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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작가의 막내도련님은 암살자-209화 (209/325)

제209화. 황녀와 암살자 (3)

벌써 두 시간째.

하스티아의 똘망똘망한 눈은 좀처럼 소울 스톤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새하얀 백석 주위를 빙빙 도는 검은 안개.

말이 소울 스톤이지, 원래는 그냥 수호석의 의미만 가진 돌멩이에 불과했다.

허나 시안의 손을 거친 순간부터, 이 소울 스톤엔 미지의 힘이 담기게 되었다.

단순히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닌, 진짜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든든한 존재.

마치 또 하나의 시안이 곁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안개가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매우 짙었다.

하스티아는 두 시간 전, 이를 처음 발견한 순간부터 바로 깨달았다.

이것은 분명 힘을 불어넣은 자가 돌 가까이에 있음을 알려주는 일종의 신호라는 것을.

‘시안님은 이곳에 왜 오신 걸까?’

설마 자신을 보러 온 것은 아닐까 하는 헛된 망상도 잠시 해보았지만, 본인이 생각해도 아니었는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분명 그녀가 아닌 무언가 다른 용무가 있어 온 것일 테지만,

소울 스톤을 감싸는 안개로부터 그리 좋지 않은 기운이 느껴져서일까?

그 일이 시안에게 있어 좋은 일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거기에 아린 황녀가 떠오른 것은 덤.

마검의 주인이 있다는 얘길 듣자마자, 그녀는 뭐에 끌리기라도 하듯 바로 자리를 뜨고 말았다.

혹여 그 황녀도 가람 학회의 그 여인처럼, 시안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지.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일어난 하스티아는 조심스레 문 쪽으로 다가갔다.

-끼익

그러곤 살며시 문을 여니, 밖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가르니안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잠이 안 오십니까 하스티아님?”

가르니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하스티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피, 필요한 건 아니고 해주었으면 하는 게 있는데…….’

뭔가 말하기 곤란한 듯, 두 손을 이리저리 비벼댔다.

‘잠시 밖에 좀 같이 나가 줄 수 있을까요?’

* * *

내가 지금 겉으론 무슨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는데, 속은 지금 웃고 있다.

어이없어서 웃냐고?

아니, 그런 것 같진 않다.

어이없는 것보단 약간 환희에 가까운 웃음이다.

인생 두 번 살다 보니, 정말이 기이한 광경도 보는구나 하는 그런 감탄스러운 느낌이랄까?

뭐가 그리 감탄스럽냐고?

저 얼굴을 보고서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답답하고 미련하기 그지없던 저 황녀가 드디어 사람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인격이 들어섰다 해도 믿을 만큼 아주 놀라운 변화다.

그래.

당신은 내게 잘 지냈냐 같은 그런 되도 않는 말을 지껄일 게 아니야.

나란 놈을 원망하고 증오하며 철저히 굴복시키겠단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지만이,

내가 아무런 찝찝함 없이 당신을 죽일 수 있지 않겠는가?

잠시 무뎌졌던 암살자의 혈기가 다시금 내면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기이잉

마나를 발현한 그녀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일렁였다.

7성에 근접한 6성 수준의 마력.

허나 저 나이에 저 정도 경지에 이른 것만 해도 이미 보통이 아니다.

황실에는 저 수준만도 못한 마력을 가진 수호 기사들이 허다하게 널려 있다.

그녀가 준비된 마나를 검에 전승시키니, 구원의 성검 못지않은 빛의 기세가 어두운 밤하늘에 높게 뻗어나갔다.

그러곤 일 초의 망설임 없이 바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챙!

체중을 싣지 않고 오로지 달려오는 속력만을 실은 첫 일격.

검을 휘둘렀다기보단 갖다 대었다고 하는 게 더 옳을 만큼 시원찮은 공격이었다.

하지만,

-챙! 챙! 챙!

그녀는 첫 일격에 이어 위협적인 삼연격을 가했다.

한 방향에서 이루어진 것도 아닌, 좌우를 번 갈며 격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같잖은 힘겨루기가 아닌, 찰나의 틈을 파고든 연속공격.

이것은 검 좀 잡아봤다고 하는 웬만한 검사들에게도 쉽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그렇다고 동작이 부자연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자세, 파지(把持), 힘의 조절 등.

수천수만 번을 반복하던 동작인 것처럼 매우 깔끔하고 자연스러웠다.

