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진짜 추종자 (1)
“…….”
뭔가 호기롭게 첫말을 떼는가 싶더니, 노인은 곧바로 입을 닫았다.
세상 무심한 내 반응에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하다 못 해 불신의 반응이라도 보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내 소개가 놀랍지 않았던가?”
“별로.”
“거참 특이한 젊은이구먼.”
노인은 불편한 헛기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내 자랑할 건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검에는 좀 일가견이 있었네. 스무 살에 제국 기사단에 입단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의 기사단에 차출됐지. 이 문장이 바로 그 증거라네.”
테이블에 올려놓은 빛바랜 문장을 노인은 보란 듯이 들어 올렸다.
“지금이야 매우 유명한 곳이지만, 당시의 난 그냥 나를 필요로 한다기에 따라갔을 뿐, 거기가 뭘 하는 곳인지도 몰랐다네. 그러곤 입단하자마자 어딘가로 끌고 가더니, 대뜸 교화를 시키더군.”
“교화?”
“그래. 네프로디테란 이름의 성녀가 나타나서는 빛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안개의 신도들을 토벌해야 한다고 하더군. 이것은 신의 뜻이며 오직 전능한 빛의 기사만이 신이 내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했어. 웃기지 않나? 그 안개의 신도란 자들이 뭘 잘못 했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설명 없이, 그냥 인간이기를 부정한 자들이라며 없애야 한다는 게…….”
몰랐던 이야기도 아니기에, 그다지 놀랍진 않았다.
“그래서 내가 어찌했을 것 같나?”
“시키는 대로 했겠지.”
“바로 맞췄네! 뭐 솔직히 그 어린 나이에 무슨 생각이 있었겠는가? 그냥 시키면 옳다구나 하고 따르는 게 진리인 줄 알았지.”
낄낄대던 노인은 앞에 놓인 빈 잔을 혼자 채우는가 싶더니 그대로 들이켰다.
“그 지겨운 설교를 일주일 정도는 듣다가도, 마침내 그들이 나타났다는 비보가 전해지면서 검을 들고 한달음에 달려갔지. 그들과의 첫인상은 아주 환상적이었어.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었거든!”
“뭐 발가벗고 춤이라도 추고 있었나?”
“차라리 그쪽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군! 최소한 미친놈들이란 말엔 동의했을 테니 말이야. 하지만 내가 본 건 그런 게 아니야! 그들은 아주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일을 하고 있었지. 바로 자선(慈善)을 말이야!”
“자선?”
“그래 자선! 굶주림과 추위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음식과 구호품들을 나눠주며 돕고 있었다네! 뭔가를 특별히 요구하지도 않았어! 아무 대가 없이 그들에게 일방적인 선의 베풀어줬다네!”
[…….]
잠자코 듣고 있던 케이람의 입에서 알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노인의 이야기가 웃겨서가 아닌, 뭔가 탐탁지 않은 마음에 자연스럽게 지어진 비열한 미소였다.
“우리는 그런 그들을 죽여야 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구호품들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는 말도 안 되는 죄목을 씌워서 말이야. 처음이었지. 내 검에 짐승이나 마수도 아닌 인간의 피를 묻힌 것이…….”
술잔을 잡은 노인의 손에서 작은 떨림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노인은 내색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직도 선해. 자신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며 울부짖던 그 얼굴들이 말이야. 뭐 그렇다고 딱히 후회한다는 건 아니네. 그때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내가 이단자로 몰려서 죽을 판이었으니.”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는 나름의 변명.
딱히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나무랄 생각도 없다.
그저 힘이 없는 자의 무기력한 대처에 지나지 않으니.
“한 번의 참혹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그들은 이후에 칼을 갈고 돌아왔더군. 이전엔 고통에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는 일을 했다면, 이제는 그 고통을 주는 근원 자체를 없애기 시작한 거야. 바로 암살이라는 수단으로 말일세. 자네도 들어본 적 있지? 미스트라는 희대의 암살집단을 말이야.”
나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던 우리는 한 번 더 그들을 찾고자 나섰네. 두 번째로 봤던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어. 진짜 사람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그냥 좀 다르다는 느낌이랄까? 거부감보단 호기심이 앞섰다네. 더불어 기대감마저 차올랐지. 세상으로부터 부정당한 이단자들의 처절한 복수를 말이야.”
