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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작가의 막내도련님은 암살자-226화 (226/325)

제226화. 개편의 날 (5)

때는 2년 전,

가람 왕국 동남부 첩첩산중의 한가운데, 지하에 자리한 어느 유적.

루나브는 먼지 쌓인 책장 속 덩그러니 놓인 한 권의 책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신의 교서라고 하는 거창한 수식어가 붙은 것과 다르게, 보관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살며시 들어 책에 쌓인 먼지를 털고 마침내 안을 펼치니,

곧 오색의 광채가 천장으로 솟구치며 그녀를 반겨주듯 밝혀주었다.

“많이 자랐네 꼬마 숙녀님? 이젠 그냥 숙녀님이라고 해도 되겠어?”

귀를 간질이는 넉살스러운 목소리에 루나브는 덤덤히 고개를 돌렸다.

책장 위에 앉아 손에 턱을 받치며 능글맞은 눈웃음을 짓고 있는 한 남성.

마서 레미하람의 영혼이었다.

5년 전 노델리 유적에서 첫 만남 후 두 번째 만남이었으며, 분위기 또한 전혀 달라지지 않은 그대로였다.

“약속 잊지 않으셨죠?”

“응? 무슨 약속?”

“레미하람님을 찾으라고 하셨잖아요. 찾기만 하면 제 소망을 이루어주신다고.”

“뭘 그리 서두르고 있어? 서로 안부 인사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기야?”

“…….”

루나브는 뭐가 문제냐는 듯 무심한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여전하네. 우리 숙녀님.”

변하지 않은 모습에 힘이 빠진 듯, 레미하람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난 어떻게 찾은 거야? 쉽진 않았을 텐데?”

“맞아요. 쉽진 않았어요. 인생이란 게 뭐든 계획대로 이루어지진 않더라고요.”

루나브는 도도하게 팔짱을 끼며 그동안의 과정을 설명했다.

“가람, 우시프, 스파니아 세 나라를 비롯해 대륙에 있는 모든 책과 자료를 다 취합해서 레미하람님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추려냈어요. 대부분 존재할 가능성이 1%도 채 넘지 않을 만큼 희박한 곳들이었지만…….”

“그래? 몇 곳이나 됐는데?”

“전부 다 합치면 742곳이요.”

순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레미하람은 고개를 갸웃했다.

“거, 거기를 전부 돌아본 거야?”

“다 돌아볼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운이 좋았나 봐요. 정확히 100번째 장소에서 레미하람님을 찾았거든요. 우연이 잘 따랐다고 봐야겠죠.”

할 말이 싹 사라져버린 레미하람은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레미하람님만 계셨던 건 아닌가 봐요? 저쪽 방에선 빛의 마력도 느껴지던데…….”

“어 맞아. 원래 빛과 어둠은 공존하는 법이거든. 나랑 다르게 아직 세상 밖에서 활개 치고 있는 놈이 있던 곳이지.”

대답과 함께 레미하람은 책장 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곤 터벅터벅 루나브의 앞으로 다가가 얼굴을 내밀며 물었다.

“신의 마법 교서를 다룬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야. 평범한 인간의 뇌로는 내가 가진 지식을 못 받아들일 수도 있어.”

“그래요? 그럼 전 레미하람님이 보시기엔 어떤가요?”

레미하람은 말을 하다 말고 머리를 긁적였다.

“와. 숙녀님 대체 5년 동안 무슨 짓을 한 거야?”

“…….”

“이건 뭐, 오히려 내가 더 영광스러워질 정도네. 나도 인생 오래 살았지만, 숙녀님 같은 사람은 진짜 처음 본다.”

루나브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덤덤하게 눈만 깜빡였다.

“자 그럼 마서의 영혼으로서, 마서의 주인이 되는 자에게 하나 묻지.”

급 목소리를 바꾼 레미하람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진리를 추구하려 하는 그대여! 그대는 나를 통해서 바꾸고자 하는 미래가 있나?”

“제 미래는 이미 예전에 바뀌었어요.”

루나브는 일 초의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했다.

“그러니, 그 바뀐 미래를 방해하려는 자들을 모조리 없애고 싶을 뿐이죠.”

루나브는 펼쳐냈던 마서의 안을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빈 백지.

허나 그녀의 것이 되었음을 증명하듯, 빈 종이 위로 한 문장이 저절로 적히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뒤바뀌었던 미래.

