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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작가의 막내도련님은 암살자-242화 (242/325)

제242화. 안개의 질서 (2)

황궁 내 아린의 집무실.

다시 황궁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휴식할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황군과 구원의 기사단, 그리고 힘을 전승받았던 각 영지의 기사들까지 전부 조사한 결과, 성검의 힘이 다시 발현되었던 사례는 없다고 합니다.”

“아바마마의 상태는?”

“어제와 크게 달라지신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린은 복잡한 마음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 마마를 비롯한 네펠리스 후작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사태를 통해 반등할 기회를 잡으려는 것 같습니다.”

“몸도 성치 않은 아바마마를 감히 전장으로 몰고 간 것에 대한 책임을 우리 쪽에 전가하려는 거겠지.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을 테니까.”

이미 예상한 일이라는 듯 아린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에쉘 공에 대한 소식은 아직 없어?”

“황성 인근에서 닮은 사람을 봤다는 몇몇 제보가 있긴 했으나, 아직 확실한 소식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레시무스는 말을 잇다 말고 살짝 머뭇거렸다.

“미스트에 대한 소식도, 아직 들려오는 건 없습니다.”

그 말에 아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혼란의 도가니였던 그날로부터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시안과 미스트는 시리카의 시체를 수습하고선 그대로 떠났으며, 떠나는 그들을 아린은 막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었던 하루.

아직도 그 모든 상황이 머릿속에서 생생히 그려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그때 시리카님을 죽였던 존재는,”

“……?”

“사람이 아니었겠지?”

“대체 무엇을 보셨던 건지?”

당시 현장에 없던 레시무스로선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모르겠어. 추측되는 것은 있는데, 차마 내 입으론 감히 언급해선 안될 것 같아.”

아린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괴로운 기색을 표했다.

“시안은 괜찮은 거겠지?”

그러면서 비탄에 잠겨 울부짖던 시안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똑똑

“비올렛 황녀님께서 오셨습니다!”

이윽고 노크와 함께 들려오는 비올렛의 방문 소식.

곧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당당한 발걸음의 비올렛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오세요 언니.”

“잠깐 이야기 좀 하죠. 아린.”

두 자매는 마치 예정된 만남이라는 듯, 아무런 내색 없이 자리에 앉았다.

살짝 눈치를 보던 레시무스가 조용히 나가려는 순간,

“거기 계세요.”

비올렛이 그녀를 막아 세웠다.

“굳이 나가 있을 필요 없으니까.”

비올렛의 지시에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자리를 지키라는 속뜻이 담겨 있었다.

“소식은 들었죠? 황후 일가 쪽에서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우리 쪽에 물으려 하고 있어요. 제대로 대처 못하면 우린 속수무책으로 당할 거예요.”

우리?

그녀의 입에서 나온 우리라는 말이 아린에겐 유독 낯설게 들렸다.

“왜요? 이제와 내 입에서 우리라는 말이 나오니까 굉장히 어색한가 보죠?”

그런 아린의 심정을 꿰뚫기라도 한 듯 비올렛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이해해요. 지난 몇 년 동안 일을 함께했어도, 당신과 나 사이에 믿음이란 건 없었으니까. 이참에 고백할게요. 난 아린 당신을 죽이려고 했어요.”

“……!”

“예상 못 했나 보네요? 어느 정도는 대비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제가 언니에게 그 정도로 가치 있는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가치라는 말에 비올렛은 피식 웃었다.

“재밌는 말이네요. 딱히 용서를 구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내 무지로 인해 벌어진 내 잘못이니, 책임도 온전히 내가 져야겠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서로 해야 할 일을 나누도록 하죠.”

“어떤 식으로 말인가요?”

“지금, 이 시간부로 이번 사태에 대한 모든 뒤처리는 내가 담당합니다. 아린 당신은 그저 우리가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 이번 일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겁니다. 내 말 알겠죠?”

깜짝 놀란 아린은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그, 그 말은 언니께서 모든 책임을 다 지겠단 말씀이신가요?”

“네. 전부 내가 안고 갈 거예요. 이미 외할아버지로부터 조언도 다 구해놨어요.”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황녀니까.”

