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공작가의 막내도련님은 암살자-188화 (188/325)

제188화. 열쇠 (4)

한편, 루나브에겐 7년전까지만 해도 ‘화’ 즉 ‘분노’ 라고 하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분노라는 것은 애초에 대상이 애정을 품은 무언가가 해를 입었을 때, 나타나는 감정이다.

허나 남은커녕 자신에게 조차 애정을 품지 않은 그녀에게, 그런 감정이 생길 리는 만무했다.

7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크게 변한 건 없었다.

여전히 남 일에 무심하며, 눈독 들이는 것 외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이 그녀의 성격.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분노를 품은 대상이 바로 빛의 기사단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이 그토록 사모하고 애정하는 남자를 세상 둘도 없는 악인이라 칭하고 모욕하는 집단이었으니까.

뭘 알지도 못하는 무지한 것들이 근거없는 낭설을 퍼트리며 그를 모욕하고 있는데,

어찌 분노를 품지 않을 수 있을까?

추악한 안개의 존재를 처단?

같잖은 개그로도 못 받아줄 말이었다.

루나브에게 있어 빛의 기사단은,

그녀의 평정심을 잃게 하는 유일한 집단이자,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하는,

벌레만도 못한 집단이었다.

가람 왕국의 수도 가울 근교,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이트 엘프 집단을 사이에 두고 가람 학회와 빛의 기사단이 대치에 돌입했다.

-스릉

이에 기사들은 뽑았던 검을 집어넣으며 일제히 태세를 전환했다.

더 이상 원래의 계획을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선 빠르게 꼬리를 내린 것이다.

나름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어째 말들이 없으시네요? 이유 없는 묵비권 행사는 제 화만 자초할 뿐인데? 그렇게 고개만 숙인다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걸 정말 모르시는 건가요?”

평소와 다른 무척이나 강경한 태도에 대부분의 학회원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진심으로 분노한 상태라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놀란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엘프들 역시 그녀를 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로, 로엘님 저 여인은 대체?”

“내 뭐라 딱 잘라 말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이 상황을 종식시킬 수 있는 여인이라는 것엔 확신이 드는구나…….”

대공간 전이를 구사할 만큼 마법에 식견이 있는 로엘조차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겉으로 봤을 땐 기껏해야 20년 남짓은 살았을까 싶은 앳된 여인이 아닌가?

허나 그 앳된 신체로부터 풍겨오는 마력은 가히 대현자의 경지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범상치 않았다.

이에 기사단 쪽에서 한 기사가 앞으로 나왔다.

“빛의 기사단 소속 중급 기사 자스틴 브리엘입니다. 타국의 기사로서 왕국의 영지로 넘어와 소란을 피운 것에 대해 우선 사과의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그는 기사단을 대표하는 마음에 손수 허리까지 숙이며 사죄했다.

“이번 일에 대해선 차후 저희 기사단 측에서 정식적으로 사과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일단은 …….”

-화르륵

저스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기사들의 주변으로부터 거센 불기둥이 치솟았다.

대부분은 마력이 움직였다는 것조차 감지하지 못한 듯, 동공이 적잖게 요동치고 있었다.

“어째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네요? 지금이 배상금 따위로 어물쩍 넘어갈 상황이라고 보시나요? 처음부터 끝까지 현 사태에 대해 낱낱이 다 불어도 모자랄 판에, 저랑 되도 않는 협상을 하려 하시네요? 진짜 죽고 싶으신 건가요?”

루나브는 한 손을 살며시 들어 올리며, 이전보다 더한 마력을 끌어올렸다.

“두손 두발 멀쩡한 상태로 이 나라를 빠져나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말아 주세요. 제가 다른 사람들이면 몰라도, 당신 족속들만큼은, 도저히 따뜻한 시선으론 못 봐줄 것 같으니까…….”

마치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원수를 마주하기라도 한 듯,

그녀의 눈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더불어 살기까지 서려 있었다.

“…….”

이에 뭔가 합심하기라도 한 듯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기사들이,

-스릉

다시금 검을 뽑아 들었다.

학회원들은 그들이 순응이 아닌, 저항을 선택했다고 판단했다.

이를 대항하기 위해 경계심을 높이려는 순간,

-스륵

대뜸 기사들이 검을 역수로 쥐는가 싶더니,

“이 모든 것은 루멘델님을 위해서일지니……!”

신을 위한 기도를 낭독하고선 그대로 목을 그어 자살했다.

단순히 목을 그은 것뿐만이 아니었다.

쓰러진 순간, 입에서 하얀 불꽃을 뿜어대며 본인들의 몸을 흔적도 없이 불태웠다.

“……!”

눈 깜짝할 순간에 벌어진 상황.

