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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작가의 막내도련님은 암살자-215화 (215/325)

제215화. 새로운 질서를 위해 (1)

2황녀 비올렛 세벨러스의 이름으로 각 귀족 가문에 보내진 황실의 공문.

공문을 확인한 귀족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근심이 가득했다.

겉으론 기사단 개편과 제국의 방향성을 논의하기 위한 회담에 참석해달라는 단순한 요청처럼 보여도, 속에 담긴 진의는 절대 단순하지 않았다.

빛의 기사단.

신의 이름을 대신하여 악을 토벌하는 성스러운 기사들이 모인 집단.

신분에 상관없이 무(武)와 마법에 재능만 있다면 누구든지 될 수 있으며, 때로는 귀족의 작위보다 더 높은 영광 가질 만큼,

빛이라는 이름이 가진 가치는 실로 중대했다.

그 기사단이 개편을 한다?

애초에 빛의 기사단이 고위 귀족 가의 자식들조차 어려서부터 입단을 꿈꿀 만큼 명성이 있는 이유가 뭐겠는가?

신의 사자, 성녀의 은총을 받으며 빛의 신 루멘델이 내린 임무를 수행한다는 영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지금 빛의 기사단엔 성녀가 없다.

기사단의 상징과도 같은 정신적 맹주가 죽어버린 상황.

그런 성녀가 없는 기사단을 황실의 주도하에 개편하겠다는데,

이것이 뭘 뜻하는지 모를 귀족은 없었다.

황실은 구원의 기사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통해, 기사단에 소속된 상급 기사들을 전부 황실 세력에 포함하겠다는 일종의 선포를 한 것이다.

이에 귀족들은 생각했다.

가기 싫다고.

하지만 안 갈 수가 없다고.

황좌 계승이 유력했던 1황자 루이넬은 몰락했고, 디오네 황제는 이미 정무엔 손조차 못 댈 만큼, 병약한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그런 언제 휘몰아칠지 모르는 비바람의 중심에서 2황녀 비올렛이 소용돌이를 일으킨 것이다.

이런 상황에 회담에 참석하지 않는 건,

급변하는 제국의 질서에 따르지 않겠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었다.

그런 귀족들의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아는 황실로선,

입가에 웃음 말고는 그려지는 것이 없었다.

황궁 그레이트 체임버 중앙 2황녀의 집무실.

원형의 탁자를 두고 4명의 남녀가 각각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아있다.

비올렛, 에쉘, 보리스, 그리고 아린이었다.

문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보리스가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공문을 보낸 20개의 가문 중 참석하겠다는 답신을 보낸 곳은 총 18곳입니다. 두 곳에선 아직 답신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딘가요?”

“쿤델 공작가, 그리고 베르트 공작가입니다.”

비올렛과 에쉘은 동시에 쓴웃음을 지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과 관련 있는 가문이었다.

“저희 외할아버지의 입김이 작용한 모양이네요. 작위를 넘기신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건만, 도무지 가문의 일에서 손을 못 떼시네요.”

비올렛은 탄식을 내뱉다가도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이번 일이 전(前) 가주인 외조부 쿤델 퀴젤의 영향력이 작용했음을 확신했다.

왜냐면 그녀의 외삼촌이자 현 가주인 피를로 퀴젤에겐 그만한 배짱이 없었기 때문이다.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저 다른 가문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지켜보려는 마음에 그러시는 걸 테니. 아마 머지않아 참석한다는 답신을 보낼 거예요.”

비올렛의 시선은 곧 마주 앉은 에쉘에게 향했다.

“에쉘 공은 어떤가요? 아직 베르트 공작님께선 이 일을 별로 달갑게 보시진 않은 것 같은데?”

“워낙 일이 바쁘신 분이다 보니, 아직 확인을 못 하신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제가 베르트 공작가를 대신하여 승인 처리하겠습니다. 아버님께는 나중에 잘 말씀드리도록 하죠.”

“……?”

아린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사실 황성을 포함해, 제국에서 가장 많은 빛의 기사들이 배치된 곳이 바로 전선 벨리아스 아니던가?

