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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작가의 막내도련님은 암살자-230화 (230/325)

제230화. 개편의 날 (9)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건 황제를 모방한 마리오네트가 아닐까?

하지만 그 생각은 3초도 안 돼서 바로 접었다.

사람의 기세라는 건 본디 흉내 낸다해서 함부로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풍채, 걸음걸이, 인상, 그 외 다른 부가적인 요소까지.

내 눈앞에서 다가오는 저 사람은 틀림없는 이 나라의 황제, 디오네 세벨러스다.

지난 몇 년간, 고질적인 지병의 발작으로 정무는커녕 일상생활조차 하지 못했다고 들었건만,

저 모습은 뭐 지금 당장 마수를 토벌하러 가도 문제가 없을 만큼 당당한 상태다.

황제뿐만이 아니다.

황군, 구원의 기사 할 것 없이, 어디서 검 좀 휘둘러봤다 싶은 다수의 기사들이 황제의 뒤를 이어 속속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전부 손에 검을 쥐고 있다는 것.

검에는 성검과 유사한 빛의 마력이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 아바마머가 어째서 여길?”

정작 나보다 더 충격을 받은 이는 아린 황녀였다.

하루 종일 병상에 누워 숨쉬기에만 급급했던 아비가 난데없이 완전 무장한 채로 눈앞에 나타났으니, 안 놀라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허나 그러다 정신을 놓고 내 뒤통수라도 치면 곤란하니,

-턱

잠시 진정시킬 필요는 있겠지.

나는 살며시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모든 것을 무(無)로…….”

아퀴젤 때와 마찬가지로, 주체못하고 퍼지는 그녀의 힘을 전부 무력화시켰다.

검과 날개에서 발현되던 빛은 서서히 사라졌으며, 이내 힘을 잃고 쓰러지는 그녀를 레시무스가 부축해주었다.

“아바마마…….”

쓰러지는 와중에도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황제에게 향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사들은 점점 더 집결하였고, 재밌는 구경거리가 있다는 소문이라도 퍼졌는지, 일반 군중들까지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에쉘을 지나쳐 앞으로 나선 황제는 기품있게 검을 들어 올리며 선창했다.

“우시프 제국 황제로서 구원의 검을 든 그대들에게 명령을 내리노라!”

선창에 반응한 기사들 역시 우렁찬 기합을 내질렀다.

“모든 기사는 검을 들어 황실을 능멸하고 빛을 모욕한 저 안개의 존재를 처단해라! 저 존재가 무릎을 꿇고 쓰러질 때까지, 그대들은 검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야말로 같잖은 인형극의 최절정이 아닐 수 없다.

그래, 성검을 이리저리 개 퍼주듯 내준 이유가 결국은 이것 때문이었단 거지?

지극히 당신다운 발상이란 생각이 안 들 수 없다.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게 아닌, 주변 사람에게 힘을 나누어줌으로써 대신 처리하게 하는, 일종의 성검 군단을 만든 것이다.

똑같네.

악의 처단이라는 목적으로 나를 향해 겨눠진 수많은 검,

그들에게 있어 나는 이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절대 악과도 같았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끝까지 싸우고 저항하다가,

결국 죽었지.

나 혼자 쓸쓸히, 정말 처량하게.

사실은 그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저기 봐! 아린 황녀님이야! 저 암살자가 아린 황녀님을 납치한 거라고!”

“황녀님을 풀어줘!”

“저 암살자를 죽여라!”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허나 지금 저 군중들의 시선엔 내가 아린 황녀를 납치한 범인이자, 대륙을 혼란스럽게 하는 장본인처럼 보이겠지.

정말 지랄 맞게 재밌는 상황이다.

“보이느냐, 시안?”

어느새 얼굴에 거만함을 한껏 머금은 에쉘이 내게 물었다.

“이것은 너를 향한 만인의 시선이다. 너를 보는 세상의 시선이기도 하지. 너란 존재는 결국 사람들에게 혼란만 가져다주는 죄악의 존재일 뿐. 그 누구도 너의 존재를 바라지 않는다.”

