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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작가의 막내도련님은 암살자-239화 (239/325)

제239화. 비애 (2)

돌바닥 밟는 소리가 가득 울려 퍼지는 황궁의 지하.

사태의 소식을 접한 황실의 기사들이 급히 지하로 몰려든 것이다.

아린으로부터 황제를 부탁받았던 레시무스조차 긴급히 달려왔지만,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지하에선 굉장히 의외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

어떤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어 기사들은 눈을 방황했다.

“황녀님!”

이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레시무스가 아린에게 달려갔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조금 전과 다르게 아린의 얼굴엔 망연자실한 기색이 다분해 있었으며, 시선은 다름 아닌 시안에게 향해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지금 상황은 대체…….”

“레시무스.”

레시무스의 닦달에 아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기사들 전부 데리고 밖으로 나가줘.”

“예? 하지만…….”

“명령이야.”

평소 그녀답지 않은 무심하면서도 단호한 모습이었다.

“제발 이 상황을 방해하지 말아줘. 지금 내가 시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을 것 같으니까…….”

레시무스로선 여간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린 말대로 하세요.”

거기에 비올렛까지 거들며 말하니, 레시무스는 하는 수 없이 기사들과 함께 방을 나갔다.

기사들이 나가는 동안에도 아린의 눈은 시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나 물어도 될까요. 아린?”

그런 아린을 보며 비올렛이 물었다.

“저 남자의 저런 얼굴을 당신은 몇 번이나 보았던 거죠?”

“저도 처음이에요.”

솔직히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냉혹함이라면 둘째라도 서러울 시안이,

저런 비애가 가득한 표정을 짓게 될지.

아린으로선 그 모습이 참으로 기묘하면서도,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 * *

살면서 걷는 것이 이렇게 버거운 적이 있었던가?

검이 심장 바로 옆을 관통했을 때도,

마수들로부터 온몸이 뜯기고 있었을 때도, 이 정도로 힘들진 않았다.

극도로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마침내 당주의 앞에 이른 순간,

-털썩

모든 것을 내려놓은 죄인마냥 힘없이 주저앉았다.

일단은 아무 말 없이 당주의 상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뭐야?]

나보다 먼저 반응한 케이람이 의문이 담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칼에 찔리다 못해 아주 난도질을 했다 싶을 만큼 성한 곳이 없는 몸.

그런데 이상하다.

전신에 새겨진 당주의 상처에서 뭔가 낯선 것이 보인다.

피가 줄줄 흐르는 상처 안으로 자리한 하얀 광채.

나로선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매우 낯선 광채였다.

[루멘델 이 개자식이……!]

이에 케이람은 소리를 지르며 반응했다.

근데 또 웃긴 게 뭔 줄 아는가?

당주의 손에 피 묻은 검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의 피가 묻은 검이 말이다.

이걸 보고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당주의 절망적인 상태는,

그녀 스스로가 만든 거라고.

“케이람님의 열불터진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구나.”

슬그머니 입을 연 당주가 내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나는 웃음기 한 점 없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깜짝 이벤트라고 하기엔 너무 과하신 것 아닙니까?”

“…….”

“인정하겠습니다. 저 지금 굉장히 놀랐습니다. 저를 교화시키고자 하는 당주님의 마음을 잘 알았으니 이제 그만해주시지요.”

당주는 대답 대신,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나는 더 볼 것도 없다는 생각에 황급히 치유의 빛을 생성했다.

-턱!

생성한 치유의 빛을 당주의 몸에 대려는 순간, 누군가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다름 아닌 미스트의 대원이었다.

살짝 벙 쪄진 마음에 그대로 1초간 몸이 정지됐다.

당주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멍하니 있던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손까지 막아?

“안 놔?”

붙잡은 이 손을 당장이라도 썰어버릴 심정으로 말했다.