학회원들과 엘프들은 물론 루나브, 또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괘, 괜찮으십니까 루나브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슈르츠가 다가왔다.

“실수했네요. 빛의 기사단이란걸 인지한 순간부터 저도 모르게 흥분해버렸어요.”

그녀는 입술을 아득바득 깨물며 실수를 자책했다.

허나 오래가진 않았다.

루나브는 바로 학회원들을 향해 다음 지시를 내렸다.

“사체 수습하시고,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남아있는 흔적이 있는지 철저하게 조사하세요.”

“예. 루나브님!”

고개를 숙인 학회원들은 바로 지시를 이행했다.

이윽고 루나브의 시선은 아직 현장에 남아있는 화이트 엘프들에게 향했다.

“좋은 기억만 가져가도 모자랄 판에, 타지까지 와서 좋지 않은 경험을 하고 계시네요.”

학회원들은 아직 경계심이 풀리지 않은 듯, 불안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해 주세요. 남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건, 딱히 제 취미가 아니거든요.”

설득인지, 협박인지 모를 모호한 말과 함께,

루나브는 평소와 같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그들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 * *

휘황찬란하다 못해 눈이 찌푸려지는 공간.

내게 있어 마냥 낯선 공간은 아니다.

전생에서 성검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헛걸음한 곳 중 하나다.

일단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인원은 넷.

빛의 기사로 추정되는 기사 한 명, 우람한 덩치의 화이트 엘프 한 명, 제단 위에서 놀란 토끼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하스티아, 그리고…….

[누군가 했더니 루멘델의 떨거지였네?]

제국의 성녀 네프로디테 아이리스.

나로선, 차마 웃으며 반겨줄 수 없는 여인이다.

‘……!’

뭔가 반가운 척을 하고 싶은데, 눈치가 보이는 듯 우물쭈물하고 있는 하스티아의 얼굴이 아주 가관이다.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반갑게 손이나 흔들 상황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

오히려.

-챙!

다른 쪽에서 나를 먼저 반겨주었다.

하얀 광채를 내뿜는 예리한 장검이 검광을 흩뿌리며 내게 파고들었다.

검의 주인은 속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정체가 뭐냐고 물으면 답해줄 생각이 있나?”

낯선 상황에도 놈은 당황하지 않고 능글맞은 질문을 던졌다.

검을 잡는 자세로 보나, 느껴지는 마력으로 보나 어설픈 풋내기는 아니었다.

당연히 답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 나로선, 그냥 입만 다물었다.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겠군.”

예상하였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는 모습이 적잖이 내 심기를 건드렸다.

“그럼 내 소개를 하지, 난 빛의 기사단 소속 상급 기사 미한 하셀러스라고 하네. 성녀님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고 있지.”

이름을 들으니 얼추 기억이 났다.

성녀의 최심복으로서 그녀의 곁에 항상 붙어있던 기사.

뭐 나로선 당연히 좋은 기억을 갖고 있진 않다.

“자네가 말을 안 하니, 내가 한 번 유추해볼까 하네. 밤하늘을 물들인 듯한 검은 머리에 보기 드문 단검의 사용자, 선명히 느껴지는 어둠 속성의 마력까지. 내 자랑은 아니지만, 내 급습을 이리 쉽게 막은 사람이 그리 많진 않거든? 검을 쥔 자세나, 움직임으로 보아하니…… 자네 암살자로군?”

가증스런 뱀눈이 폼으로 있진 않은가 보다.

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암살자도 그냥 암살자가 아니야. 근거 없는 추측이긴 하지만, 내 오랜 기사의 감각이 얘기해 주는군. 자네가 바로 검은 안개의 추종자, 미스트의 일원이라는 걸 말이야…….”

“…….”

“고개라도 끄덕여주면 어디 덧나나? 유도리가 없는 성격이군.”

실제로 여태껏 많이 들어온 말이다.

그런 말을 한 놈들 중에 아직까지 살아 있는 놈들이 없어서 그렇지.

“이유 없는 침묵은 긍정이란 말이 있지. 그럼 내 빛의 기사로서 차마 자네를 심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군.”

이유는 모르겠지만, 녀석의 입가엔 좀처럼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혹여나 간을 보겠답시고 힘 조절하는 짓은 안 했으면 하네. 난 자네가 전력을 다하는 걸 보고 싶어서 말이야. 물론 나 역시 전력을 다해 싸움에 임할 생각이네.”

내가 비록 걸어오는 싸움은 거절 안 하는 성격이라곤 해도, 지금만큼은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나보다 더 네 놈과의 싸움을 갈망하는 전사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말이다.

-쾅!

낙석이 떨어진 것마냥, 바닥이 움푹하고 파였다.