한마디로 기본기가 완벽한 움직임이었다.

이런 건 단기간에 훈련한다 해서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최소 몇 년은 하루도 빠짐없이 꾸준한 단련을 이어온 그녀의 노력을 보여주는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깡!

고작 수만 번 검을 휘두른 기본기로 나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방금 전 했던 말은 다 취소해야겠지.

예상치 않게 밀려든 힘에 황녀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도 바로 안색을 고쳤다.

나는 지난 7년간 당신이 해온 노력의 과정 따위를 보겠답시고 이러고 있는 게 아니다.

당신이 끌어낼 수 있는 최고의 힘을 내게 보여야만 할 것이다.

이거 아니면 다른 수가 없을 만큼.

“같잖은 짓 말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라는 얼굴을 하고 있네?”

황녀는 이런 내 속마음을 바로 꿰뚫어냈다.

“그래, 보여줄게. 설사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체내에 깃든 마나를 모두 짜내려는 듯,

그녀의 몸에서 거센 마나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나아가라 했던 네 한 마디에 부응하기 위해서. 내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똑똑히 봐 시안!”

그렇게 발현해낸 마나를 그녀는 모두 검에 전승시켰다.

“……!”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뭐지?

왜 지금 내 눈에 저게 보이는 거지?

마력이 공명하는 검과 그것을 단단하게 움켜쥔 아린 황녀.

그런 황녀의 등 뒤에서,

“빛이 이끄는 곳에 진리가 있나니…….”

반짝이는 빛의 날개가 돋아나고 있었다.

틀림없다.

저것은 이 땅에서 오로지 신의 허락을 받을 단 한 명의 인간만이 쓸 수 있는 성검의 비기, 구원의 심판(Judgment of Salvation).

그걸 왜 성검의 주인도 아닌 아린 황녀가……?

-주르륵

백색 광채가 일렁이는 그녀의 얼굴 위에서 한줄기의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허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힘을 끌어냈다.

저 황녀가 왜 성검의 힘을 쓰게 되었는지는 잠시 제쳐두더라도, 성검이 가진 신의 힘은 보통의 인간이 함부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 역시 케이람을 처음 잡았을 땐, 마검이 가진 본성을 제어하지 못해 상당히 애를 먹었으며, 그건 성검의 주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비록 과거와 비교도 안 될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곤 하나,

지금의 그녀로선 저 힘을 절대 감당할 수 없다.

“크윽…….”

힘이 모이면 모일수록, 그녀의 입에서 더 많은 피가 터져 나왔다.

분명 근육이 찢기고 장기가 파열되는 것 같은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겠지.

그럼에도 저 미련한 황녀는 멈추지 않았다.

저 상태로 뭐 검을 휘두를 수 있긴 해?

휘두르긴커녕 도중에 몸이 터져서 쓰러질 판이다.

근데 진짜 웃긴 게 뭔 줄 아는가?

지금 나를 향해 겨누고 있는 그녀의 검이,

7년 전 나를 심판하겠답시고 있는 힘, 없는 힘 깡그리 끌어모았던 그놈보다 훨씬 더 정교한 힘을 뿜어내고 있단 것이다.

그래, 이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해 달려왔던 당신의 노력이라 이건가?

인정한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황녀가 아니다.

실로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어엿한 황실의 일원.

나라를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그런 유능하다 못해 없어선 안 될 인간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

나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내 몸은 눈 깜짝할 순간에 그녀의 앞에 이르렀다.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릴 지어니…….”

주문과 함께 손에서 생성된 구체를 그대로 그녀의 몸에 갖다 대었다.

무(無) 구체.

나의 마력을 이용해 상대가 부리는 모든 힘과 마법을 무효화 시키는 어둠 속성 고유의 마법.

당신은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해 인간을 넘어선 신의 힘에도 손을 댔지만,

난 그런 힘마저 겨우 마법 하나로 무력화시킬 수 있다.

이건 당신이 인생을 몇 번이나 되돌린다 해도 절대 좁혀지지 않을 불변의 차이.

이윽고 몸 안의 힘이 전부 빠져 나간 황녀의 몸이 축하고 늘어졌다.

“하아…….”

하지만 정신을 잃진 않았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호흡을 유지하는 모습이 참으로 갸륵할 지경.