허나 손을 놓으라는 내 지시를 따르기는커녕, 다른 대원들도 하나둘 내가 힘을 쓰지 못하도록 내 손을 붙잡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엔 자신들도 정말 이러기 싫다는 부정의 의사가 가득 담겨있었다.

“당주님의 명입니다…….”

한 대원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명?

명이라고?

지금 나랑 장난치자는 건가?

어떤 정신 나간 수장이 자기 죽음을 방관하라는 그런 미친 명령을 내려!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 말라며 이들의 손을 전부 뿌리치려는 순간,

“애먼 대원들 잡지마렴.”

당주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명령했으니까.”

나는 어이가 없는 마음에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유가 뭡니까?”

나는 이유를 물었지만 당주는 오히려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아닌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

그 누구도 이 말 같지 않은 상황에 관해 내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시리카님께선 선고를 받으셨어요.”

그런 와중에 입을 연 한 사람.

미아였다.

“우리 인간으로선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의 선고를요…….”

선고?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시리카님의 상처, 보이시죠?”

그녀는 당주의 상처에 자리한 하얀 광채를 가리켰다.

“일전에 보리스 선생님께 들은 적이 있어요. 신은 우리 피조물의 운명을 정할 수 있는 지고한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권능?

“지금 보이는 저 광채가 그 증거에요. 신으로부터 죽음의 선고를 받은 인간은 상처를 치유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아요. 지금의 보시는 시리카님 몸처럼요. 하물며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찾아올 것은 죽음밖에 없죠.”

뭐지?

내가 지금 이해력이 저하되거나 그러진 않을 텐데?

왜 그녀의 말이 지금 하나도 이해가 안 되는 걸까?

치유할 수 없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전에, 네게는 작은 절망을 선물하도록 하지.’

순간, 그 빛의 신이 떠나기 전, 내게 남기고 갔던 말이 떠올랐다.

절망.

놈이 말했던 절망이 이런 것이었나?

나로부터 당주를 뺏어가기 위한?

“설명해봐 케이람.”

나는 허탈한 심정으로 케이람에게 말을 걸었다.

“너 이 상황에 대해 알 거 아니야? 선고인지 나발인지 이거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해?”

[…….]

내 간절한 물음에도 불구하고 케이람은 답해주지 않았다.

“대답해! 내가 뭘 해야 하는 거냐고!!”

[1분 안에…….]

케이람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선고 내린 신을 찾아서 죽이고 와.]

“…….”

[그럼 살릴 수 있겠지.]

무심하다 못해 야속하기까지 한 답변.

입에서 절로 헛웃음이 튀어 나왔다.

죽여? 1분 안에? 신을?

그래 그 신이란 놈이 당장 내 앞에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1분 안에 죽였겠지.

근데 지금 그 신이라는 놈은 내 앞에 없잖아?

그럼 찾으러 가야지!

아공간을 뒤지든, 하늘 위로 솟구치든,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보단…….

-턱

“……!”

힘겹게 손을 올린 당주가 내 팔을 붙잡았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내 이야기나 들으렴. 마지막 교육이 될 테니까.”

갓난 아기가 손짓하는 것보다 못한 힘.

당장이라도 뿌리칠 수 있지만,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당주는 그런 나를 아무런 말 없이 빤히 쳐다보다가도,

-스윽

살며시 손을 들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거칠구나.”

손에 묻은 당주의 피에서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시련과 고난에 치이고 치인 나머지, 매우 거칠어졌어.”

그럼 뭐 어느 귀족가의 자제처럼 부드러운 매끈한 피부를 원하셨을까?

“아공간에선 뭘 하고 왔던 거니?”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저희를 정말로 싫어하는 지고의 존재와 잠시 거친 대화 좀 나누고 왔습니다.”

“그래? 용케 살아 돌아왔구나?”

당주는 정말로 다행이라는 듯 내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미안하구나. 너와 부딪칠 일 없게 내 선에서 처리하려고 했는데, 우리를 향한 그분들의 시선이 더욱 악화된 것 같더구나.”

