 않…….”
따박따박 말을 잇던 로저스는 돌연 입을 닫고 말았다.
부릅떠진 그의 시야 속에 선명하게 일렁이고 있는 붉은 기류.
마치 마왕의 몸에서 나올 순간을 기다린다는 듯, 살벌한 기운을 잔뜩 내뿜고 있었다.
“그래. 나도 알아. 그래서 참을 데까진 참을 거야. 문제는 그 한계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지.”
“……!”
“잠깐 베스티 좀 만나고 올게.”
남겨진 로저스는 점점 멀어지는 벨카리온을 붙잡지 못해, 그의 등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큰일이다…….”
마왕이 이성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큰 문제가 눈앞에 닥쳐왔음을 깨닫고야 만 것이다.
주먹에서 시작된 떨림은 머지않아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사검(死劍)이 눈을 뜨고 있어!”
* * *
북적북적한 거리.
왁자지껄한 사람 아니, 마족들.
당연하겠지만 시안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헤매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칭찬해주고 싶긴 한데……, 이제 그 친구를 어떻게 찾을 생각이야?”
“지금부터 생각해 보려고요.”
레미하람은 속으로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시안을 찾자는 마음에 무작정 아렘에 오긴 했으나, 그가 아직 이곳에 있을 가능성은 사실 매우 희박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나브는 무심한 시선으로 아렘의 거리를 잠시 쭉 바라보았다.
“여기 마계 맞죠?”
“그렇지?”
“근데 인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유가 뭘까요?”
“우리 숙녀님께서 딱히 못 느끼고 있단 뜻이겠지. 인간과 마족의 차이를…….”
이내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깨달은 루나브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일단 허공을 향해 코를 내빼며 혹시 있을지 남아있을지 모를 냄새를 맡아봤지만…….
“안 나네요.”
시안의 냄새는 없었다.
“저 여자 뭐야? 피부가 왜 저리 하얘?”
“뿔이 안 보이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꼭 인간처럼 생겼네?”
“요즘 마계에 인간이 돌아다닌단 소문이 돌던데 진짜인가?”
대신 그녀를 향한 수군거림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후드와 로브로 몸을 가리긴 했어도, 지나가는 마족마다 한 번씩 그녀를 쳐다보았다.
“방법이 떠올랐어요.”
이에 뭔가 계책이 생각난 듯, 루나브는 인파가 북적이는 중심부로 향했다.
그러곤 대뜸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봐 숙녀님 뭘 하려는…….”
“조용히 해주세요.”
레미하람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곧 슬그머니 눈을 감은 루나브는 귀를 토끼처럼 쫑긋 세우고선 나직이 읊조렸다.
“증폭(Amplification)…….”
자신의 마력을 청력으로 전환해 주변의 소리를 증폭시키는 마법.
마왕성에서 베스티와 루나브의 대화를 엿들을 때 썼던 마법이기도 했다.
청력이 극대화되자 이내 거리에서 오가는 모든 대화가 그녀의 귀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여러 소리가 한꺼번에 몰려 뒤엉키다 보니, 대체로 정확히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우리 일원들이 고작 인간 한 명한테 당했다고?)
루나브는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귀를 더 쫑긋이 세웠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정말입니다! 괴상한 검을 가진 인간 한 명에게 우리 일원들이 전부 당했어요! 저도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인계에 사는 인간들이 일반적인 대화 주제가 마족인 경우는 없다.
달리 말해 이 마계에 사는 마족들의 입에서 인간이 오르내릴 경우는 매우 희박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에 관한 대화가 오가고 있다는 건…….
“찾은 것 같네요.”
루나브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달려갔다.
“진짜 매번 놀라게 한다니까.”
그녀의 경이로운 마법 활용력에 레미하람은 감탄을 표했다.
그렇게 달려온 곳은 인적이 드문 골목 한가운데.
그림자가 드리워진 벽 한쪽에서 마족 둘이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그들은 루나브를 발견하고선 화들짝 놀라 몸을 굳혔다.
“뭐야? 저리 안 꺼…?”
언뜻 봐도 마족과는 확연히 다른 외면.
그녀를 쫓아내려던 마족은 말을 잇다 말고 입을 멈췄다.
“이, 인간?”
나머지 한 명은 아예 마수라도 본 것처럼 눈을 격하게 떨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의외의 반응에 루나브 또한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에 관해 대화를 나누시는 것 같던데…….”
둘은 일순간 흠칫 몸을 떨었다.
“저에게도 좀 들려주시겠어요?”
그러자 마족 한 명이 격하게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우, 우린 이제 너희랑 관련 없어! 난 말할 만큼 다 말했다고!”
“뭘 말인가요? 전 당신으로부터 아무것도 들은 게 없는데?”
“너! 그 시꺼먼 인간 남자랑 같은 무리 아니야?”
그 말에 반쯤 내려앉아 있던 루나브의 눈이 부릅떠졌다.
“시꺼먼 인간 남자요?”
“그래! 우리 일원들을 전부 죽인 것도 모자라, 나한테 이런 거 저런 거 사소한 것까지 죄다 불게 했다고!”
“혹시 그 인간 남자란 분. 단검을 사용하셨나요?”
“마, 맞아!”
제대로 찾았음을 인지한 루나브는 그 순간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한 번 부신 거, 두 번 분다고 달라지는 거 아니잖아요?”
“뭐?”