휘몰아치는 눈바람 안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두 눈.

정말 불타는 얼음이란 말이 딱 어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붙고 싶다던, 네놈의 바람을 이루어주도록 하지!”

방금 전까지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었다고 하기엔 믿을 수 없는 모습이다.

미한이란 이름의 기사는 재빨리 몸을 틀어 엘프의 일격을 회피했다.

딱 꼴을 보아하니, 내가 오기 전부터 이미 한바탕하고 있었던 거로 보이는데,

굳이 끼어들어 쓸데없는 힘을 낭비할 필욘 없을 것이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제단 쪽으로 향했다.

다가갈 새도 없이 그녀가 먼저 내쪽을 향해 다가왔다.

“거의 60년 만이네요. 안개의 추종자를 직접 대면하는 일은…….”

60년을 살아왔다는 얼굴치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동안이다.

뭐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을 기준으로 한다면 또 다르겠지만.

“당신의 얼굴을 보니, 굳이 제 소개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저는 누구인지, 이 장소는 어디인지, 뭘 하기 위해 있었는지 이미 다 알고 계신 얼굴이에요.”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 당신이 이곳에 왜 왔는지 모르겠네요. 조직으로부터 의식을 막아달라는 임무라도 받고 오셨나요?”

“…….”

“끝까지 말을 안 하시는군요. 훤칠하신 외모와 어울리는 미성을 기대했는데, 아쉽습니다.”

성녀는 부드러운 손짓으로 본인을 얼굴을 감싸 쥐더니, 급기야 감싸 쥔 부분에서 빛이 일어났다.

그러고 있기를 5초 정도.

뭔가 대단한 변신이라도 하나 싶었지만, 이후 손을 뗀 얼굴은 이전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딱 하나.

얼굴 양쪽에 자라난 길쭉한 귀를 제외하고선.

“영광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제 본모습을 인간에게 보여드리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니까요.”

그녀는 한결 더 진해진 눈웃음과 함께 슬그머니 손을 올리며 주문을 읊었다.

“스스로의 죄를 고백하여 신께 용서를 구하시길…….”

* * *

‘저 마법은?’

하스티아는 지금 여인이 읊은 주문이 무얼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고해성사(The Confession).

빛 속성 마력을 전능한 신의 힘으로 전환하여, 대상을 정신적으로 굴복시키는 마법.

단순히 마법 등급이 높다고 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닌, 속성 수치 50% 이상의 높은 수치를 보유한 이들도 간신히 흉내만 낼 수 있다고 알려진 빛 속성 최상위 마법이었다.

정신 붕괴(Mental Breakdown)처럼 단순히 충격을 주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칫 그 절대적인 힘에 현혹되기라도 하면, 본래의 인격 자체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굉장히 위험한 마법이었다.

그만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존재 자체가 이 땅에 한두 명 정도밖에 없을 것이라 들었지만,

‘저, 정말로 이게 되는 거야?’

눈앞의 여인, 아니 엘프는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로 그 마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놀란 마음에 입을 못 다물고 있는 하스티아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안의 모습이 무척이나 대비되었다.

-쿠르릉!

머지않아 허공에서 천사의 형상을 가진 거대한 개체가 나타났다.

스르륵 고개를 돌린 형상은 곧 제단 밑에 있는 시안을 향해 손을 뻗었으며, 마치 신이 계시를 내리듯, 멀뚱히 서 있는 그에게 빛을 내리쬐었다.

시안은 아무런 저항이나 대처도 없이, 내리쬐는 빛을 묵묵히 맞이하였다.

‘시, 시안님이 위험해!’

이대로 있다간 시안의 인격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

이를 원하지 않는 하스티아로선, 저지할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허나 신의 힘까지 이끌어내는 방대한 마력을 자신이 감당할 방법은 없을 터.

빠르게 머리를 굴린 하스티아는 급기야 눈을 감곤 정신 집중에 돌입했다.

‘시안님! 시안님! 정신 차리세요!’

그와의 유일한 소통 수단인 정신 감응을 통해, 시안의 마음을 일깨울 생각이었다.

‘…….’

허나 대답은커녕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일어나세요 시안님! 이런대서 주무시면 입 돌아가요! 잠은 편한 곳에서 주무셔야 한다고요!’

급기야 생각나는 대로 뱉어버리는 아무 말 대잔치가 시작됐다.

이렇게라도 그의 마음을 깨울 수 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에 계속해서 부름을 이어가던 순간,

‘그만해.’

‘……?’

‘머리 울린다.’

어느샌가 고개를 든 시안이 그녀를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쐐액!

그러곤 빛보다 빠른 속도로 검을 빼서 제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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