노인의 말이 진심이라는 가정하에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할 수 있다.
노인이 말한 그 기대감은,
충족되지 못했을 거란 걸.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네. 그놈들이 돌연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버렸거든. 세간에는 빛의 기사단이 토벌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아니야. 자네를 비롯해 모두가 속고 있던 거지.”
노인은 빈 잔에 다시금 술을 채웠다.
“허무했다네. 굉장히 허탈했어. 난 알고 싶었거든. 세상이 악의 존재라고 칭하는 그들의 진짜 모습을 말이야. 하지만 그들은 어떠한 답도 주지 않은 채, 그냥 사라져버렸어. 그렇게 그들의 흔적은 지워지고, 무심한 세월만 하염없이 흘러갔지.”
채워진 술잔을 물끄러미 보던 노인의 눈동자가 슬그머니 내 쪽으로 향했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묘한 분위기를 실은 채.
“내가 수도원엔 왜 갔는지 아나? 바로 확인해보고 싶어서야.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떠도는 그 안개의 추종자란 놈들이 과연 내가 봤던 놈들이 맞는지 말일세. 하지만 아니었어. 수도원 놈들은 그냥 가짜 추종자에 불과해. 내가 봤던 진짜 안개의 추종자들은 그런 놈들이 아니었으니까…….”
“뭘 근거로 확신하는 거지?
“나이를 먹을수록 기억은 가물가물해지지만, 몸의 감각은 지워지지 않네. 근데 그거 아는가?”
노인은 괴이한 미소와 함께 눈동자를 희번덕거렸다.
“지금 자네의 눈빛은 내가 60년 전에 보았던 그 미스트의 암살자들이랑 매우 흡사하다는 걸 말이야. 흡사한 정도가 거의 빼다 박았어. 지독한 살수의 눈동자를 말이지! 이유가 뭘까?”
“…….”
“자네에게선 냄새가 나! 저급한 가짜의 냄새가 아니야! 피를 흘리고, 피를 흘리게 했던 진짜배기의 냄새가 난다고! 술집 문 앞에서부터 아주 진동을 했어!”
노인의 눈빛엔 이제는 작은 광기마저 서려 있었다.
나는 아무런 내색 없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이봐요 영감님. 얼굴은 정정하신 게 노망난 건 아닌 것 같은데, 영감님 말이 사실이라면, 영감님은 지금 내 앞에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인생을 포기한 게 아니라면 말이지.
노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이미 산만큼 산 인생일세. 뭐가 두렵겠는가? 이만큼 나이를 먹게 되면 삶의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네. 그러면서 의문이 들지. 내가 살아왔던 삶이, 과연 올바른 삶이었는지 말이야.”
“그 상념의 순간조차 안 올 수도 있는데 말이지?”
“젊은이 자신감이 대단하구먼. 하기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법이지. 7년 전쯤인가? 고작 열세 살의 소년이 제국의 상급 기사들을 압살하고 유유히 사라졌던 일도 있지 않았나? 그 소년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대뜸 궁금해지는군.”
그 소년은 지금 어느 평범한 술집에서 이상한 노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
“아,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을 말 안 했군.”
“굳이 알아야 하나?”
“말 못 하는 짐승들에게도 이름을 붙여주면 알아주는 법이라네. 하물며 이 귀한 시간을 함께한 우리가 서로 간의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혹시 나중에라도 다시 볼 날을 위해서라도 말이지.”
노인은 급 자신은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고개를 치켜올렸다.
뭔가 거창한 이름이라도 말하려는 듯이.
“내 이름은 말이지…….”
“…….”
“제레온. 제레온이라고 하네.”
-깡!
쇠붙이와 쇠붙이가 부딪히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손에는 한쪽에만 날이 서 있는 식사용 나이프가,
노인의 손에는 빵이 꽂혀있는 포크가 쥐어져 있었다.
“내 이야기가 꽤 재밌었나 보군. 이런 식으로 거칠게 반응해줄 줄은 몰랐는걸?”
내가 테이블에 위에 놓인 나이프를 들고 노인의 목을 찌르기까지 얼마나 걸렸을 것 같은가?