어련하실까?

모르고 있는 사실도 아니기에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너를 도와줄 이들은 아무도 없다. 하물며 구원해줄 존재조차 없지. 그 외로움과 쓸쓸함에 사로잡히다 보면, 넌 머지않아 절망하게 될 것이다. 그럼 비로소 보이게 되겠지. 너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꺼내줄 유일한 존재가 바로 나라는 것을…….”

그는 최악의 순간에서 나를 구원해줄 유일한 이가 바로 자신이라며 되도 않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나는 어떠한 대답이나 반문도 없이, 무심한 반응만 이어 나갔다.

“억울하지도 않니?”

그런 나를 보며 아린 황녀가 물었다.

“너와 미스트가 원한 게 정말로 이런 상황이야? 사람들에게 멸시당하고 세상으로부터 부정당하는 게 정말로 네가 원하는 일이냐고?”

그녀는 따지듯 호소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으로 태어나 어느 누가 배척받는 걸 원하겠는가?

그 누구도 원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익숙할 뿐입니다.”

“뭐?”

“제게는 이런 상황이 그저 익숙할 뿐입니다. 그러니 아무렇지도 않은 겁니다.”

“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야?”

아린 황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질색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이해 못 하겠지.

허나 나로선 이해시키고픈 마음도 없다.

나란 놈에게 애초에 구원이라고 하는 이상적인 건 없었으니.

그저 나 혼자, 홀로, 외롭게.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이 상황을 이겨나갈 뿐이다.

그렇게 차분한 마음으로 나 역시 검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도려어언님!!!”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휘이잉!

갑자기 한쪽에서 돌풍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검을 든 두 남자가 인파들을 헤치고 내 쪽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전후 사정을 논할 것도 없이, 내 앞에 떡하니 서서 내가 아닌 기사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브라이언?”

내 종자 브라이언이었다.

“무,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분명 내가 아공간에서 대기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여긴 왜 있는 거지?

그를 따라온 흑발의 남자는 내 눈치를 슥 하고 보는가 싶더니, 다시금 기사들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잠깐, 쟤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분명 일전에 로랑드에서 루나브랑 있었던…….

-스스스

혼란스러운 상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디서 흘러왔는지 모를 검은 안개가 나를 보호하려는 듯 주위를 순식간에 감싸 안았으며, 그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지간히 상황을 귀찮게 만드는구나.”

다소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다.

안개는 짧은 목소리와 함께 바로 사라졌다.

“크악!”

돌연 군중 속에서 낯선 비명이 퍼졌다.

비명은 점차 곳곳에서 들려왔으며, 이에 사람들은 소리쳤다.

“미, 미스트다!”

기사들의 방어를 뿌리치며, 점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암살자들.

그들은 하나둘 내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곧 나를 지키기 위한 진용을 갖추었다.

아무런 말이나 설명도 없었다.

마치 나를 위해 싸우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그 와중에 정신감응을 했던 당주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시겠습니까 도련님?”

다소 어리둥절한 나를 대신해 브라이언이 물었다.

“저희가 시간을 버는 동안 이 자리를 벗어나시겠습니까? 아님…….”

브라이언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도망칠 것이 아니라면, 이들을 전부 죽이겠다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겠지.

허나 내 선택이 뭐가 됐든, 철저하게 따르겠다는 의지가 그의 눈에서 가득 엿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힘을 회복한 아린 황녀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넌 언제나 혼자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렇지 않아. 아무리 세상이 널 필요 없는 존재라고 부정한대도, 너를 필요로 하고 네가 있어서 삶이 변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어. 나와 레시무스처럼.”

황녀는 다시 한 번 자세를 잡으며 내가 아닌 기사들에게 검을 겨눴다.

레시무스 역시 그녀와 함께 자세를 잡았다.

“내가 아퀴젤에서 말했지? 난 널 구원하고 싶었다고. 나 혼자선 부족할 거야. 하지만 너를 원하는 수많은 사람과 함께라면, 못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지금 이 자리만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도 너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겠지.”

