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2화. 마녀를 찾아서 (1)
“불편했을 거 알아! 하지만 그 상황에 멀뚱히 서 있고 싶진 않았어!”
“…….”
“그거야말로 아무것도 못 하는 껍데기 황녀 아니야? 루나브도, 세트 왕자도, 그리고 너까지. 전부 내가 오게 했어! 그러니 이에 대한 책임도 당연히 내가 졌어야 한다고 생각해!”
“…….”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넌 또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 했겠지! 네가 그 마왕이란 자와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거래를 했는지 정말 궁금하지만, 난 묻지 않을 거야! 왜냐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황녀님께서 지금 하셔야 할 일은….”
연신 대답 없이 아린의 말을 듣기만 하던 시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찾는 일입니다.”
일말의 감정도 서리지 않은 무심한 얼굴로.
“에쉘 베르트를 찾고, 그 마녀란 자를 찾으십시오. 그것이 지금 황녀님께서 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저에 관한 생각은 일체 하지 마십시오.”
시안은 확고함은 마치 거대한 바위를 보는 것 같았다.
“황녀님이 생각하셔야 할 건, 제가 아닌 이 제국, 그리고 이 대륙입니다. 이 점을 항상 기억하시고, 더불어 잊지 마십시오. 황녀님께서 하셔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안다.
너무나도 잘 안다.
황녀로서 가져야 할 마음과 책임감을 하루가 멀다하고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하지만,
“널 걱정하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
“네?”
난데없는 물음에 그녀를 뒤따르던 레시무스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호, 혼잣말이야 혼잣말! 신경 쓰지 마 레시무스!”
아린은 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을 무마했다.
레시무스는 어리둥절하다가도 이내 아린의 속마음을 눈치채고선 소탈하게 웃으며 물었다.
“마계로 가신 두 분이 걱정되시는 모양이죠?”
“아니. 걱정하지 않아.”
아린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시안과 루나브가 마왕을 따라 마계로 떠난 것이 불과 두 시간 전.
시안은 늘 그래왔듯, 자신에 대한 걱정은 접고, 온전히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라는 말만 남기며 무심하게 떠나버렸다.
“걱정 안 해. 신경도 안 쓰려고,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그게 아니니까.”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기에,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지만.
아린도 이제는 묻고 싶었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뭔데?’
부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꼭 듣기 위해서라도,
시안이 한시라도 빨리 무사히 돌아오기를 아린은 마지막으로 기원했다.
“여기 계셨군요, 황녀님!”
그렇게 복도를 지나던 와중, 그녀들 앞으로 슈르츠가 달려왔다.
“전령구를 통해 조금 전 가람 학회와 합의를 마쳤습니다. 마녀와 관련된 학회의 모든 기록 및 연구 자료들을 종합하여 정리하는 즉시 보내겠다고 합니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아린은 바로 물었다.
“가람 학회에서 협조에 응해줬단 말인가요?”
“예. 어디까지나 제가 아닌, 루나브님의 뜻이 반영된 일이니까요. 학회에선 하루에서 이틀 정도 소요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슈르츠는 자신은 그저 지시받은 일만 했을 뿐이라고 했다.
“정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고 이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사람이네요. 루나브는…….”
슈르츠는 대답하지 못해 애써 시선만 회피했다.
“가람 학회에는 이번 협조에 상응하는 보답을 반드시 해주겠다고 전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아린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레시무스와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황녀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렁찬 선창과 함께 방문을 여는 기사들.
안에는 격식을 갖추기 위해 곱게 차려입은 두 모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누추한 곳에 친히 발을 들여주셔서 영광입니다. 아린 황녀님. 마가렛 에르제스입니다.”
“크란츠 베르트입니다.”
수척해진 얼굴을 각자 화장으로 가린 티가 여과 없이 드러났지만, 아린은 내색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요청임에도 불구하고 만남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상황이 상황인만큼 적극적인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린은 바로 자리에 앉아 조사겸 대화를 시작했다.