1초? 그거의 반?
감히 말하건대, 인간의 아둔한 감각으론 절대 반응할 수 없는 속도로 찔렀다.
허나 이 노인은 막았다.
여유롭게는 아니어도, 무리 없이 막긴 막았다.
마치 내 움직임을 사전에 예상하고 처음부터 경계한 것처럼.
“퇴역한 단장님께서 후대를 위한 자선활동이라도 하러 오셨나?”
제레온.
이 땅에서 저 이름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가히 한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전직 빛의 기사단의 단장이자, 그 이전엔 빛의 집행자라고 불린 기사.
왜 집행자냐고?
그놈들이 그토록 찬양하는 빛의 질서란 것으로 가장 잘 수행한 기사이기 때문에 집행자라는 이명이 붙은 것이다.
그 어떤 기사보다 안개의 신도를 죽이는 것에 앞장섰던 것으로 말이지.
“말하지 않았나? 난 그저 진실을 알고 싶어서 왔을 뿐이라고.”
노인은 자신의 정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빛의 기사고 나발이고 어차피 다 옛날 일이라네. 지금에 와선 내 알 바가 아니라는 거지. 그리고 말이야…….”
급 노인의 이마에서 진득한 땀이 흘러내렸다.
“자네가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난 이미 아까 전부터 생사의 갈림길 위에 서 있었거든?”
그 말에 내 시선은 노인의 옆에 앉은 케이람에게 향했다.
작은 움직임조차 없는 굳은 눈동자와 도도하게 꽂힌 팔짱.
허나 그녀의 날카로운 손가락엔 보이지 않는 안개의 힘이 잔뜩 서려 있었다.
이미 나보다 한참 전부터 노인을 경계하고 있던 것이다.
“아가씨. 예쁘장한 얼굴 뒤에 무서운 칼을 숨기고 계셨구먼?”
[여유 부리지 마 늙은이. 그 가증스러운 눈으로 본인의 장기를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노인의 능청스러운 물음을 케이람은 살벌한 미소로 화답했다.
“인생의 마지막을 아리따운 아가씨 손으로부터 맺어지는 거라면, 나쁠 것도 없지.”
이에 케이람의 눈초리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말이야. 난 내 묫자리를 이곳으로 정하진 않았거든.”
노인의 시선이 다시금 내 쪽으로 향했다.
반대로 내 시선은 노인이 아닌 다른 쪽으로 향했다.
-스윽
조금 전까지 태연하게 술을 먹던 취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1층에서도 몇몇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 당황할 일은 아니었다.
이 노인이 우리 테이블에 온 시점에서 주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걸 이미 인지하고 있었으니.
“오해하진 말게. 자네를 처음부터 노리고 온 건 아니야. 말하지 않았나? 입구에서부터 냄새가 솔솔 피어올랐다고. 그냥 순전히 우연인 셈이지.”
단순히 수가 많다고 생겨난 자만심 같은 게 아니다.
다가오는 걸음만 봐도 알 수 있다.
풋내기 기사, 아마추어 용병이 아닌,
전부 다 수십 년 이상 검을 쥐고, 피를 묻혀 온 숙련된 무인들이란 걸.
그들은 머지않아 내 테이블을 둘러쌌다.
“혹시나 해서 다시 말하지만, 난 자네를 해하기 위해 온 게 아니야. 그냥 알고 싶을 뿐이지. 원한다면 자리도 옮겨줄 수 있네. 이번에 내가 아닌 자네의 이야기를…….”
“이봐. 영감님.”
노인의 말을 끊자,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지금, 무슨 같잖은 여유를 부리시는 거지?”
“허허. 여유라니? 난 지금 진심을 다해 자네를……!”
능청스레 웃던 노인의 눈이 돌연 내가 아닌 옆으로 향했다.
불과 몇 초 전까지 자리하고 있던 케이람이 모습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무심한 먼지만이 휘날리는 상황.
노인의 시선은 얼마 안 가 다시 나에게 향했다.
“진짜 안개의 추종자를 너무 얕게 본 건 아니신가?”
내 손에는 더 이상 식사용 나이프가 아닌 살기 어린 케이람의 본체가 쥐어져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