더 나아가 반드시 지켜야 할 미래였다.

<시안과 함께.>

“그게 설사 신이라 할지라도…….”

* * *

“아카데미에 있을 때부터 눈여겨보긴 했습니다. 대현자 리겐스 레인리버의 손녀이자, 수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 마법 소녀……. 그래도 설마 당신이 저와 같은 신의 마법 교서를 소유하게 될 줄은 몰랐군요.”

보리스는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솔직한 감정을 표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시안 선배를 제외하고선 제가 마력을 확인할 수 없었던 유일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으니까요. 시안 선배로부턴 호기심을 느낀 반면, 당신에게선 이유 모를 거부감이 느껴졌었죠.”

루나브 역시 그를 따라 속마음을 드러냈다.

“뭔가 저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군요. 전 성서에 밝히는 평화의 미래를 추구하고 그것을 이행하려는 자. 이 세상에 혼란이 벌어지는 일은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글쎄요? 당신이 추구한다는 미래가 딱히 시안 선배나 저에게 좋아 보이진 않던데? 전 그런 미래 따위 별로 원하지 않거든요?”

-기이잉

이윽고 루나브가 쥔 마서에서 빛이 일어났다.

“어쩌시려는 겁니까?”

“당신도 결국 저와 같은 마법사. 전 그 마법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요.”

보리스의 얼굴이 순간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긴 시간을 들여 세워둔 가설과 계획이 한순간에 어긋나고, 대비책마저 하나도 남지 않고 산산이 부서지는 것. 그거야말로 당신 같은 사람들이 가장 크게 무너지는 순간이죠…….”

-쩌적

곧 마서의 힘에 반응한 아공간의 일부에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 지금부터 당신이 만든 이 아공간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킬 거예요.”

루나브는 눈에 독사를 품은 듯 맹렬한 독기를 뿜어내며 당당히 말했다.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리해서 당신에게 남는 게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저한테 남는 게 없을지 몰라도, 선배한텐 남는 게 있겠죠.”

“……!?”

“그거면 충분해요.”

급 말문이 막힌 보리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도, 이내 고개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었다.

“정말 엄청난 집착이로군요. 천재의 집착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고 했는데, 정말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 또한 성서의 다른 페이지를 펼치며, 그 힘을 발휘했다.

“허나 그 집착이 때로는 자신에게도 해가 되는 법이지요. 실패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 무엇이든 가능할 거란 착각에 빠지는 겁니다. 전 그런 자들을 여태껏 많이 봐왔지요.”

그러자 공간의 생겼던 균열이 빛으로 다시 메꿔지면서, 점차 원래의 형태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성서의 미래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것이 설사 마서의 힘이라 할지라도…….”

하나의 공간을 없애기 위해 각자의 힘을 발현하는 두 개의 교서.

두 마법사는 한 치의 물러섬이나 망설임 없이, 이미 서로를 무너뜨리기 위해 자신을 모든 것을 끌어낼 결의마저 단행한 상태였다.

* * *

[보살펴준 은혜도 모르고 나를 뭐 어째? 이런 뼈를 갈아다가 핏물에 섞어서 들이부어도 시원찮을……!]

사방에 고성을 지르며 온갖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케이람.

그녀는 거리를 벌린 미아를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손과 눈을 날카롭게 치켜세우고 있었다.

“야 오랜만이다?”

그건 그녀를 보며 넌지시 한마디를 던져봤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저 뻔하디뻔한 얼굴을 봐라.

안 들은 게 아닌, 엄연히 못 들은 척하는 거다.

“멋대로 잠적한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주인의 말도 무시하실 생각이신가요 마검님?”

[어머! 이게 누구야? 정에 취해서 황녀도 못 죽이고 그냥 방생한 암살자님 아니세요? 그 부끄러운 낯짝을 누구한테 들이대실까?]

허를 찌르는 기습공격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자는 척하면서도 다 보고 있었다 이거지?

이런 간사하고도 요망한…….

순간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넌 도대체 나를 뭐로 보는 거야?]

“뭐?”

[나랑 똑같다 못해 소름 끼치는 기운을 저리 폴폴 피우는 복제품이 활개 치고 다니는 동안 대체 뭐 하고 있었던 거냐고!]