“일련의 일은 이미 제 수행원들을 통해 전부 들으셨을 거라 봅니다. 그러니, 아시는 게 있으면 전부 말씀해주세요. 공작님에 대해서, 그리고 에쉘 베르트에 대해서…….”
“다른 건 찾으실 필요 없습니다 황녀님.”
이내 마가렛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년을 찾아야 해요. 그년이 이 모든 일에 원흉입니다! 그년이 공작님을 아니, 그이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어요!”
감정이 섞인 나머지, 마가렛의 목소리는 다소 격양된 상태였다.
“원래는 존재해선 안 되는 여자입니다! 이미 죽은 여자라고요! 그렇게 믿고 지난 수십 년을 살아왔는데…!”
“지, 진정하세요 어머니!”
흥분이 차오르는 그녀를 크란츠가 만류했다.
“대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니엘 파시니티!”
“……!”
“에쉘의 친모입니다.”
* * *
세상에는 무언가를 알면 알수록 그 해답을 찾기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 있다.
마치 미궁처럼.
어쩌면 자신은 지금 그 길을 모르는 미궁 한복판에서 탈출구를 찾는 일과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지도 모른다.
창가에 몸을 기대던 아린은 복잡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곧 레시무스가 다가왔다.
“파시니티라는 성을 조사해본 결과, 제국은 물론 대륙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귀족이나 유력 가문 출신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저택의 기사들이 말하길, 마치 현혹당하는 기분이었다고 했지?”
“예. 분명 그리 말했습니다.”
“에쉘은 벨리아스에 도착하자마자, 베르트 공작이 있는 경계문으로 호송됐다고 했고. 그리고 지금까지 저택엔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고 했어. 대신 그가 전선 지역에 상주하는 동안, 그의 친모를 주장하는 하니엘 파시니티란 자가 베르트 가를 찾아온 거지.”
“사전에 협의라도 있었던 걸까요?”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갑작스러운 느낌이 커. 비올렛 언니와 황실을 주름잡고 있을 때도, 작은 여지조차 없던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저택을 장악한 거고. 거기에 원래 안주인이었던 마가렛 부인을 협박해 우리 황실에 반하는 반대 세력을 규합하려 했지.”
“마치 위기에 처한 자식을 구해주기 위해 나타난 것처럼 보이는군요.”
현재로선 모든 게 의문이었다.
“그래도 그 두 사람이 뭘 원하는지 정도는 알 것 같아.”
“그게 무엇입니까?”
“혼란.”
아린은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 두 사람은 이 대륙에 혼란이 오는 것을 원하고 있어. 우리의 힘으로도 차마 대응할 수 없는 그런 큰 혼란을 말이야.”
“그런 혼란을 일으켜서 대체 뭘 얻으려 한단 말입니까?”
“다시 군림하려는 거겠지. 이 세상을 구할 유일한 구원자로서…….”
이미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그녀들은 깨달았다.
그는 절대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그가 다시 구원자를 자청하는 때가 오게 해선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한시라도 빨리 그들을 찾아야겠군요.”
아린은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아 황녀님. 혹시 율켄 다리우스라는 기사를 아십니까?”
“율켄 다리우스라면, 베르트 공작의 부관 아니야?”
“맞습니다. 저택 기사들에게 듣기론, 하니엘이 저택을 장악하고 있던 동안 이 안에 구금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걸 시안님께서 구해주셨다는군요.”
“그 사람 지금 어디 있는데?”
“개인 임무를 위해서 지금은 벨리아스를 벗어났다고 합니다.”
레시무스는 설명과 함께 서신 하나를 건넸다.
“대신 떠나기전, 기사들을 통해 서신 하나를 남겨두고 갔습니다. 시안님이나 순방단원이 오면 전해달라고 했다더군요.”
아린은 바로 서신을 뜯어 안을 확인했다.
이내 내용을 확인한 아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율켄은 그 현혹의 힘에 당하지 않았던 모양이야.”
“이유라도 있던 겁니까?”