그 수많은 기사를 통솔하고 지휘하는 이가 바로 베르트 공작이며, 마음만 먹으면 본인의 지시대로 이끌 능력마저 가진 사람이거늘,

일단 일을 진행하고 나중에 잘 말씀드리는 것으로 해결하겠다고?

아무리 베르트 가문의 장남이라 해도, 아린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허나 그녀와 다르게 비올렛과 보리스는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아린 또한 일단은 잠자코 있기로 했다.

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으며, 에쉘과 비올렛은 바로 방을 나갔다.

개의치 않고 서류를 정리하는 아린에게 보리스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린 황녀님?”

“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다른 전할 사실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것보단, 최근 황녀님께서 성검의 힘을 쓰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린은 속으로 움찔했지만, 내색 없이 바로 말을 이었다.

“티 났나요?”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빛의 마력이 황녀님으로부터 느껴졌습니다. 모른 척할까 했지만,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더군요. 어쩌다 성검의 힘을 발휘하신 겁니까?”

“그냥 그날따라 마음이 싱숭생숭하더라고요. 그래서 제 능력을 파악해보고자 연습 삼아 발휘해봤어요. 결과는 뭐, 말씀드리기 부끄러운 수준이었고요.”

“하하. 그러셨군요. 너무 실망하실 필요 없습니다. 성녀님이라면 분명 머지않아 성검의 힘을 올바르게 이끌어 낼 수 있을 테니까요.”

“항상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찌어찌 잘 넘긴 느낌.

더 물을 것도 없어 보이니, 이대로 넘어가면 아무 문제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린은 그러지 않았다.

오늘따라 자신도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서였다.

“보리스님께선, 지금의 저희가 안개의 존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마검의 주인 말입니까?”

보리스는 돌릴 것 없이 바로 시안을 언급했다.

“사실 아직은 힘들다고 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힘을 저희는 모르고 있으니까요.”

아린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그는 현재의 상황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니 어린 황녀님 같은 분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빛의 힘은 믿음과 결속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만 되면 안개의 존재를 물리치는 것 또한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믿음과 결속.

그것이 바로 빛의 힘을 증대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 했다.

허나 지금 아린의 마음속엔,

밝은 빛을 향한 강한 믿음이 아닌,

어두운 안개를 향한 의문이 더 앞서고 있었다.

“보리스님께서 제게 주셨던 그 교서는…….”

“…….”

“대체 어떻게 구하신 건가요? 보리스님께서 직접 쓰신 자서는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보리스는 대답을 잇는 대신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제 둘도 없는 소중한 벗이 남긴 유산, 이라고 설명을 드리면 될까요?”

“소중한 친구요?”

“예. 그 누구보다 서로에게 흥미를 가지고, 서로를 굴복시키려 했던, 아주 끈끈한 연이 있는 친구입니다. 더불어…….”

“네?”

“아닙니다.”

“지금은 그 정도로만 알고 계셔주면 감사하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전부 말씀드리도록 하죠.”

“아, 알겠어요.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뭔가 미심쩍은 것이 많았지만, 더 물으면 의심을 살 수 있기에,

아린은 그 길로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보리스는 방 중앙에 우두커니 서서, 감출 수 없는 웃음을 킥킥 날리며 조용히 읊조렸다.

“마검의 전 주인이기도 하죠…….”

* * *

제국의 서쪽 경계 벨리아스 전선의 후방 캠프.

황실의 공문을 읽던 베르트 공작은 이내 고개를 들어, 공문을 전달한 율켄을 보며 물었다.

“기사들의 분위기는 어떻던가?”

“크게 동요하진 않아도, 아예 신경을 안 쓴다고 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대륙을 지키는 사명이 더 중요하다고 한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소속 집단의 본분이 바뀐다고 하는데, 이를 잠자코 넘길 수 있는 기사는 없을 것이다.

“자네는 어떠한가?”

“무, 무슨 말씀이신지?”

