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각자의 플랜 (1)
황궁 지하, 쉘터 옆 비밀 공간.
“오셨습니까?”
아무 거리낌 없이 문을 열자, 먼저 도착해있던 보리스가 맞이해주었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아린 황녀님께서 납치당하셨다지요?”
“어째 예상한 일이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에쉘은 그를 떠보기라도 하려는 듯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보리스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이를 무마시켰다.
“비올렛 황녀님은 잘 달래주셨는지요?”
“그대가 아린 황녀님께 보낸 서신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묶이고 올 뻔했습니다.”
에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당시의 감흥을 표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무엇을 먼저 들으시겠습니까?”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으니 나쁜 소식부터 듣기로 하죠.”
“감금했었던 켈린이 암살당했습니다.”
보리스는 주저할 것 없이 바로 소식을 전했다.
“에쉘님의 사랑스러운 동생분께서 여길 찾아왔던 모양입니다.”
에쉘의 얼굴이 급 차갑게 얼어붙었다.
“시안이 황궁에 왔단 말입니까?”
“예상 못했던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언제든 벌어질 수 있었던 일입니다. 이 공간을 어찌 알았는지는 몰라도, 회담이 한참 진행 중일 때 왔다 간 것 같습니다.”
에쉘은 말없이 애먼 입술만 움찔거렸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 이 주변엔 그의 기운이 느껴지진 않으니까요.”
“좋은 소식은 뭡니까?”
보리스는 기다렸다는 듯, 한 손에서 어떤 미지의 기운을 발현해냈다.
“……!”
기운의 정체를 인지한 에쉘의 입엔 다시 미소가 드리워졌다.
“마검의 기운을 얻은 겁니까?”
“잘려 나간 켈린의 사체로부터 채취한 겁니다. 가장 필요했지만, 구하기 가장 어려웠던 것이었는데, 이리 손쉽게 구하게 되었으니, 저희로선 마냥 손해라 할 수 없지요.”
“시안이 뭔가를 눈치챘을 가능성은 없는 겁니까?”
“수상함은 느꼈을지언정 그 수상함의 진위까지 판별하진 못했을 겁니다. 애초에 그걸 아는 사람은 이 황궁에 에쉘님과 저를 포함해서 셋밖에 없습니다.”
보리스는 전혀 문제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적용화 할 순 있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처음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이에 에쉘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정말 보리스 당신이 갖춘 능력은 두고두고 감탄하게 되는군요.”
그렇게 두 남자의 은밀하고도 달콤한 웃음소리가 널리 퍼지려는 순간,
공간의 방문이 벌컥 열리며 한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황녀님?”
비올렛이었다.
다급히 뛰어온 듯 연신 땀을 흘리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왔어요…….”
그녀는 아무런 서두 없이 다짜고짜 왔다는 말을 내뱉었다.
“누가 말입니까?”
“시안 베르트!”
이내 한 남자의 이름이 괴성과 함께 뱉어지니, 돌연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당신의 동생이 내 방에 왔다고요!”
비올렛은 온갖 부정이 뒤섞인 절규에 찬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 * *
“분명 수상쩍은 어둠 속성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긴 합니다만…….”
비올렛 본인의 요청에 따라 탐지 마법을 통해 그녀의 몸속을 훑어보았지만,
“그게 끝입니다. 딱히 이렇다 할 마법의 흔적은 없습니다.”
보리스는 멀쩡한 상태와 다를 바가 없다며 단번에 일축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자가 괴상한 기운을 생성해서 내 입안에 욱여넣었어요! 엄청 고통스러웠다니까요!”
“아마 기존에 흐르고 있던 황녀님의 빛 속성 마나와 충돌이 일어나서 그렇게 느껴진 걸 겁니다. 서로 상반된 속성이 부딪히면 당연히 거부반응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이에 자연스레 고통으로 연결된 것이죠.”
“단순히 마나만 들어온 게 아니라니까요! 그것 말고도 다른 게……!”
“정말 시안이 황녀님 방에 다녀갔습니까?”
펄쩍 뛰던 비올렛의 시선이 돌연 차갑게 굳으며 에쉘에게 돌아갔다.
“뭐에요 그 질문은? 내가 지금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예요?”
“그게 아닙니다. 전 단지….”
