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9화. 비밀의 속삭임 (1)
이마에 땀은 줄줄, 가슴은 두근두근, 호흡은 움찔움찔.
제레온은 생각했다.
자신은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서 겨우 빠져나왔다고.
전선의 수호 기사 시절, 만신창이 상태로 트롤의 입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죽다 살아난 기분.
흑발의 사내는 둘째치더라도 대체 저 여인은 누구란 말인가?
술집에서 아무 기척도 없이 사라졌던 것도 모자라, 이번엔 아닌 밤중에 나타나 자신의 목을 움켜쥐기까지 했다.
자신이 아무리 늙었다고 한들, 감각마저 둔해지진 않았다.
이건 사람이 아닌, 마치 무체의 영혼 같지 않은가?
제레온은 붙잡혔던 목을 애써 쓰다듬은 채 두 남녀의 거친 기 싸움을 조심스레 지켜보았다.
“……!”
그러다 고개를 돌린 여인과 눈을 마주치고선 바로 눈을 돌렸다.
이에 제레온은 다시 생각했다.
저 여인은 지금, 자신이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것일까?
자신은 그저 안개의 교서를 지은 디오 하펜커스라는 인물에 대해 설명하려 했을 뿐인데?
이래서야 저 여인과 무슨 말 못할 관계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
“……?”
뭔가 흩어진 조각이 맞춰지기라도 한 듯 제레온의 두 눈이 크게 번뜩 뜨였다.
일단 저 여인은 사람이 아니다.
확실하다.
사람이라고 할만한 기척 자체가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
마치 이 주변에 떠도는 안개의 일부가 사람의 형태로 변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방금 저 사내가 주문처럼 외친 말속에,
마검이라는 단어가 있지 않았던가?
확신이 선 제레온의 눈에 빛이 차올랐다.
“거 심각한 대화 중에 미안하다만…….”
두 남녀의 시선이 다시금 제레온에게 향했다.
“거기 아가씨는 그러니까…… 마검인 것이오?”
죽음을 무릅쓰고 던진 질문이었다.
케이람은 ‘진짜로 죽고 싶냐?’ 무언의 협박이 담긴 시선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대가 마검이었다면 그래, 방금 전 반응도 이해는 되는구먼.”
“그게 무슨 말이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시안이 조금은 고조된 어조로 물었다.
“내 말해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이 이상 조금이라도 발설했다간 저 아가씨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따일 것 같군.”
몸을 추스른 제레온은 급하게 발길을 돌렸다.
“내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함세. 더 이상 대화를 지속하긴 힘들 것 같아서 말이야. 아무쪼록 거기 계신 아가씨를 잘 달래주길 바라네.”
케이람의 얼굴엔 여전히 불쾌함이 가득했다.
“낮에 만났던 술집에서 자네들을 기다리도록 하겠네. 조만간 다시 볼 날을 고대하지.”
제레온은 다음을 약속하는 인사를 끝으로 장소를 황급히 떠났다.
그 어느 때 보다 발을 황급히 움직이다 보니, 그의 몸은 어느새 숙소에 도착해 있었다.
-벌컥!
거칠게 문을 열어젖힌 제레온은 누가 들어올세라 다급히 문을 닫았다.
방에서 검을 손질하고 있던 마크는 깜짝 놀란 나머지 몸을 움찔했다.
“제, 제레온님?”
그의 주름진 얼굴에선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어딜 갔다 오셨길래 땀을 이렇게 흘리시는 겁니까?”
숨을 가쁘게 몰아쉬다가도 마크가 건넨 물통을 받고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딜 갔다 왔냐고?”
겨우내 마음을 진정시킨 제레온은 이내 입가에 물을 닦으며 말했다.
“지옥의 문 앞에서 지금 막 탈출한 참이라네…….”
* * *
전 현생을 통틀어 거의 처음이다.
내 시선을 회피하는 케이람, 그런 그녀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나.
디오 하펜커스.
케이람은 분명 노인이 언급한 그 이름에 반응하여 그를 죽이려 했다.
자기 혼자 멋대로.
“디오 하펜커스.”
[…….]
“너 아는 이름이지?”
그녀는 하찮다는 듯이 입꼬리만 올릴 뿐, 입을 열진 않았다.