“자세한 건 모르겠대. 다만 베르트 공작을 향한 강한 신념과 충성심이 작용한 것으로 추측하는 모양이야. 현혹의 힘에도 굴하지 않는 신념. 이게 사실이라면, 그 정체 모를 힘에 대처할 수 있는 큰 단서가 될 수 있어.”
“즉 강인한 정신력이 필요하다는 얘기겠군요.”
레시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리고 만약, 그 에쉘의 친모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서신을 쭉 읽던 아린의 눈동자가 갑자기 동그랗게 떠졌다.
“왜 그러십니까 황녀님?”
“그, 그러니까. 그 하니엘이란 자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존재가 저택에 딱 한 명 있었다고, 그 사람을 찾아보라는데?”
“그러고 보니, 저택의 시종들로부터도 비슷한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없지만, 그 하니엘 파시니티의 얼굴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시녀가 있었다고…….”
"시, 시녀 말입니까?"
기사도, 일반 시종도 아닌 시녀.
아린은 공교롭게도 서신에 적힌 그 시녀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베르트 가는 물론, 자신과도 인연이 깊은 바로 그….
<에밀리>
* * *
“이봐요 브라이언.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요?”
부엌에서 국자를 휘젓고 있던 에밀리가 대뜸 브라이언을 향해 물었다.
“자,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 시간을 쭉 돌이켜보니, 어느새 내가 도련님의 밥을 차려준 횟수보다, 저 꼬맹이의 밥을 차려준 횟수가 더 많아졌다는 거예요. 이쯤 되니 내가 도련님의 시녀인지, 저 꼬맹이의 시녀인지 혼란스럽다니까요?”
“그, 그래도 도련님과 함께하신 시간이 훨씬 더 길지 않습니까? 저나 나나보다, 에밀리님이 훨씬…….”
“그럼 뭐해요? 그 도련님은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는데.”
“에밀리 언니! 밥 다 됐어요?”
에밀리는 작은 한숨과 함께 스프가 담긴 솥을 식탁 위로 옮겼다.
나나는 해맑은 얼굴로 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뭐 도련님보다 훨씬 잘 먹긴 하니, 나름 지켜보는 맛은 있지만요…….”
브라이언은 멋쩍게 웃으며 얼굴만 긁적였다.
이내 식사 중인 나나의 옆으로 미아가 다가와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그녀 역시 나나와 마찬가지로 식사를 바로 시작했다.
“미아님도 식성이 참 좋으시군요.”
“임무의 일환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을 온전히 지키려면 항상 잘 먹어둬야 하니까요.”
임무를 위해서라는 말과 다르게, 그녀의 식성은 나나 못지않았다.
솥의 한가득 있었던 스프는 어느샌가 반 넘게 사라져 버렸다.
“빨리 그 사람, 아니 엘프나 데려와요. 좀만 더 있으면 아예 입도 못 댈 것 같으니까.”
“하스티아님 말이군요. 바로 데려오겠습니다.”
브라이언은 바로 하스티아가 있는 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하스티아님?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
‘…….’
반응이 없자 브라이언은 한 번 더 두드렸다.
“하스티아님? 식사 준비가….”
-덜컥
갑자기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하스티아의 손이 쑥 하고 나와선 브라이언의 팔을 잡고선 순식간에 안으로 끌어당겼다.
“하스티아님 갑자기 왜?”
하스티아는 쉿 하고 바로 브라이언의 입을 막았다.
그러더니, 다시금 문을 살짝 열고선 밖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무,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살짝 눈치를 보던 하스티아는 이내 조심스레 손가락을 들어 문틈 사이로 보이는 누군가를 가리켰다.
“에밀리님 말입니까?”
다름 아닌 에밀리였다.
고개를 끄덕인 하스티아는 손짓하려다가도 수어로 표현하기엔 어려운 말이었는지, 책상으로 달려가 종이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러곤 바로 브라이언게 보여주었다.
“저기 밖에 계신 에밀리라는 분 혹시…….”
브라이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하스티아의 글을 조용히 읽어나갔다.
“마녀이신가요?”
하스티아의 얼굴은 뭔가 확신이 차오른 사람처럼 무척 비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