-끼익
분위기가 다소 심각하게 고조되려는 찰나,
대뜸 방문이 열리며 짧은 흑발의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주변을 보다가 나직이 물었다.
“나중에 올까요?”
“아닙니다. 어서 들어오시죠. 미아.”
보리스는 그녀를 직접 맞이해 안으로 들였다.
그 모습을 본 비올렛은 기가 찬 나머지 헛웃음을 남발했다.
“지금 나보다 그 굴러들어온 여자를 더 챙기는 건가요?”
뭐라 몇 마디를 더 하려던 보리스는 그저 에쉘만 지그시 한 번 쳐다보고선 고개를 돌렸다.
에쉘은 슬그머니 비올렛에게 다가가 그녀의 양어깨를 잡고선 부드럽게 속삭였다.
“지금은 저희가 좀 바빠서 말입니다. 제가 나중에 따로 방에 찾아갈 터이니, 이만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황녀님?”
“에쉘!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그리 심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황녀님께선 그저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가만히 계시다 보면 전부 해결되어 있을 것입니다.”
에쉘은 그 말을 끝으로 비올렛을 방 밖으로 보냈다.
문전박대를 당한 비올렛은 치욕스러운 마음에 문 앞에 서서 이를 갈았다.
“가만히 있으라고요? 절대 그럴 수 없죠. 난 당신의 사람이지, 인형이 아니야!”
몸을 돌린 비올렛은 이어진 복도를 성큼성큼 나아갔다.
이윽고 지상에 오른 그녀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황제의 방.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린 황녀가 미스트에게 납치되었다는 사실이 황궁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 * *
이른 새벽부터 기사들로 가득 메워진 세벨리너스의 거리.
기사들은 평민이든, 귀족이든 상관없이 지나다니는 모든 이들로부터 검문을 진행했다.
이는 근 몇 년 만에 떨어진 황제의 직속 명령이었으며, 거부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를 보인다면, 어떤 절차를 당하게 될지 모르기에.
사람들의 얼굴엔 저마다 긴장과 불안함이 역력해 있었다.
“루, 루나브님! 지금이라도 황성을 벗어나는 게 어떻겠습니까?”
“시안 선배가 경고도 해줬던 마당에 딱히 예상 못한 일도 아니잖아요? 스케일이 꽤 크긴 해도, 전 아직 부족하단 생각이 드네요.”
루나브는 한결같은 무심한 어조로 슈르츠의 걱정을 무마시켰다.
현재 둘이 위치한 곳은 세벨리너스의 중심부로부터 조금 떨어진 골목 어딘가.
거리는 그야말로 심각함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지만, 루나브는 그 광경을 못내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전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의 경고를 무시하면서까지 저희가 여기에 올 필요가 있었는지?”
“어떻게 안 오겠어요? 그렇게 뭔가를 대놓고 저지를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시안은 분명 황성에 오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그 말을 따를 루나브가 아니었다.
“들키지만 않으면 돼요. 보는 눈만 없으면 우린 그냥 없는 사람들에 불과하니까.”
아주 명쾌하다 못해 기가 찰 대답이었다.
슈르츠는 답답한 마음에 이마를 부여잡으며 고개만 저었다.
자신이 잘못 따라온 건 아닌지, 못내 후회의 마음마저 들고 있었다.
“아린 황녀 아니, 아린 선배를 납치한 이들이 정말 미스트라면, 굳이 암살이 아닌 납치라는 번거로운 짓을 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네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동안 미스트가 죽여온 암살 대상들을 살펴봤을 때, 아린 선배는 그 기준에 전혀 부합되지 않아요.”
그건 슈르츠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아린 황녀의 평판은 제국만이 아닌, 타왕국 및 떠돌이 용병들 귀에도 퍼져있을 만큼 매우 유명했다.
물론 긍정적인 면에서였다.
주기적인 제국 순방을 통한 자선 활동을 비롯해,
수시로 빈민가를 방문해 그곳 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등,
일각에서 황제가 되어달라는 목소리도 나올 만큼 명성이 자자한 그녀이거늘,
부패 및 악행을 일삼는 귀족들을 상대로 암살을 감행하는 미스트의 지정 대상이라 하기엔 상당 부분이 맞지 않았다.
“뭔가 이용하고자 하는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겠네요.”
“그 시안님께서 하신 일일까요?”