“말해. 걔 누구야?”
[말하기 싫은데?]
싫어? 싫다라.
왜 싫을까?
이제와 내게 말 못 할 무언가라도 있는 걸까?
신의 금기도 아닌 마당에 내게 답을 회피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는 거지?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가 나에게 무언가를 숨긴다는 것.
나에게 참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그녀는 정녕 모르는 건가?
내 눈빛엔 점차 의문을 넘어 독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눈빛 봐라? 쏘아대다 못해 아주 잡아먹을 지경이네?]
그런 내 눈을 마주한 케이람이 가소롭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왜? 나도 네가 죽인 쓰레기들처럼 고문해서 알아내려고?]
“못할 것도 없지 않을까?”
내 손엔 어느샌가 자줏빛 오라가 일렁이는 마검의 본체가 쥐어져 있었다.
[날 이용해서, 날 무너트리겠다? 어마어마한 자신감인데 우리 주인?]
돌연 미소를 짓던 그녀가 차가운 손길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많이 컸어. 당돌하기 그지없던 꼬맹이가 어느새 날 내려다볼 만큼 훌쩍 자라고 말이야. 아마 딱 이때쯤이었을 거야. 그 머저리 새끼도…….]
“뭐?”
[지금처럼 잘 자라주렴 주인아. 그래야 나도 널 따라온 보람이 있을 테니까.]
-스스스
케이람은 그 말을 끝으로 안개가 되어 본체 속으로 사라졌다.
급히 그녀를 다시 부르기 위해 검에 기운을 불어넣어 봤지만,
“…….”
검에선 어떠한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검의 영혼이 또 한 번 영면에 들어가기라도 한 듯.
* * *
“시작의 도시 세벨리너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검문을 마친 시리카는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성문을 통과했다.
수호 기사 같은 호위 병력은 일절 없이, 오직 그녀 혼자만의 입성이었다.
우시프 제국의 수도 세벨리너스.
시리카로선 황성 연회 이후 7년 만의 재방문이었다.
물론 니그리티 가의 장녀로 온 것이 몇 년 만이라는 거지, 다른 이름으론 이미 여러 번 들락날락한 도시였다.
즉 오늘만큼은 미스트의 당주가 아닌, 니그리티 가의 장녀이자 전 로열 아카데미 학술 교관의 이름으로 온 것이었다.
성문을 통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수의 사내들이 나타나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시리카 니그리티님 맞습니까?”
“네.”
“이쪽으로 오시죠. 저희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시리카는 별 경계하는 기색 없이 그들을 순순히 따라나섰다.
인적이 붐비는 거리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검 자루를 쥔 곧은 자세나 묵직한 걸음걸이만 봐도 잘 훈련된 기사들이란 것을 시리카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도착한 평범한 가정집.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자신을 안내한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기사들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사이엔,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리카 선생님.”
매우 반가운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니그리티 백작 가의 장녀 시리카 니그리티. 존귀하신 아린 황녀님을 뵙습니다.”
교관직 사퇴 이후 7년 만의 재회.
시리카는 백작 가의 자제로서 황실의 일원인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공식적인 자리도 아닌데, 그런 부끄러운 인사는 하실 필요 없어요. 선생님.”
아린은 손수 선생님이란 호칭을 쓰며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황궁이 아닌 이런 누추한 곳에 모시게 된 점에 대해 먼저 사과드릴게요.”
“사람 많은 곳을 선호하지 않는 절 위한 황녀님의 배려 아니었나요? 전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아 주세요.”
황실의 부름이 아닌, 황녀 개인의 부름.
그날 이후 7년간 안면도 없던 자신을 개인적으로 불러낸 이유가 무엇일까?
부름도 부름이지만, 황실 안에서 제대로 된 황녀 취급조차 못 받았던 그녀가 이런 분대 단위의 기사들을 이끈 점 또한 꽤 눈여겨볼 부분이었다.
“바쁘신 분 모셔놓고 불필요한 지체는 하지 않을게요.”
자리에 앉은 아린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아무런 설명 없이 시리카의 앞에 한 권의 책을 건넸다.
책 제목은 쓰여 있지 않은, 검은색으로 뒤덮인 이를 모를 책이었다.