“전 원한다고 한 적 없습니다만?”

“네가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내가 원하는 일이니까.”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정말 끝까지 미련하시군요.”

“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봐야. 딱히 타격도 없어.”

이제는 자신에 대한 비난도 무념하게 받아들이는 그녀였다.

“보여줘 시안. 네가 말하는 빛과 안개의 진면을…….”

나는 슬그머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먹구름이 드리워진 어두운 하늘.

고난과 시련이 이어질 내 앞날을 보는 것만 같았다.

허나 그래서인지 더욱 마음이 편안해졌다.

더 이상 잡다한 생각은 접어두려 한다.

그냥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겠지.

저 가증스럽게 웃고 있는 악마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일그러트리는 일 말이다.

* * *

휘황찬란한 광채가 번들거리는 빛의 아공간.

공간 중심에 자리한 은빛 성좌에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한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각또각

잠시 후 들려오는 누군가의 요란한 발소리.

소리와 함께 정면에서 희미한 검은 안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님이 찾아온 것을 인지한 여인은 살며시 눈을 떴다.

[7년 전보단, 훨씬 좋아진 얼굴이네?]

“…….”

[회복은 딱히 문제없이 한 것 같아 다행이네. 주인이 좋은 거 많이 먹여줬나 봐?]

케이람의 비아냥에도 그녀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인간들도 참 갈수록 교활해지고 있지? 도무지 포기라는 걸 몰라요. 우리로선 상상도 못 할 일들을 이렇게 따박따박 하는 걸 보면…….]

“기회를 주겠다 케이람.”

줄곧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듀란다르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네 주인의 영혼을 이 자리에서 먹어 치우고 그 몸을 차지해라.”

[아직 잠에서 덜 깨셨나? 그건 또 무슨 개떡 같은 소리래?]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느냐? 그저 억눌러있던 네 본성을 깨우기만 하면 돼. 그렇게 계승자의 몸을 차지하게 되면, 다음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듀란다르크는 확고한 의사를 표명했다.

[우리 지고하신 성검님께서 이렇게 상황 판단을 못 하는 분이었던가? 너 설마 지금 이 상황이 네쪽으로 역전됐다고 보는 거니?]

“너도 알지 않느냐? 이렇게 내 주인과 네 주인이 맞붙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를. 이 세상을 또 한 번 갈아치워야 할지도 모른다.”

[…….]

“잘 생각해라 케이람. 무엇이 네게 더 이로운 일일지.”

사뭇 진지한 제안에 케이람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시선을 잠시 옆으로 돌림, 아주 살짝, 아주 살짝은 고민하는 듯 싶었지만,

[싫어.]

그녀는 세상 단호한 어조로 듀란다르크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유가 무엇이냐?”

[내가 싫으니까.]

매우 간단하면서도 단순한 답변에 듀란다르크는 말문이 막혔다.

[세상을 또 한 번 갈아치울지도 모른다고? 그런 흥분되는 앞날을 내가 거부할 리 있겠어? 내가 말했잖아. 우리 하던 대로 하자고.]

슬그머니 발을 뗀 케이람은 듀란다르크를 향해 점점 더 다가갔다.

[더 저항하고! 더 발악해! 너와 네 주인이 그렇게 발버둥 칠수록…….]

“…….”

[나와 내 주인은 더 희열을 느낄 테니까!]

“예나, 지금이나 너희 족속들은 변하지 않는구나.”

듀란다르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결국, 너와 난 이 땅에서 공존할 수 없는 존재겠지. 너도, 네 계승자도, 너희의 근원인 그 추방자까지! 더 이상 이 땅에 온전히 존재할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두 여인은 현재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주인이 승리한다.’

자신들을 제어하고 다스리는 소유주가 이 싸움에서 승리해 상대를 굴복시킬 거란 굳은 믿음이, 누가 우세랄 것도 없이 두 여인의 마음속에서 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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