“아니요. 시안 선배가 하진 않았을 거예요. 어쩌면 이번 일엔 관련조차 없을 수도 있죠.”
“어찌 그리 생각하시는지?”
“감으로요.”
이 역시 명쾌하고도 기가 막힌 대답이었다.
입술을 어루만지며 곰곰이 고민하던 루나브는 급기야 눈을 감고선 명상에 들어갔다.
“…….”
그러곤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살짝 괴이함을 느낀 슈르츠가 한 발짝 물러나려던 순간,
“쉽진 않겠지만, 못 해볼 것도 없겠죠.”
루나브는 의미 불명한 말과 함께 대뜸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번 건 혼잣말이라기보단, 누군가와 대화를 한 듯한 말투였다.
이내 손에서 마나를 발현하는가 싶더니, 글을 쓰듯 바닥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내심 황성을 탈출하기 위한 공간 전이 마법이라도 쓰나 기대했지만,
“……!”
그게 아니었다.
나름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나 할까?
아직 정체가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나마 작은 추측이라도 해보자면,
그녀는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땅 위에 존재하는 현실의 공간이 아닌, 뭔가 거대한 마나 구체의 내부처럼 생긴 무척이나 비현실적인 공간이었다.
실로 기이한 광경에 슈르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루, 루나브님 지금 무엇을?”
“생각을 해봤어요. 황녀를 전날 밤에 납치했다면 적어도 지금쯤은 황성을 벗어나야 했을 텐데, 정황상 그러진 못했을 거란 말이죠? 그렇다면 이 황성 어딘가에 그녀를 숨겼다는 게 될 텐데, 황성을 쥐잡듯이 뒤질 것 같은 지금 상황에선 그마저도 얼마 못 갈 테고…….”
이윽고 준비를 마친 루나브는 자리에서 덤덤히 일어났다.
“그렇다면 현실의 공간이 아닌, 전혀 다른 새로운 공간에 그녀를 숨겼을 가능성이 있겠죠. 예를 들면 신의 아공간 같은…….”
그녀의 앞엔 흑백의 빛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미지의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공간에선 어서 들어오라는 듯 반짝이는 오라를 내뿜고 있었다.
“그 공간을 찾기만 한다면, 아린 선배가 있는 곳도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슈르츠가 공간의 안을 넋 놓고 바라보는 사이.
루나브는 몰래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슬그머니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곤 당당히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기, 기다려주십시오 루나브님!”
슈르츠 역시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웬만한 도서관 저리 가라 할 만큼의 책과 책장들로 가득했다.
루나브는 마치 그 도서관의 사서인 것처럼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금부터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짧게는 몇 시간이 될 수 있고 길게는 며칠이 될 수도 있죠. 심심하시면 아무 책이나 꺼내서 읽고 계세요. 아마 내용을 이해하시는 건 힘들겠지만.”
“루나브님께선 뭘 하시려는 겁니까?”
“전 지금부터 안개의 아공간을 찾을 거예요. 이 근방의 모든 기운이란 기운은 찾아보고 해석해서 길을 만들어야 하니, 웬만하면 건들지 말아주세요.”
루나브는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고선 다시 명상에 돌입했다.
아직도 모든 것이 얼떨떨한 슈르츠로선 그저 눈만 멀뚱거릴 뿐이었다.
그러다 그냥 잠자코 기다리는 것이 낫겠다 싶어, 그 또한 자리를 만들고 앉으려는 순간,
“……!”
눈 감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눈을 뜬 루나브가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그녀는 또 한 번 손에서 마나를 발현해 허공의 원을 그렸다.
-기이잉
잠시 후, 처음 들어왔을 때와 유사한 또 다른 공간이 만들어지니, 루나브는 일 초의 망설임 없이 바로 그 안에 몸을 던졌다.
슈르츠 또한 황급히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그렇게 도착한 또 다른 곳.
어딘가 낯설지 않게 검은 안개가 드리워진 음침한 공간이었다.
공교롭게도 그곳엔 둘 이외에도 먼저 온 누군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
서로는 서로를 보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저마다 저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딱히 경계하진 않았다.
“당신들이 왜 여기 있는 거죠?”
“그건 저희가 여쭤볼 말입니다만…….”
하스티아와 브라이언.
로랑드에서 마주쳤던 시안의 동행인들이 눈앞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