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열쇠 (2)
상비 병력이 100명조차 안 되는 소규모 영지도 외부인이 출입할 땐 수속 절차를 밟는다.
하물며 한 국가의 수도라고 불리는 곳은 어떠하겠는가?
그 어느 때 보다 세밀하고 빡빡한 절차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창문 너머로 비스듬히 보이는 가울의 경비병들.
용병 생활을 하며 여러 도시를 전전한 슈르츠로서도, 마른침을 절로 삼키게 하는 웅장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과연 한 국가의 수도이기 전에 마법의 시초지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일까?
이전엔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우면서도 복잡한 절차가 이루어질 거라 생각했지만…….
“……?”
그들이 탄 마차는 아무런 절차도 없이 바로 성문을 통과해버렸다.
수속 절차는커녕 경비병들의 제지조차 없던 상황.
적잖이 당황한 슈르츠와 달리, 루나브는 늘 있었던 일이라는 듯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놀랄 거 없어요. 제 기운을 사전에 인지해서 보내는 것뿐이니까.”
“기, 기운 말입니까?”
“네. 성문에 다다르기 전부터, 일부 기사들에게 정신 감응을 해서 제가 왔다는 걸 인지시켜놨거든요.”
“굳이 왜 그런 일을…….”
“귀찮으니까요.”
간단하면서도 명쾌한 대답에 슈르츠는 바로 수긍했다.
“쭉 그래오셨던 겁니까?”
“네. 오히려 문제가 있다 싶으면 제가 먼저 내려서 확인을 했죠. 성벽의 상태가 좀 안 좋다든지, 아님 경비병들 중 조는 사람이 있다든지, 대부분은 사소한 문제들이에요.”
슈르츠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경직된 얼굴로 마차를 보는 기사들의 눈엔, 하나같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듯한 감정이 잔뜩 엿보이고 있었다.
“제 딴에는 그냥 작은 배려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째서인지 기사님들은 죄다 무서워하시더라고요. 그렇게 큰 지적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 이유를 정말로 몰라서 그러는 거냐는 물음이 목 언저리까지 차오른 것을, 슈르츠는 빠르게 가라앉혔다.
“한데 오늘은…….”
“……?”
“좀 심각한 문제가 있네요.”
팔짱을 끼며 잠자코 앉아있던 그녀가 갑자기 마차의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루, 루나브님?!”
슈르츠는 물론, 마차를 뒤따르던 학회원들 역시 덩달아 놀란 상황.
그녀의 급박한 발걸음이 멈춘 곳은 성문 밖에 사열한 경비병들의 앞이었다.
“근무 중 이상 무! 루나브 레인리버님을 뵙습니다!”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기사들은 숨을 죽인 얼굴로 그녀에게 경례를 올렸다.
그 경례를 받는 듯 마는 듯, 무심하게 지나친 루나브는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진득한 시선을 보냈다.
“오늘 출입한 인원들이 어떻게 되나요?”
“스파니아 왕국에서 온 상인 집단이 넷, 그 외에 개인적인 용무로 방문한 수백 명의 인원이…….”
기사는 손에 들린 수십 장의 방문 기록서를 전부 읽을 기세로 하나하나 읽어나갔다.
“그중에 사람이 아닌 존재들은요?”
“예! 사람이 아닌 존재들은…… 예?”
경직된 얼굴로 보고를 올리던 것도 잠시,
무어라 대답하기 힘든 난해한 질문에 기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상황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어째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구린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 같네요…….”
미간을 찌푸린 루나브의 얼굴에선 의도치 않은 불쾌함이 점차 번지고 있었다.
* * *
-텅그렁
벼락 떨어지듯 낙하하던 장검은 투명한 얼음 방패에 막혀 바닥에 힘없이 나뒹굴었다.
이에 방패를 거둔 가르니안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전방을 바라보았다.
하스티아는 보이지 않았다.