“그쪽 이야기는 나중에 아에르로부터 알아서 듣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제발……!”

얼굴을 쓰다듬던 당주의 손이 급기야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럴 순 없지. 이대로 가봐야, 너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아.”

이 손을 당장이라도 뿌리치고,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신을 죽이러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당주의 손에선 더 이상 삶을 이을 수 있는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일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당주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차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네가 바라고자 하는 세상은 단순히 바람과 힘만 있다고 해서 이루어질 순 없다고…….”

똑똑히 기억한다.

그때 당주는 내게 말했지.

동기가 필요하다고.

그래서 난 당주가 말하는 그 동기가 아린 황녀라고 생각했다.

내가 죽이지 못했던 아린 황녀를 만인이 보는 앞에서 죽임으로써 나를 각성시킬 거라고 보았다.

하지만 지금의 당주는,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나를 이용하렴.”

당주의 말엔 일말의 망설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절망할 필요 없다. 지금 네 안에 담긴 그 강렬하고도 부정적인 감정들은 전부 네 힘이 될 거야. 네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원동력이.”

“제가 바라고자 하는 세상에 당주께서도 계셔야 한다는 걸 왜 모르시는 겁니까!”

“어쩌겠니? 지금의 세상이 그걸 허락하지 않는데…….”

당주는 내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으로 슬며시 내 목을 감싸 안았다.

“넌 이기적이면서도 당돌하고,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밑도 끝도 없는 자만심에 찌들어있어. 하지만 차마 널 버릴 수가 없구나. 넌 내 소중한 제자이자, 나와 뜻을 함께 한 동지니까. 그래서 난 선택했다. 내 모든 것을 네게 주기로.”

당주는 그 말과 함께 내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녀의 안에 잔재해 있던 어둠 속성의 마력과 안개의 힘,

그 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기운과 감흥들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내 모든 것을 네게 주었다. 그 힘으로 뭘 할지는 네 자유야. 나를 대신해 미스트를 이끌든, 너 혼자만을 위해 살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어느 쪽이든 평탄하진 않겠지만…….”

전승을 마친 당주는 내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슬프니?”

여태 당주에게 들어왔던 말 중 가장 잔인한 말이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어 침묵만 이어 나갔다.

“그 감정을 잊지 말고 마음속에 꼭 새겨두렴. 내가 네 곁을 떠날 수밖에 없던 그 이유를 잊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면…….”

“…….”

“틀림없이 네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다.”

당주의 얼굴에서 흐른 뭔가가 내 어깨를 타고 등에 흘러내렸다.

피인지 눈물인진 알 수 없었다.

아니면 둘 다 섞였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응원해주마. 제자의 행복한 앞날을 바라는 한 명의 스승으로서 말이다.”

행복한 앞날?

글쎄 내게 있어 행복이라는 말이 과연 가당키는 한 건지 의문이 들지만,

적어도 나에게 그런 세상은,

당주가 있어야 한다.

그 당주가 없는 세상이라면,

나는 절대로 행복한 세상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부디, 잘 살아주렴. 시안…….”

-툭

내 등을 토닥여 주던 당주의 손이 맥없이 떨어지고,

가냘프게 들려오던 숨소리마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을 때,

나는 깨달았다.

오로지 나 하나만을 바라보면서, 내 모든 것을 해주었던 한 사람 시리카 니그리티가,

이제는 나를 떠나버렸다고.

다른 말로 하면,

더 이상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하…….”

속절없는 한숨을 내쉬며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그 이후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나중에 대원이 하는 말을 듣기론,

그냥 울부짖었다고 한다.

황궁이 무너져내릴 만큼의 시린 분노와 비애가 담긴 울부짖음이 지하에 애절하게 퍼졌다고 했다.

그 누구도 감히 말을 걸지 못할 만큼, 무척이나 애절하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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