이 마검이 보자 보자 하니깐 진짜 막 나가네?

지금 성을 내야 하는 게 누군지 구별이 안 되는 건가?

“케이람님이야 말로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요.”

여태 일그러진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던 당주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이전에 말씀드렸을 텐데요? 케이람님의 비밀을 발설할 생각은 없지만, 그것이 계승자에게 해가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거라고!”

[넌 입 안 닥쳐? 나 잠든 상태라고 아주 제대로 날뛰었더라? 끓어오르는 투기(鬪氣)를 주체 못 한 것 같던데, 내가 대신 해소해줄까?]

절대로 붙이지 말아야 할 두 여자가 또 붙어버렸다.

이에 동반되는 스트레스는 전부 나의 몫.

급 두통이 밀려온 나머지 이마를 부여잡았다.

“거 의미 없는 싸움 그만하시고 아무나 설명 좀 해보시죠.”

두 여인의 시선이 다시 내 쪽으로 향했다.

“쟤 뭡니까?”

저 미아 하펜커스라고 하는 여자에 관해, 내가 모르는 사실을 이 둘은 알고 있다.

이미 눈치도 다 깐 마당에 설마 부정은 안 하겠지.

먼저 입을 연 건 당주였다.

“하펜커스는 구시대 아에르님을 추종했던 혈족이다. 네가 일전에 내게 보여줬던 교서의 저자 디오 하펜커스는 그 혈족의 수장이자, 마검의 전 주인이었지. 아에르님께 직접 들었던 사실이니, 그 누구도 부정할 순 없을 거야,”

딴 건 몰라도 거짓말은 안 하는 신이니, 확실하겠지.

“왜 처음엔 말 안 해주신 겁니까?”

“당시 케이람님께서 워낙 부정적인 눈초리로 날 노려보셔서 말이지. 내가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단다.”

당주는 보기 드문 능글맞은 눈빛으로 지그시 케이람을 쳐다보았다.

“추가로 말하자면, 저 아이는 우리가 한때 계승자로 주목했던 아이야.”

호, 이건 또 무슨 흥미로운 이야기일까?

“현재 이 대륙에서 하펜커스의 피를 이어받은 유일한 아이인 만큼, 훗날 검은 안개와 더불어 마검의 힘을 누구보다 잘 다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뭐 지금에 와선 너로 인해 전부 틀어졌다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구나.”

“그럼 저 검은 뭡니까?”

나는 눈빛으로 미아의 손에 쥔 또 하나의 마검을 가리키며 물었다.

“복제된 힘이겠지. 그래서 물었던 거야. 저 아이 앞에서 마검을 쓴 적이 있냐고. 아마 네가 썼던 마검의 흔적을 바탕으로 마법을 통해 새로이 창조된 것이 아닐까 싶구나.”

그게 가능할 정도의 힘이라면,

“성서의 힘으로 말입니까?”

“그것 말고는 설명되는 게 없겠지.”

굳이 놀랄 것도 없다.

성검의 힘도 남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는 마당에 복제라고 못 할까?

결국, 저 여자는 나라는 존재를 없애기 위해, 놈들에 의해 만들어진 인형이자 복제품.

참 놈들다운 짓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시선을 자연스레 케이람에게 돌렸다.

[뭐?]

케이람은 쌍심지를 켜며 반문했지만, 나는 돌리지 않고 쭉 그녀를 쭉 바라보았다.

알아서 설명하란 의미였다.

그녀는 불쾌한 듯 혀를 차다가도 나를 또렷이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맞아! 맞다고! 디오 그 자식은 내 전 주인이야!]

이 한 마디를 못 해서 여태 내 앞에서 모습을 감췄을 린 없다.

[내 전 주인인 동시에 내가 먹어치운 놈이야! 그 같잖은 영혼을 취해서 내가 마음대로 조종했던 놈이라고! 이제 됐냐!]

속에 담아둔 울분을 전부 뱉기라도 한 듯, 말을 마친 그녀는 분을 식식 삭이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그래 뭐, 그래서 나한테 감추려고 했다 이건가?

흠.

난 또 뭐라고.

마음속으로 했던 말을 그대로 드러내니, 케이람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그게 뭐 대수로운 거라고. 그거 니 본성이잖아. 나도 몇 번이고 먹어 치우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

[…….]

케이람은 대답하지 못해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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