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열쇠 (3)
지혜롭고 자애로운 성품.
여신의 환생이란 말을 딱 어울릴 정도의 아름다운 미모.
세간의 모든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그 매력을 온전히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사자이자, 빛의 기사단의 정신적 맹주, 성녀 네프로디테 아이리스.
제국을 넘어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모든 이들로부터 무척이나 고귀한 존재로 여겨지지만,
밝은 후광에 가려진 그녀의 진면을 대부분은 알지 못했다.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인간의 번영과 대륙의 축복을 위해 항상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는 그녀가,
사실은 인간이 아닌, 화이트 엘프라는 것을.
“3년 전이었나요? 가르니안과 제가 처음 만났던 날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네요.”
슬그머니 눈을 뜬, 그녀가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 당신은 프루이나로 찾아왔던 저희를 가장 먼저 반갑게 맞이해주셨죠.”
이에 가르니안의 눈살이 옅게 찌푸려졌다.
맞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만큼 그는 그녀를 가볍게 대하지 않았다.
외부인의 방문을 극도로 경계하는 화이트 엘프의 특성상, 가르니안은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 그녀를 저지하였다.
더불어, 이 이상 접근할 시 살생도 저지를 수 있다는 강력한 경고까지 던졌지만,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 당시 가르니안이 보았던 인간은 둘.
성녀 네프로디테와, 금발 머리의 이름 모를 기사였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네요. 제가 화이트 엘프였다는 걸 밝히지 않았다면, 전후 사정을 들을 것도 없이, 당신은 저희를 죽였을 거예요. 그렇죠?”
가르니안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아니라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동족의 기운은 외면을 감췄다 해서 내면까지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화이트 엘프라는 것은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역할, 임무, 책임. 다르게 보면 참 잔인한 말이 아닐 수 없어요. 누군가로부터 강요된 것 같으면서도, 나 아니면 차마 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죠.”
신의 비밀을 간직한 열쇠, 그리고 그 열쇠를 지키는 수호자.
지난 300년 동안, 변함없는 마음으로 수행해왔던 가르니안의 역할이었다.
“그래서일까요? 전 가르니안과 닮았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도 다른 점 또한 확실하게 있었죠.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두가 나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가르니안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오로지 자신 하나만을 희생하려 했으니까.”
네프로디테의 시선은 가르니안이 아닌, 여전히 하스티아에게 향해 있었다.
“그래도 우리의 길이 같다는 건 부정할 수 없어요. 신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열쇠……. 빛의 질서로 재구축된 지금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 비밀을 계속해서 지켜야만 하죠.”
“이 이상의 말은 듣지 않겠습니다.”
그녀의 감언이설에 현혹되지 않겠다는 듯, 그가 말문을 끊었다,
“제가 네프로디테님을 따른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하스티아님 안에 봉인된 열쇠의 힘을 당신에게 넘기는 것. 그걸로 다가오는 대륙의 위협을 막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랬죠.”
“그걸로 화이트 엘프 일족의 오랜 숙원으로부터 해방 시켜 준다고 하셨습니다.”
“맞아요.”
“분명 하스티아님을 열쇠가 아닌 한 명의 평범한 엘프로서 자유롭게 해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없어요.”
가르니안의 거듭된 물음에도 그녀는 여유롭게 화답했다.
“한데, 어째서…….”
반면 가르니안의 눈은 분노에 잠식된 나머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손에 그런 걸 들고 계신 겁니까?”
분을 마른 것마냥 곱디고운 그녀의 오른손엔,
용도를 알 수 없는 한 자루의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런 말도 있죠? 진정한 자유는 죽음의 순간에서 얻게 되는 것이라고. 생전에 겪었던 모든 고행과 고난에서 벗어나 안식을 맞이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죠.”
그녀의 목소리엔 미묘한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전 죽음으로 그녀를 자유롭게 해줄 겁니다.”