“기사단 개편이 뭘 의미하는지 자네라면 충분히 알지 않은가? 난 빛의 기사단이 아니야. 그저 자네들을 통솔하기 위해 있는 지도자일 뿐이지. 이번 개편으로 인해 자네들이 따라야 할 방향이 바뀔지도 모르는데, 그런 와중에도 계속 날 따를 수 있냐는 걸세.”

“신 율켄 다리우스! 공작님께서 가시는 곳이 마계의 끝자락이라 한들, 전 끝까지 공작님을 따를 것입니다!”

율켄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저희가 비록 빛의 가호를 신의 임무를 수행한다고 해도, 저를 비롯한 전선의 기사들은 수십 년 동안 공작님을 모셔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공작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저희에게 명을 내릴 수 없습니다!”

“내 그래도, 인생을 잘 못 산 건 같진 않군.”

베르트 공작은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론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제국의 다른 귀족들은 회담에 참석하겠다는 답신을 보낸 것 같습니다. 공작님께선 어찌하실 생각이신지?”

“난 황제 폐하의 명 외엔 그 누구의 명도 따르지 않네. 하물며 황녀가 보낸 공문을 따를 리는 만무하지.”

“허나 황성엔 지금 첫째 도련님이…….”

에쉘에 대한 말을 이으려던 율켄은 공작의 눈치를 살피고선 급히 삼켰다.

허나 공작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덤덤한 눈빛으로 말했다.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보기로 하지. 나 하나 가지 않는다고 해서, 회담이 진행되지 않을 것도 아니니. 지금은 기사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그 부분에만 좀 더 신경을 써주게.”

“공작님의 명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명을 받은 율켄은 바로 막사를 나갔다.

공작 역시 막사 밖으로 나와 오늘따라 유난히 더 붉은 전선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희를 놔주십시오.’

그토록 바라는 대륙의 평화를 자식들이 이루어주길 원한다면 자기들을 놔달라.

7년 전, 사라진 막내에게서 들었던 그 말이 머릿속에서 아련하게 울리고 있었다.

신뢰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 할 수 있는 거라곤, 방관자의 시선에서 현재의 흐름을 바라보는 것뿐.

“넌 뭘 하려는 것이냐 시안?”

공작은 마음은 그야말로 신뢰가 아닌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

제국 귀족들에게 황실의 공문이 보내진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

답신을 보낸 귀족들의 행렬이 하나둘 황성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치장 같은 사치스러운 행위로 자신을 꾸민 귀족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저마다 분대급 이상의 호위 병력이 줄을 이었으며, 그로 인해 황성엔 엄숙함과 긴장감이 웃돌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하게 된 황성 내 고위 회담장.

회담에 참석한 귀족들은 긴장된 얼굴로 서로의 분위기를 확인하기에 바빴다.

일단 이번 회담에 그나마 가장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인을 꼽으라면 단연 두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황제의 전 장인이자, 퀴젤 공작가의 실세인 쿤델 퀴젤과 대륙의 수호자 윌리어스 베르트 공작이었다.

허나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퀴젤 가에선 현 가주인 피를로 퀴젤 공작이 대신 참여했으며, 베르트 공작가의 자리는 공석인 채로 남아있었다.

그렇게 회담 시간이 다가올 무렵.

고요한 분위기가 지속되던 도중, 돌연 회담장의 뒷문이 열리며 금발 미형의 남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베르트 공작가의 장남 에쉘 베르트였다.

그가 여유로운 표정과 함께 빈자리에 덤덤히 앉으니, 귀족들은 전부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

전선 수호를 책임지는 베르트 공작이 직접 회담에 참석한다는 것은 사실상 말이 안 될 터.

결국, 장자를 대리인으로 보냄으로써 황실의 부름에 응한 것이다.

황제의 명도 아닌, 황실의 명을 베르트 공작이 받아들이다니.

다른 귀족들에겐 적잖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벌컥

이윽고 회담장의 앞문이 열리며, 이번 회담을 주최한 황실의 행렬이 안으로 들어왔다.

선두에는 2황녀 비올렛이, 그 뒤에는 5황녀 아린이 자리하고 있었다.

3황자와 4황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누가 이런 상황을 예상이나 했을까?

불안과 초조함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귀족들의 앞으로 비올렛이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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