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진짜 추종자 (2)
해는 저물고 달이 떠오른 사페른의 밤.
탁자에 작게 일렁이는 촛불 앞엔 한 퇴역 기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빛이 있는 곳엔 안개가 있지 않고, 안개가 드리워진 곳엔 빛이 보이지 않으니, 둘은 애초부터 공존할 수 없는 관계다.>
중간에 쓰인 글귀에 꽤 눈길이 갔는지 그의 시선은 좀처럼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했다.
이에 방 밖에서 노크가 울렸다.
“제레온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허가가 떨어지자, 중년의 칼 찬 남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현역 시절 제레온의 부관이었던 마크였다.
그가 독서 중인 것을 확인한 마크는 이내 미간을 작게 찌푸리며 물었다.
“뭔가 만족하실만한 내용은 찾으셨는지요?”
“만족이라 할 게 뭐 있겠는가? 그나마 건질 것이라도 있을까 하는 마음에 보는 게지.”
장시간의 독서에 지루함을 느낀 제레온은 급기야 하품을 남발했다.
“그 남자를…… 그대로 보내도 괜찮았던 겁니까?”
“알만한 자네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가? 자네뿐만 아니라 다 느끼지 않았나? 그냥 안 보냈으면, 우리 다 몰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걸.”
마크는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이거야 원, 기사단 문장도 반납해야겠군. 전선에서 상급 마수한테도 안 쫄던 우리가, 고작 젊은이 한 명을 상대로 물러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여러모로 체면이 안 서겠어.”
“그 남자는 왜 순순히 책을 넘겨준 걸까요?”
“내 이야기가 재밌긴 했나 보지 뭐. 그래서, 자넨 왜 들어왔나?”
마크는 잠시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린 듯 목을 가다듬으며 답했다.
“수도원장과의 만남이 성사되었습니다.”
“벌써? 내 예상보다 빨리 잡았구먼, 그래, 언제 가면 되나?”
“지금 당장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지금?”
“예.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하는지라…….”
의외의 소식을 접한 제레온은 눈살을 찌푸리다가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네. 바로 가도록 하지.”
그들은 바로 사페른의 수도원으로 향했다.
정문에 이른 순간, 기다리고 있던 수도원장과 수도사들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존귀하신 빛의 기사단장이시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무슨 황성의 귀족 가가 온 것도 아니고 퇴역 기사인 자신을 기다릴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리 좋은 이유는 아닐 거란 걸 제레온은 바로 눈치챘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수도원장은 제레온과 일행들을 안으로 이끌었다.
“처음 들었을 땐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 유명한 빛의 집행자 제레온 알킨 단장님께서 저희 수도원을 찾아주시다니요! 역시 빛은 저희 곁에 항상 존재한다는 루멘델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되는군요!”
제레온에 대한 입발린 찬양을 시작으로 수도원장은 수도원의 역사와 본인의 행적을 주저리주저리 떠들기 시작했다.
제레온은 아무런 대꾸 없이 눈을 감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이런, 귀하신 분을 모셔놓고 저 혼자 너무 신나게 떠들었군요. 불쾌하진 않으셨나 모르겠습니다.”
“…….”
“제, 제레온님?”
“아! 미안하오. 그쪽 이야기가 너무 재미없어서, 나도 모르게 졸고 말았소.”
제레온은 급기야 두 팔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대충 끝난 것 같으니, 이젠 내 이야기를 시작하겠소.”
“그, 그러시지요.”
수도원장은 떨떠름함을 미소로 애써 감추며 말했다.
“난 사실 아까 낮에도 수도원을 들렀소.”
“……!”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수도원장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러셨군요! 전혀 몰라뵈었습니다! 루멘델님께 기도하러 오셨던 건가요?”
“뭐 겸사겸사라고 해두지. 그것보다도 최근 제국 곳곳에서 안개를 추종하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해서 말이오. 그래서 내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확인 중이었지.”
수도원장은 당황하는 대신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제레온님께선 모르고 계셨던 겁니까?”
“보시다시피 난 더 이상 기사가 아니오. 따로 알려주는 사람도 없는 마당에 알긴 무얼 알겠소?”
세상 담담한 제레온의 태도에 수도원장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뭔가 발설해선 안 될 사실을 발설해버린 사람처럼.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제국에서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나 보군.”