그러곤 이후에 할 일을 예고하기라도 하듯, 단검을 쥔 손을 보란 듯이 내빼었다.
“네프로디테!!”
수호자의 거센 울부짖음이 공간 전체에 울려퍼졌다
“우릴 처음부터 속인 것이오?”
“속이지 않았어요. 적어도 다가오는 위협으로부터 모두를 지키겠다는 말은 진심이었으니까.”
극지방의 매서운 추위에도 떨지 않았던 그의 몸도 가혹한 배신감 앞에선 어쩔 수 없었다.
가르니안은 주저할 것 없이 바로 네프로디테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
첫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이상함을 감지하고선 바로 발을 멈췄다.
백색 마나의 빛이 연기 솟듯 피어오르는 바닥.
숨겨놓은 함정처럼 소리소문없이 발동한 마법진, 가르니안은 그게 무엇인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제한 결계?”
“제가 깜빡하고 경고해드리는 걸 잊어버렸네요. 그냥 그 자리에서 얌전히 지켜 보시는 게 좋을 거란 걸 얘기해드렸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가르니안은 분한 마음에 이만 아득바득 갈았다.
허나 포기하려는 마음은 없었는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바로 체내의 잠들어 있는 힘을 이끌어냈다.
-우우웅
눈 속성의 마력과 엘프의 고유의 영기가 더해져, 주변에 거센 눈회오리가 휘몰아쳤다.
-콰직
이에 마법진 일부가 선명한 소리를 내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단순히 힘을 방출한 것만으로도 결계를 무너트릴 수 있다니, 참 대단한 경지로군요.”
“……!”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가르니안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이런 비겁한 방법이라도 써야지.”
-서걱
살집을 가르는 참음과 함께, 다리가 풀린 가르니안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입가에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으며, 눈은 분노와 혈기에 잠식된 나머지 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쓰러진 그의 앞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쥐고 있는 상급 기사 미한이 자리하고 있었다.
“안타깝군요. 빛의 기사로서, 화이트 엘프 최고의 전사와 정식으로 맞붙고 싶은 바람도 있었지만, 뭐 어쩌겠소? 이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지.”
미한은 허탈한 한숨을 내쉬면서도, 입가에 서린 미소만큼은 거두지 않았다.
그 엄청난 모욕감에 가르니안은 치를 떨었다.
“대체 무엇이오?”
그러면서도 분노와 의문이 뒤섞인 시선으로 물었다.
“당신들이 말하는 그 위협이란 것이 신도 두려워할 만큼 거대하기라도 한 것이오? 대체 무얼 두려워하길래 신의 비밀까지 파헤치려 하는 것이오?”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난 네프로디테는 천천히 제단으로 올라가 고이 잠들어 있는 하스티아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안개입니다.”
“안개?”
“빛을 위협하는 안개의 존재……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고 위협하는 이 세상에서 절대로 있어선 안 될 부정의 존재죠.”
여유가 가득했던 그녀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차가움이 느껴졌다.
“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사자이자, 이 땅의 평화를 기원하는 성녀로서 그 존재를 절대 두고만 볼 수 없습니다. 봉인된 구시대의 기록을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를 없애야만 하죠.”
“…….”
“그래야 그분의 가호가 이 땅에 더 오래 지속할 수 있을 터이니…….”
정색으로 얼룩졌던 그녀의 얼굴은 다시금 경의와 환희로 뒤덮인 긍정의 얼굴로 변모하였다.
그러곤 손에 쥔 단검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알 수 없는 기도문을 읊조렸다.
“이 모든 것은 루멘델님을 위해서일지니…….”
신에게 바치는 마지막 기도를 끝으로 그녀는 마침내 검을 내리꽂았다.
-슈욱
“……!”
허나 그녀의 검은 온전히 내리꽂지 못한 채 그만 허공에서 멈춰버렸다.
누군가 힘이나 마법을 써서 그녀의 움직임을 제한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을 마주하고선, 당황함에 몸이 멈춰버렸을 뿐.
