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우연이 겹친 필연 (2)
구시대를 구시대라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간단하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구시대라 칭하는 것이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어떤 일을 행했는지 등.
그것을 받쳐줄 수 있는 기록이 없는 한,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로선 그 무엇 하나 알 수 없다.
하물며 가울 근교에 이런 거대한 지하 유적이 있었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수백 년을 땅속에 묻혀있던 유적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한 상태.
이 유적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진 아직 알 수 없으나,
구시대의 문명에 감화되기라도 한 듯, 학회원들은 저마다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딱 한 명,
루나브를 제외하고선.
“…….”
유적에 들어선 이후부터, 그녀의 시선은 줄곧 정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바라보는 방향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은은하게 퍼져오는 비릿한 피 냄새가 그 증거였다.
“……!”
잠자코 나아가던 그녀가 대뜸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곤 고개를 살짝 앞으로 내빼더니, 갑자기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익숙한 냄새라도 맡은 것일까?
의문에 둘러싸여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이내 휘둥그레지더니, 급기야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달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누구 하나 말리지 못했다.
“루나브님! 혼자 가시면 위험합니다!”
학회원들의 만류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그토록 갈망하던 무언가를 찾은 사람처럼, 확신에 찬 눈빛으로 이어진 길을 쭉 달려 나갔다.
그렇게 도착한 어느 커다란 문 앞.
-끼익!
살짝 벌어진 문틈을 대차게 열어젖히니 곧 밝은 빛이 내리 쬐는 거대한 광장이 나타났다.
“…….”
광장 한쪽에 멀뚱 멀뚱 서 있는 이름 모를 엘프들에게도,
제단 밑에 고이 누운 백발의 성녀에게도,
제단 위에 잔혹하게 널브러진 누군가의 시체에도,
루나브는 작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의 요동치는 두 눈동자가 향한 곳은 오직 하나.
멀지 않은 정면에서 그녀를 비스듬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는 검은 후드의 남성이었다.
“하아, 하아…….”
그리 먼 거리를 뛰어온 것도 아니었다.
끽해야 50m는 될까 싶은 거리.
허나 왠지 모르게 숨이 차면서 점차 호흡이 가빠져 갔다.
단순히 체력 소진으로 인한 신체적 반응이 아니었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누군가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 떠오르면서 지금의 반응을 유발한 것이다.
굳이 몸의 반응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코끝을 선명하게 자극하는 이 냄새.
사람의 피로 향수를 만들면 날 것 같은 냄새.
이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바로 그 냄새가,
눈앞의 남성으로부터 풍겨오고 있었다.
“……!”
그녀를 따라 부리나케 달려온 슈르츠도 곧 정면에 있는 남성을 발견하고선 입을 떡하고 벌렸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어찌 대처할지 몰라 멍만 때린다고 했던가?
머리가 하얘지고, 전신의 털이 곤두서면서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를 애매한 상황.
“말해보세요.”
그런 슈르츠에게 대뜸 루나브가 물었다.
“무, 무얼 말인가요?”
“슈르츠 씨가 우이토에서 봤다던 그 검은 머리의 악마가…… 저 남자가 맞는지.”
말 돌릴 여지도 없는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이에 슈르츠 또한 돌릴 것 없이 바로 대답했다.
“제 눈과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틀림없을 겁니다!”
인상착의, 느껴지는 기운.
모든 게 동일했다.
지금 눈앞의 있는 남성은 우이토 광산에서 봤던 바로 그 남성이 확실했다.
기대했던 대답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히죽
곧 루나브의 입가엔 의미를 알 수 없는 기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최근에 만난 슈르츠를 비롯해, 그녀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학회원들까지.
그들은 전부, 하나같이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루나브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실제로도 그랬다.
루나브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만약 그녀가 평소와 같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공간에 들어선 즉시, 고강도의 제한 결계를 생성하여, 어느 누구도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허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마법은커녕 어떠한 대처 수단도 발휘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눈앞에 있는 남성을 향해 다가갈 뿐.
보는 이들로선 그 모습이, 무척 심오하면서도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렇게 둘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려는 순간,
잠자코 있던 검은 머리의 남성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며, 루나브의 곁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깜짝 놀란 루나브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부릅떴지만,
“……!”
어떠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남성은 아무런 말이나 행동 없이 그녀를 빠르게 지나쳤으며, 연이어 불어온 거센 바람에 하늘빛 머리카락만 안쓰럽게 휘날리고 있었다.
“하.”
허탈한 마음이라도 든 것일까?
루나브는 짧게 헛웃음을 내었다.
“잡아먹겠다는 것도 아닌데, 뭐 인사라도 해주면 덧나나요?”
그러곤 웃는지 우는지 모를 기묘한 목소리로 나직이 읊조렸다.
“참 여전하네요. 선배는…….”
자신을 무심하게 지나친 누군가를 향해.
* * *
가람 왕국의 수도 가울 중심부에 위치한 마법 학회의 본관.
차마 웃지 못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는 하스티아와 그 일행들 앞엔, 바닥에 머리를 박은 가르니안이 있었다.
“전부 저의 잘못입니다. 저의 무지함이 하스티아님을 비롯한 모두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가르니안은 곧 모든 사실을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3년 전, 프루이나를 찾아왔던 성녀는 그에게 하스티아가 가진 열쇠의 힘을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제안했다.
그럼 신의 비밀을 지켜야 하는 화이트 엘프 일족의 오랜 숙원으로부터 해방 시켜 줌과 더불어, 현재 프루이나에 닥친 위기도 해결해줄 것이라 했다.