“저한테도 말해주시겠어요? 선배한테 말한 전부를 그대로…….”
* * *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딱 열 걸음.
그 적당한 거리를 사이에 둔 채, 데빌 드래곤은 나를 마계의 깊숙한 곳으로 계속해서 이끌었다.
-스슥
날카롭게 버려진 잎사귀에 얼굴이 쓸렸다.
피가 나진 않았지만, 칼날에 베인 것 이상으로 쓰라렸다.
그나마 이런 잎사귀는 양호한 편이었다.
중간중간 얼룩이 지거나 아예 빨갛게 물들여진 잎사귀들 같은 경우엔 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단 여기가 뭐 하는 장소인진 둘째 치더라도,
“성검의 기운은?”
[전혀 안 느껴져. 넌?]
물어봐야 피차 마찬가지.
나를 제외한 인간의 기운은 눈을 씻고 쳐다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키약!”
수풀더미 한쪽에서 뭔가가 나를 덮쳤다.
-서걱
나는 눈조차 마주하지 않고, 바로 목을 베어버렸다.
잠시 두 동강 난 녀석의 사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레메아 협곡에선 보지 못했던 마수다.
대충 인계의 생물로 비교하자면 뱀을 닮았는데, 굵기는 성인 여성에 준할 만큼 뱀치곤 매우 컸다.
-주르륵
잘린 목에서 붉은빛과 녹빛이 어우러진 체액이 흘러내렸다.
붉은액은 피, 녹액은 독.
섞이지 않고 따로따로 흘러내리는 것이 마치 물과 기름을 보는 듯했다.
“식성은 여전한 모양이군.”
나는 바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마수는 안 먹는 게 좋다. 독이 워낙 지독해서 먹으면 며칠 배를 곯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확신이 들었다.
“누가 들으면 내가 마수를 먹는 모습을 직접 본 줄 알겠군.”
“…….”
“너. 나 본 적 있지?”
“입 다 물고 따라오기나 해! 인간이랑 말 섞고 싶지 않으니까!”
녀석은 답을 회피한 채 다시금 길을 나아갔다.
가는 동안 이름 모를 마수의 습격이 몇 번은 더 있었지만, 희한하게도 나만 공격할 뿐, 저 깐깐한 드래곤에겐 눈조차 돌리지 않았다.
생물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상위 포식자를 알아본다고, 감히 드래곤에게 덤비는 멍청한 마수는 없겠지.
근데 영 기분이 찝찝하다.
마치 저 드래곤을 피해 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닌, 저 드래곤이 나를 공격하라고 명령하는 기분이었다.
녀석은 내가 마수들과 싸우면 힐끔 하고 잠시 바라만 볼 뿐,
특별히 나선다거나, 나를 보호하려 들진 않았다.
그렇게 귀찮은 처리를 반복하며 도착한 어느 장소.
“도착했다.”
인간은커녕 지나오면서 수차례 마주쳤던 마수의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는 숲속 한가운데였다.
“여기에 대체 뭐가 있다는 거지?”
“내가 어찌 알겠냐? 난 나겔님께서 지시에 따라 널 이곳에 데려왔을 뿐인데. 나한테 물어봐야 알아낼 수 있는 건 없다.”
녀석은 이제 알아서 하라는 듯 투박한 반응을 보였다.
“그 눈이랑 코는 장식으로 달린 게 아닐 텐데?”
“뭐?”
“이런 어둠의 중심부 같은 곳에 내가 찾는 인간이 있을 거라고? 네 우두머리가 정말 그렇게 전했냐? 네가 못 알아 처먹은 건 아니고?”
“가, 감히 나겔님을 우롱하는 것이냐?”
“널 우롱한 거다.”
난데없는 모욕에 화가 치솟은 놈은 쌍심지를 치켜세웠다.
기세만 봐선 금방이라도 본 모습으로 돌아와 나를 한입에 삼킬 것처럼 보였지만,
“내 할 일은 여기서 끝이야. 나머진 네놈이 알아서 해!”
놈은 싱겁게 꼬리를 내렸다.
그러곤 한시라도 빨리 여길 뜨려는 듯 바로 본모습으로 돌아와 날개를 펼쳤다.
“너 나 본 적 있지?”
나는 조금 전 했던 질문을 재차 반복했다.
“또 그 소리냐? 내가 왜 그걸 답…!”
“10년 전, 레메아 협곡 블러드 리버 절벽 위.”
녀석의 얼굴이 순간 생생하게 일그러졌다.
“강줄기 사이를 두고 나랑 마주쳤던 그 데빌 드래곤. 너 맞지?”
“드, 드래곤 잘못 봤어! 이후론 네놈 알아서 해! 난 이만 돌아가겠다!”
-후우웅
급박한 외침과 함께 주변에 세찬 돌풍이 불었다.
놈은 커다란 날개를 퍼덕이며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올랐고, 나에게서 빨리 멀어지기 위해 날개를 빠르게 휘둘렀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을 눈앞에 두고 도망치는 드래곤이라니.
하긴 이미 한 번 도망쳤던 마당에 두 번이라고 못 할 건 없겠지.
그때는 주변에 눈들이 워낙 많았던지라 그냥 놓칠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엔 아니다.
저 드래곤은 아직 나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더 남아있다.
“암무 3식: 안개 활강.”
-부웅!
나는 주문과 함께 뻗어 나온 안개를 몸에 감싼 채 녀석을 따라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