“여, 여기는?”
어느 틈엔가 잠에서 깨어난 하스티아가 낯선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 * *
300년 전, 길고 길었던 신마 전쟁이 종식된 이후, 신계의 존재들은 화이트 엘프 일족에게 하나의 계시를 내렸다.
바로 구시대의 기록을 보관하고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도록 유지할 것.
긴 전쟁으로 의해 피폐해진 구시대의 흔적은 모두 지우고, 새롭게 창조된 신시대의 역사를 써나갈 것이라고 신들은 말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비밀을 봉인할 열쇠.
선택된 엘프의 몸에 특정한 힘을 봉인하고, 수명이 다하면 다른 엘프에게 그 힘을 계승하여, 혹시 모를 위협으로부터도 지킬 수 있도록 신의 가호를 통해 지킬 것이라 했다.
계시를 받아들인 화이트 엘프 일족은 3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신의 비밀을 지닌 열쇠의 존재를 사력을 다해 지켜왔다.
“……?”
밝은 광채가 사방을 비추고 있는 낯선 빛의 공간.
하스티아는 그 중심에 홀로 외로이 서 있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없었으며, 이어진 길을 나아가도 똑같은 풍경만 반복되었다.
‘아무도 없는 건가?’
급기야 찾는 것을 포기한 하스티아는 제 자리에 멈춰 섰다.
외로움. 고독함.
마치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릇 모든 이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으면서도, 신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하에 그녀는 10년 동안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저 일부의 일족원들과 정신감응으로 간단한 소통만 할 수 있었을 뿐.
정작 그녀가 진심으로 마음을 터놓으며 고민을 이야기할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
앞서 이 역할을 수행했었던 선대의 일족원들도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그 누구도 공감해줄 수 없는 무게감.
혹여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내려놓기라도 한다면, 자신을 보호해주는 수많은 이들을 배신하게 되는 것 같아,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차라리 이 상태에서 얼굴을 파묻고 잠에 든다면 어떨까?
그렇게 잠에 들어서 영영 깨어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무거운 책임감에 시달릴 필요 없이,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차라리 그러는 편이 더 나을지도…….
그냥 이렇게 혼자 눈을 감고 잠에 빠진다면,
이젠 그 누구도 자신을 위해 그런 힘든 고생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밝은 빛이 뿜어내는 낯선 무력감에 빠져들기라도 한 것인지.
하스티아는 스르르 눈이 감기며 그대로 바닥에 몸을 누웠다.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영원한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일어나.’
‘……!’
머릿속에 울린 익숙한 한마디에 하스티아는 바로 눈을 떴다.
언제 그랬냐는 듯 황급히 일어나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는 것은 덤.
간결하면서도 무심한 한마디였지만, 무기력에 빠져있던 그녀를 일깨워주는 데엔 충분했다.
-스스스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빛의 공간 속으로 어디서 왔는지 모를 낯선 안개가 점차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그 기운에 이끌린 하스티아가 가련하게 손을 뻗은 순간,
-화악
하스티아의 정신은 그대로 다른 곳으로 전이되었다.
“……!”
그렇게 깨어난 또 다른 낯선 곳.
‘여, 여기는?’
요상한 돌바닥 위에 잠을 자고 있던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매만지던 것도 잠시, 곧 눈앞에 있는 여인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꺄악!”
자신에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속삭이며 잠에 들게 했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그녀의 손엔 용도를 알 수 없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으며, 표정은 마치 이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당황함이 역력해 있었다.
그 뒤론,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는 일족원 가르니안이,
그 옆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백색 갑옷의 기사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모두 자신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는 상황.
이윽고 하스티아의 시선은 그들을 넘어, 열린 문 너머에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또 한 명의 존재에게 향했다.
흰 종이에 찍혀 있는 검은 점처럼, 그 누구보다 선명하게 보이는 남자.
그녀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시안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