“모, 모른 무언가라니요? 저 같은 일개 수도사가 그런 걸 어찌 알겠습니까?”
“그거야 뭐, 확인해보면 알겠지.”
제레온은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보란 듯이 내밀었다.
“……!”
책을 확인한 수도원장은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해 애먼 신음만 내고 있었다.
“그렇게 나라 잃은 망인 같은 표정을 지어서야 내가 다 민망하구먼.”
“그, 그게 아니라…….”
1초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다르게, 수도원장의 몸은 좀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아직 무뎌지지 않은 퇴역 기사의 강렬한 눈빛에 근육이 굳기라도 한 듯.
“한번 말해보시오.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 * *
[참 나, 무슨 금방이라도 깽판 칠 것처럼 기 싸움 할 땐 언제고…….]
“내가 너 좋은 일을 시켜줄 리가 없잖아. 케이람.”
[어련하시겠어요. 주인님.]
케이람은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더 봤자 웃음만 튀어나올 내용만 있을 텐데, 굳이 시간 낭비하며 읽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더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필요한 사람한테 주는 게 맞지 않겠는가?
절대 귀찮은 일에 휘말릴까 봐 그냥 주고 온 게 아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 가는 건데?]
“지금의 내 궁금증을 해결해 줄 사람한테로…….”
그게 누구냐는 물음에 던지려는가 싶다가도, 케이람은 입을 바로 다물어버렸다.
내가 찾아가는 사람이 누군지, 눈치챈 듯 보였다.
나는 작은 미소와 함께 어둠이 드리워진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왼쪽 모퉁이를 돌자마자 나타난 나무 문을 보고선,
-끼익
망설일 것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붉게 일렁이는 촛불을 친구삼아 외로운 독서를 행하고 계신 단발머리의 여인.
아무 거리낌 없이 나아가 그 앞에 털썩 앉으니, 이윽고 책을 덮은 그녀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연구실치곤 너무 초라하신 것 아닙니까?”
“그렇게 안쓰러워 보이면 제자된 도리로서 크게 하나 지어주지 그러니?”
“성공한 제자가 아니라서 힘들겠네요.”
여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초리를 날카롭게 세웠다.
성공하지 못한 제자를 위해 먼 길을 찾아와주신 나의 스승, 시리카 당주였다.
“어째 조용히 잘 진행하는가 싶더니, 오자마자 바로 일을 저질렀더구나.”
나는 단 번에 낮의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연이었습니다. 설마 그 술집에 퇴역한 기사단장이 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순전히 우연이었다며 애써 일축했지만, 당주의 나를 향한 불신의 시선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뭐? 내가 부추긴 거 아니야!]
내 뒤에 있는 케이람까지 포함해서.
“이번 일에 대해서 빛의 기사단은 모르고 있는 겁니까?”
“아직 확실하진 않아. 네가 만났다는 그 제레온 알킨이란 남자는 오랜 시간 빛의 기사단의 맹주로 있던 자야. 퇴역한지 오래라 해도, 빛의 기사단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이 그의 귀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지.”
실질적 맹주는 성녀였다곤 하나, 정작 기사들을 이끌고 지휘했던 건 그 남자였을 것이다.
“퇴역 후엔 그냥 고향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었지만, 이번 가짜 신도들과 더불어 가람 왕국에서 있었던 사건이 겹치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는구나.”
문득 진실을 확인해보고 싶었다는 그 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얼마 남지 않는 여생 동안 자신이 걸어온 길이 올바른 길이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고 했던가?
이대로 가면 그와 다시 부딪치는 날이 머지않을 거라는 생각이 새삼르레 들었다.
“……?”
나는 당주 앞에서 대뜸 그(?) 제스쳐를 취했다.
“뭐 하는 거니?”
“미스트의 새 수신호 아니었습니까?”
당주는 나를 무척이나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조금은 멋쩍어진 마음에 입술을 잘근거렸다.
“이번에 안개의 신도를 자청하는 이들 사이에서 퍼진 비밀 수신호 같습니다. 이 수신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자신들의 장소로 데려가 교화 작업을 펼치더군요.”
“비슷한 이야기는 들었다만, 설마하니 그런 우스꽝스러운 동작일 줄은 몰랐구나. 그래서 그 장소에 갔다 와본 거니?”