해서 일족원들 일부를 설득해, 인계에 동화된 일족원에게 도움을 구하자는 거짓된 계획을 세웠고, 결국 하스티아를 이곳까지 유인한 것이 이번 사건의 전말이었다.
허나 하스티아의 안전을 약속했던 것과 다르게, 성녀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만약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머리의 암살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녀가 어떻게 되었을지, 일족원들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사실 돌이켜 보면 일족을 위해서가 아닌, 열쇠의 수호라고 하는 오랜 굴레에서 벗어나길 원했던 제 욕망이 더욱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래 봐야 보잘것없는 변명에 불과하겠죠. 프루이나로 돌아가면 어떠한 처벌이라도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하스티아는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자그마치 300년이다.
그 긴 시간 동안 가르니안은 자신뿐만이 아닌, 선대의 다른 일족원까지 지키며, 열쇠의 수호자라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기본적으로 엘프는 인간보다 몇 배는 긴 수명을 가진 종족이다.
하지만 신의 비밀을 담고 있다는 부작용 때문인지, 대개 열쇠의 존재들이 가진 수명은 100년이 채 안 됐으며, 대부분이 일찍 요절하였다.
가르니안은 그런 일족원들의 죽음을 몇 번이고 봐온 것이다.
자신이 손수 몸을 바쳐 지켜온 이들이 허무하게 죽어갈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다.
허나 그러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그 성녀란 자는 무슨 이유로 자신이 가진 열쇠의 힘을 탐냈던 걸까?
설사 열쇠의 힘을 옮겼다 해도, 그것을 개방시켜줄 사람이 없으면 사실상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힘이다.
그것을 가능케 해줄 사람이 곁에 있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두셔야 할 거예요. 지금의 상황은 순전히 당신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는 걸…….)
안개의 공간 속에서 들었던 성녀의 말이 하스티아는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신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에 시안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일까?
비록 긴 시간을 함께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 대해서 정작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하스티아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죄의 시간은 끝나셨나요?”
“…….”
어느 틈에 방으로 들어온 루나브가 덤덤한 시선으로 물었다.
“대충 당신들의 얘기는 다 끝낸 것 같으니, 이젠 제 얘기를 하도록 하죠. 거기 앉아있는 당신만 빼고, 전부 나가세요.”
루나브의 손가락은 다름 아닌 하스티아를 가리키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하스티아는 물론, 루나브를 제외한 전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애석하게도, 저희 하스티아님께선 말을…….”
“정신 감응은 될 거 아니에요? 충분히 소통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들 나가주세요.”
엘프들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곳은 엄연한 인간들의 보금자리.
그나마 보장받고 있는 안전을 계속해서 지키려면, 그들의 말을 따라야 했다.
하스티아는 마지못해 일어나는 일족원들을 향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모든 엘프들이 떠나면서, 방에는 루나브와 하스티아 단둘만 남게 되었다.
“…….”
자리가 마련되었음에도, 루나브는 아무런 말 없이 하스티아를 빤히 쳐다만 보았다.
기분 탓일 수 있으나, 눈빛에 왠지 모를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자신이 먼저 말을 걸어볼지 말지, 하스티아는 우물쭈물 고민을 거듭하였다.
“어째, 지금 상황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이해를 전혀 못 한 얼굴이네요?”
갑작스레 터진 물음에 정곡이 찔린 하스티아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친절한 설명이나 하려고 온 건 아니니까. 그냥 내 용건부터 말할게요.”
하스티아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이나 분위기로 봤을 때, 아무래도 자신의 일족에 대한 굉장히 중요한 것을 질문하려는 듯 보였다.
이에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선, 그녀의 질문에 당당히 대처하려 했지만,
“시안 선배랑 무슨 사이에요?”
그 마음은 1초도 못 가 풀어지고 말았다.
‘네?’
“말을 못 하는 거지, 말을 못 듣는 건 아니지 않나요? 다시 말해줄까요?”
‘그, 그게 질문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사뭇 진지한 분위기에 난데없이 시안과의 관계를 묻는데, 당황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어려워할 것 없어요. 언제, 어디서 만났고, 어떤 일이 있었으며,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까지. 그냥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말해주면 돼요. 하물며…….”
루나브의 눈빛은 이내 칼처럼 날카로워졌다.
“왜 당신의 몸에서 선배의 냄새가 나는지까지도…….”
목소리에는 프루이나의 강추위에도 굴하지 않을 한기마저 느껴졌다.
당황하다 못해 황당한 상황이지만, 하스티아는 곧 침착을 되찾았다.
사실 자신은 시안에 대해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허나 생명의 은인에 대해 이리저리 떠벌리는 것은 분명 올바른 도리가 아닐 터.
적어도 이 여자가 어떤 목적으로 시안에 관한 것을 캐물으려 하는 건지, 하스티아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루나브님이라 하셨죠?’
“네.”
‘염치없다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저 또한 묻고 싶어요.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시는 루나브님께선 시안님과 어떤 관계인지…….’
다른 뜻은 없었다.
그저 이 루나브라는 여인이 가진 시안에 관한 관심이 선의인지 악의인지 대해서만 알고 싶을 뿐.
만약 그것이 후자에 해당된다면,
하스티아는 어떠한 것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
루나브는 한치의 변함없는 무심한 표정으로 시종일관 하스티아를 바라보았다.
하스티아 또한 물러서지 않으려는 듯 눈빛을 매섭게 번득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 남자예요.”
‘……?’
가소롭다는 듯이 내뱉은 한마디에 하스티아 눈은 또다시 동그랗게 떠지고 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