나는 그런 그녀의 목을 붙잡고선 바닥에 자비 없이 내리꽂았다.

“커헉!”

황녀는 고통의 신음과 함께 또 한 번 피를 토해냈다.

비록 어찌 흘러갔든 끝은 이렇게 맺어질 수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아린 황녀.

당신은 이 짧은 시간 동안 나를 여러 번 놀라게 했다.

대체 무슨 생각과 신념을 가지고 이리 달려올 수 있었던 건지, 묻고 싶은 마음이 솔직히 가득하지만,

그래 봐야 무의미한 행동에 불과하겠지.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그런 나를 대신해 그녀가 먼저 물었다.

“네가 나아가라며? 나아가라 했잖아? 나아가서 다시는 이 세상에 너란 사람이 나타나지 않게 해달라며!”

그동안 쌓인 울분이 터지기라도 한 걸까?

울부짖으며 호소하는 모습에 나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난 말이야 시안. 그냥 널 구원하고 싶었어.”

구원?

“네가 나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나도 널 구해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구해? 날?

이건 또 무슨 가당치 않은 소리인가?

아무래도 이 황녀님께선 구원의 뜻이 뭔지 모르는 것 같다.

내가 당신과 똑같은 줄 알아?

난 내 스스로의 주도권이 확실한 놈이다.

내가 있는 곳이 중심이며, 나의 앞날뿐만 아니라, 남의 앞날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굉장히 이기적인 놈이지.

그런 나한테 뭐? 구원?

대체 이 황녀가 가진 미련함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이제는 연민을 넘어 허탈할 지경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달려온 건데, 역시 난 무능한 황녀가 맞나봐. 나란 인간의 한계는 여기까지인 거겠지. 여기서 더 아득바득 달려봤자, 너에게 못 닿을 거야.”

바로 보았다.

이제야 깨달, 아니 이걸 처음부터 몰랐을 리도 없잖아?

당신이 봤어야 할 길은 내가 아니야!

황제로서의 길이였다고!

그걸 위해서 난 길을 열어줬고, 당신은 그 위를 나아간 줄 알았건만,

이 황녀는 애초부터 엄한 길을 가고 있었던 거다.

내가 열어는 줬지만, 절대로 가리켜주진 않은, 그런 길로…….

“동작 그만! 당장 무기 버리고 멀찍이 떨어져!”

소란을 듣고 달려온 영지의 기사들이 어느덧 내 주위를 빙 둘러쌌다.

허나 저렇게 말만 던질 뿐 다가오진 못할 것이다.

저 변변찮은 기사들로선 나로 인해 만들어진 이 살기의 장막을 넘어설 수 없다.

“이번 정화 작업의 대상은 나였니?”

“…….”

“날 죽이는 게 네 임무야?”

감정이 복받친 듯 아련하게, 그러면서도 애틋함이 담긴 목소리로 그녀가 내게 속삭였다.

“그럼 죽여줘…….”

급기야 체념의 미소를 지으며 아예 눈까지 감아버렸다.

많이 들었고, 많이 봐왔다.

강인하고 단단했던 삶의 의지를 모두 잃은 채,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는 인간의 추악한 마지막 모습.

허나 그녀는 절대 추악하지 않았다.

의연했고, 차분했다.

마치 그토록 바랐던 순간이 지금 도래했다는 듯.

나로선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매우 낯선 광경이었다.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시안.”

미안해 또 뭐가?

하다 하다 지금 당신을 죽이려는 내게 고맙다 못해 미안하단 말까지 지껄인다고?

“미련한 황녀라서 결국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네.”

마지막까지 정말 그녀다운 모습이었다.

그래, 이제는 마침표를 찍을 때가 왔다.

껍데기 황녀로 불리며 본래는 꼭두각시로 활용되다 쫓겨나는 비운의 삶을 살아야 할 당신을 내 손으로 뒤바꾼 만큼,

그 뒤바꾼 당신의 운명도 내 손으로 끝을 맺으려 한다.

나는 마검을 쥔 손을 서서히 들어 올리며,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녀의 마지막을 다시 한번 유심히 살펴보았다.

세상은 추악한 안개의 존재로부터 안타깝게 암살당한 비운의 황녀로 당신을 기억하겠지.

하지만 난 아니다.

실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지만, 세상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단 한 명의 여자.

내가 그렇게 당신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그대로 검을 내리꽂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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