그 한마디에 아린은 입이 다물어졌다.

“이 나라의 운영을 책임져야 하는 황녀이기에, 내가 다 책임지고 갈 겁니다. 이건 당연한 일이에요.”

비올렛의 눈엔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그러니 아린 당신은, 지나간 과거가 아닌, 나아가야 할 황실의 앞날을 위해 일해주세요.”

비올렛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일으켰다.

“당분간은 날 보기 힘들 거예요.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세요. 혹여 다시 올 일이 없도록…….”

“제게!”

아린 역시 벌떡 일어나 멀어지는 그녀에게 소리치며 물었다.

“제게 황실을 온전히 다 맡기셔도 정말 괜찮으신가요?”

비올렛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문고리를 잡고 자리에 잠시 머물렀다.

짧은 침묵이 흐른 후,

비올렛은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 말은 우리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겠죠.”

아무리 자식이라 해도 부정할 순 없었다.

디오네 황제의 생은 이미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니, 당신만큼은 황실과 제국의 미래를 위한 준비를 이어나가야 해요.”

비올렛은 더 말을 잇지 않고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난 자격이 없으니까…….”

아린은 그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마음이 미묘해진 아린은 떨리는 가슴을 움켜쥐며, 비올렛이 나간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레시무스.”

“예. 황녀님.”

“나 인정받은 걸까?”

레시무스는 살짝 뜸을 들였지만, 이내 확고한 어조로 답했다.

“제가 보기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런 기분이구나. 인정 받는다는 건.”

아린은 자신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잠깐의 감상 젖은 시간을 보낸 뒤, 다시 집무를 재개하려는 순간,

-똑똑

집무실의 문이 또 한 번 울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노크에 이어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아린과 레시무스는 함께 귀를 의심했다.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레시무스는 손수 문으로 가서 방문자를 확인해보겠다고 말했다.

“아니야. 레시무스!”

아린은 그런 그녀를 손을 들어 만류했고,

“들어와.”

감정을 자제한 평온한 목소리로 출입을 허가했다.

-끼익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방의 공기가 급격하게 내려앉았다.

당당한 걸음으로 정문을 통해 들어오는 낯선 방문자.

짙은 검은 색의 단정하면서도 묵직한 느낌의 귀족 의상을 차려입은 흑발의 남성.

다름 아닌 시안이었다.

그동안은 좀처럼 보기 드물었던 귀족의 품격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어, 어떻게 온 거야?”

“보시다시피 정문으로 왔습니다.”

“혼자서?”

“예.”

시안은 무슨 문제 있냐는 듯 무심한 답변을 이어 나갔다.

“황녀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시간 되시겠습니까?”

“물론이지.”

아린은 시안에게 손수 자리를 안내했다.

시안은 돌릴 것 없이 바로 이야기를 꺼냈다.

“미스트에 대한 추적을 멈추셨다고 들었습니다.”

“공식적인 조사만 그런 거지. 아직 개인적으론 너희에 대한 소식을 계속 알아보고 있었어.”

“이유가 뭡니까?”

“별거 없어. 다른 쪽 일에 더 집중해야 했을 뿐이야.”

아린은 침착하게 답을 이어나갔다.

“알잖아? 지금 황성뿐만이 아닌, 제국 전체가 혼란스럽다는 거.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려 했던 날에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으니, 지금은 그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온 신경을 쏟는 중이야.”

“많이 발전하셨군요.”

예상치 못한 칭찬에 아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전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었는데, 물어봐도 될까?”

“그러십시오.”

“너는 네 형을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시안에게 있어선 매우 민감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

“그 사람의 진면을 알기에, 증오하는 겁니다.”

시안은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답을 이었다.

“그는 이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도, 새로운 질서를 이끌어나갈 개척자도 아닙니다. 그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주변의 모든 것을 이용하다가 필요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리는……. 더럽고 야비한 한 명의 인간일 뿐입니다.”