“미친놈들이 모여있더군요.”
나는 수도원장의 설교를 비롯해 그들이 읽고 있던 교서의 내용을 당주에게 전했다.
주로 아에르에 대한 정신 찬양을 위주로 말이다.
“정신이 제대로 나간 놈들이구나.”
미친놈들이라는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딴 건 몰라도 그 교서라는 것 좀 확인해보고 싶구나.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거니?”
“아, 그건 그 퇴역하신 단장님에게 주고 왔습니다.”
“왜?”
“어, 재밌는 이야기를 해준 대가라고 할까요?”
“…….”
순간 방안에 싸한 정적이 흘렀다.
급 두통이 밀려온 듯 당주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꾹 참는 것처럼 보였다.
“제목 같은 건 적혀있지 않았는데, 저자는 적혀있더군요,”
“그래, 그거라도 말해보렴.”
“디오라고 아십니까?”
“디오? 이름만 들어선 모르겠구나? 성은 안 적혀있었니?”
적혀있었다.
성까지 붙여서 말했을 때 이름은…….
“하펜커스. 디오 하펜커스였습니다.”
“……하펜커스라고?”
당주의 눈빛이 묘하게 뒤바뀌었다.
반응만 봐선 어디서 들어보긴 한 것처럼 보였지만,
“모르겠구나.”
그녀는 세상 단호하게 일축했다.
“그런 정신 나간 생각을 기록하는 얼간이를 기억할 만큼 난 여유롭지 않아서 말이지.”
당주는 대뜸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였다.
“벌써 가시는 겁니까?”
“애초에 널 만나려고 여기 온 게 아니야.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들렸을 뿐. 나 이 길로 황성에 갈 거다.”
“이번 일이 황실과 관련되어 있다는 걸 조사하기 위해 섭니까?”
“뭐, 겸사겸사지. 미스트의 당주로서가 아닌, 엄연히 니그리티 가의 장녀로 가는 거지만.”
어째 자랑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이름이 아닌 가문의 이름으로 어딘가에 나선다는 것.
나로선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딱히 조심하라는 말은 안 하겠지만…….”
이윽고 문을 열고 나가려는 당주는 한 번 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렴. 얼굴이 반쪽이 됐구나.”
“새겨는 듣겠습니다.”
당주는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갔다.
* * *
시안과의 독대를 끝낸 시리카는 바로 황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허나 골목 한 켠에서 느껴진 익숙한 기운을 감지하고선 발길을 돌렸다.
-또각또각
고혹적인 발소리와 함께 기묘한 밤안개가 드리워진 칠흑의 공간 속에서 흑발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리카는 예상한 상황이라는 듯, 딱히 당황해하진 않았다.
“어쩌시려고 저를 불러내신 겁니까?”
[불러낸 적 없는데? 그냥 네가 제발 저려서 온 거 아니고?]
“케이람님의 그런 보기 드문 눈빛을 보고서 어찌 그냥 갈 수 있을까요?”
시리카는 여유로운 눈웃음을 지었다.
“하펜커스라는 이름이 여간 거슬리셨나 봅니다.”
[기어오르지마 당주 아이야. 네 똘마니들로부터 무언의 암살자라고 불리기 싫으면.]
케이람의 어조는 다소 격양되어 있었다.
“디오라는 이름은 모릅니다. 다만, 하펜커스라는 이름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고 할 수 없지요.”
[모르지 않아도, 모른 척해야 할 거야. 내가 굳이 꼴도 보기 싫은 네년과 독대하면서까지 경고하는 이유를 모르진 않겠지?]
“제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케이람님의 비밀이 영영 감춰지는 건 아닙니다.”
[그건 네가 신경 쓸 게 아니야.]
시리카의 충고를 케이람은 단호하게 일축했다.
“아에르님을 모시는 추종자로서 케이람님의 비밀을 발설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시리카의 눈빛이 또 한 번 날카롭게 세워졌다.
“그것이 계승자에게 해가 되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겁니다.”
[…….]
“그럼 평안하시길.”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시리카는 몸을 돌렸다.
[짜증나네…….]
홀로 남은 케이람의 입에선 차마 담는 것조차 흉악한 욕설들이 뱉어지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