다소 의아해하는 얼굴로 책 상태를 살펴보던 시리카는,
<디오 하펜커스>
책 뒷면에 적힌 누군가의 이름을 발견하고선 살짝 당황했다.
허나 내색하진 않은 채, 바로 아린을 보며 물었다.
“무슨 책인가요 이건?”
“최근 황실의 공문을 통해 제국 곳곳에 있는 수도원으로 전달한 안개의 교서에요.”
대답을 들은 시리카는 미간을 찌푸렸다.
당황한 연기 같은 게 아니었다.
미스트의 당주로서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긴 해도, 황실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공포하지 않았다.
즉 아린 황녀는 지금 황실의 비밀 작업을 시리카에게 털어놓은 것이다.
그 이유를 알 리 없는 시리카로선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황녀님?”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아린은 다른 또 하나의 서신을 그녀에게 건넸다.
“이건 조만간 제국의 각 도시를 비롯해 영지를 소유한 귀족 가에 보내질 황실의 공문이에요. 선생님께서 가장 먼저 확인해주셨으면 해요.”
시리카는 의심과 호기심이 뒤섞인 시선으로 서신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눈을 의심했다.
“비, 빛의 기사단을 없애시겠다니? 황녀님 대체 무슨 생각을?”
“선생님께선 빛의 기사단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제자의 화살 같은 질문에 시리카는 차마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빛을 중심으로 한 질서를 유지하고 대륙의 평화를 이어나간다. 빛의 신 루멘델님의 이름 아래, 빛의 기사단은 이 신념에 조금이라도 반하는 세력이 있으면 억누르고 탄압했죠. 그 옛날 안개의 존재들처럼…….”
말을 전하는 아린의 눈은 굉장히 단호하면서도 무심했다.
아카데미 시절 어리숙했던 황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의 일을 계기로 전 의문이 들었어요. 과연 빛이 정말 우리를 이끌어줄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일까요?”
시리카는 황급히 서신의 적힌 나머지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서신엔 최근 빛의 기사단의 정신적 맹주인 네프로디테 성녀가 가람 왕국에서 화이트 엘프를 이용한 모종의 계략을 꾸몄단 사실이 그대로 적혀있었다.
“이, 이거, 성녀님께서 직접 밝히신 사실인가요?”
“예. 허나 성녀님께선 황성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자신의 과오를 신께 용서받겠다면서 말이죠.”
시리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해서, 전 생각했습니다. 빛의 기사단은 더 이상 빛의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요. 대륙의 평화를 위해 달려온 그들의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말입니다.”
“그 말은 즉, 그 역할을 수행할 다른 세력을 만들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시리카의 되물음을 아린은 부정하지 않았다.
심각한 분위기 속 어색한 정적이 흐르는 순간,
-터벅터벅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들의 앞으로 한 남성이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리카 교관님.”
“……?”
그를 발견한 시라카의 얼굴이 돌연 돌처럼 굳어버렸다.
“7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하나도 안 변하셨군요.”
사내는 그녀를 보며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속에서 치솟는 불쾌한 감정을 필사적으로 억누른 시리카는 이내 스스로에게 미소의 가면을 덧씌우며 말했다.
“보리스님? 정말 보리스님이세요?”
“혹시나 잊으시진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기억해주시니 다행입니다.”
“잊을 리가 있나요? 조금 당혹스러울 뿐이죠. 제가 이 자리에서 보리스님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거든요.”
어느 정도의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보리스는 태연한 미소와 함께 아린 황녀의 뒤로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마치 예전부터 그래왔다는 듯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제가 시리카 선생님을 부른 이유는 여기 있는 보리스님께서 설명해주실 거예요.”
용무가 끝난 아린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선생님…….”
그러곤 기사들과 함께 홀연히 밖으로 나가버렸다.
집안에 어느덧 시리카와 보리스 단둘 만이 남게 되었다.
“역시 시리카님의 연기력은 대단하군요. 7년 만에 봐도 도저히 감탄하지 않고선 못 배길 정도입니다.”
보리스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박수로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별로 터가 좋은 것 같진 않은데, 묫자리를 여기로 정하신 이유라도 있을까요?”
시리카의 소매 끝에 자리한 시퍼런 칼날이 어느덧 보리스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