흥분하거나 동요하는 모습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침착함을 넘어 냉정한 눈빛으로,

시안은 에쉘에 대한 마음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허나 세상은 그를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이자 희망인 것처럼 만들어놨습니다. 전 그걸 용납할 수 없기에, 그가 하려고 했던 모든 계획을 철저하게 망가트리려 했습니다. 그날의 일도 마찬가지였죠.”

시안이 아린에게 보여주겠다고 한 빛의 진면도 빛의 구원자라고 하는 에쉘의 진짜 모습을 의미한 것이었다.

“하지만 뜻대로 흘러가진 않았습니다. 아마 머지않아 다시 빛을 들먹이며 나타나 저희의 존재를 부정하려 들겠지요. 황녀님을 또 한 번 이용하려 들 수도 있습니다.”

“넌 그러길 원치 않는 거지?”

이에 아린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물었다.

“…….”

“그래서 지금 내게 와준 거 아니야?”

“딱히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시안은 애매하게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황녀님께 딱히 뭘 강요하러 온 건 아닙니다. 다만, 저희는 이제부터 음지에서 숨는 것이 아닌, 이렇게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면서 저희의 존재를 이 세상에 분명히 각인시킬 것입니다. 그러니 황녀님께선 선택해주십시오.”

“선택?”

“저희의 존재를 인정하며 받아 들여주실지, 아님 지금과 같은 질서를 계속 유지하실지를 말입니다.”

“그걸 왜 나에게 선택하라는 거야?”

이유를 모르겠다는 반응에 시안은 눈살을 작게 찌푸리며 말했다.

“이제 황녀님께선 그럴 힘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순간적으로 당황한 아린은 몸을 흠칫 떨었다.

힘을 가지고 있다고?

그 말은 곧 시안이 자신을 인정했다는 뜻이 아닌가?

직접적으로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아린은 이미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얼굴이 계속해서 달아올랐다.

“그리 좋아하실 일은 아닙니다. 힘에는 항상 대가가 따르는 법이기에, 황녀님께선 앞으로 더욱 많은 것을 책임지셔야 할 겁니다.”

허나 시안은 그런 흥분마저 한순간에 꺼트릴 삭막한 반응을 보였다.

덕분에 아린은 마음을 바로 누그러트릴 수 있었다.

“아무튼, 선택은 황녀님의 몫입니다. 뭘 선택하든 저희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만약 저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으시다면…….”

시안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적어도 방해는 말아주십시오.”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움이 느껴지는 한 마디였다.

그렇게 방을 나가려던 시안은 문득 의자 한쪽에 걸린 익숙한 무언가를 보고 발을 멈칫했다.

“저건 왜 아직도 가지고 계신 겁니까?”

“내 물건도 아닌데 함부로 없앨 순 없잖아. 다시 가져갈래?”

“됐습니다.”

시안은 그렇게 방을 나갔다.

아린은 시안이 나간 문을 한동안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쩌시겠습니까 황녀님?”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레시무스가 조심스레 물으니, 아린은 말없이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시리카 선생님께서, 내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이 있어.”

슬며시 커튼을 걷자, 안개로 자욱해진 황성의 전경이 보였다.

“시안의 뒤를 계속해서 쫓아가라고. 그냥 무작정 따라가는 것이 아닌, 의문을 가지고 쫓아가라 하셨어. 그럼 시안이 바라고자 하는 세상이 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하셨지…….”

피를 토하며 괴로움을 남발하는 동안에도 자신에게 유지를 전하려 했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

“만약 그 세상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면,”

아린은 그 광경이 아직도 생생하게 그려졌다.

“시안을 도와 그 세상을 만들어달라고 했어. 아직 시안의 곁엔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면서…….”

그러면서 레시무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우리도 분명, 도움이 될 수 있겠지? 레시무스?”

“황녀님이시라면 분명 큰 도움이 되어주실 수 있을 겁니다.”

레시무스는 그런 황녀의 뒤를 묵묵히 지켜줄 뿐이었다.

“아바마마를 뵈러 가자. 가서 내 생각을 모두 말씀드려야겠어.”

마음을 굳힌 아린은 집무실을 나가려다 말고, 무언가에 잠시 시선을 돌렸고, 이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시선이 향했던 곳엔, 시안의 검은 망토가 의자 위에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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