로엘이 시전한 대공간 전이를 통해 빠져나간 것이다.
모든 마나를 소진한 로엘은 저항할 여지도 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힘겨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가르니안에겐 별로 개의치 않을 상황이지만, 그의 시선은 하스티아를 탈출시킨 일족원들이 아닌, 전방에 있는 백색 갑옷의 무리에게 향해있었다.
“오해하지 마시오. 가르니안. 어디까지나 열쇠가 도망치는 걸 막으려 했을 뿐이니…….”
무리의 선두에 있는 중년의 기사가 무심한 눈빛으로 말을 전했다.
“겨우 오해하지 말라는 말 정도론 충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빛의 기사단 소속 상급 기사 미한 하셀러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소. 그래도 여의찮다면 뭐, 내 그대의 앞에서 루멘델님께 맹세라도 해드리지.”
미한은 이제 됐냐는 양 가르니안을 탐탁지 않은 어투로 화답했다.
“그분께 듣지 못하셨습니까? 작은 상처 하나 없이 소중히 모셔야 할 분입니다. 도주를 막으려 했을 뿐이라는 변명이 아닌, 제대로 된 이유를 설명하셔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굳게 쥐어진 가르니안의 두 주먹에서 살벌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저 또한 저만의 방식으로 당신들의 입을 열게 할 것입니다…….”
협박성 짙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미한은 코웃음을 치며 반박했다.
“착각하지 마시오. 가르니안. 이곳은 화이트 엘프의 영역이 아니오. 우리 인간들의 영역이지. 그대의 맘에 들지 않는다고 자유롭게 힘을 쓸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
“뭐 그렇다 해서 우리의 힘을 쓸 만큼 자유로운 땅도 아니지. 혹여나 왕국의 병력이 들이닥쳐 골치 아픈 일이 생기기 전에, 그만 우리의 일을 진행하는 것이 어떻겠소?”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대담한 태도로 반박하니, 가르니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건드리면 툭 하고 터질 듯한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이 유지되던 것도 잠시,
변함없는 자세로 자리하고 있는 미한의 곁으로 한 기사가 다가와 무언가를 속삭였다.
이에 미한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움직였다.
“성녀님께서 열쇠를 직접 확보하셨다는군요.”
“……!”
“본래 가고자 했던 방향에서 조금 어긋나긴 했지만, 뭐 어떻소? 도착지가 같으면 그만이지.”
숲을 지키는 대목처럼 굳건함을 유지하던 가르니안의 눈빛이 그제야 살짝 흔들렸다.
“따라오시오. 가르니안. 성녀님께서도 당신이 오는 것을 원하고 계실 겁니다…….”
할 말을 끝낸 미한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한 가르니안의 곁으로 그를 따르는 일족원들이 다가왔다.
“어쩌시겠습니까 가르니안님? 여차하면 저희 중 일부가 가르니안님 곁에 붙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너희는 이곳에 남아 로엘님을 비롯한 다른 일족원들을 지켜주거라.”
마음을 굳힌 가르니안은 다시금 앞으로 발을 내디뎠으며, 머지않아 기사들과 함께 길 너머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남겨진 로엘 일행의 곁엔 가르니안을 따르는 일족원들이 모여들었다.
“자네들이 말해보게! 자네들이라면 이야기할 수 있지 않겠는가? 대체 가르니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야?”
일족원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누구 하나 당당히 설명하지 못했다.
“저희는 그저 가르니안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이건 순전히 모두를 위해서…….”
“그게 무슨 당치도 않는 말이야! 우리가 지켜야 할 존재가 그새 가르니안님으로 바뀌기라도 했어? 입이 있으면 다들 설명이라도 해보란 말이야!”
흥분한 알폰스가 노발대발하며 소리쳤지만, 일족원들은 말없이 시선만 회피했다.
“일단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조용히 기다리다 보면 전부 끝나있을 겁니다. 하스티아님도 무사히 돌아오실 것이며, 모든 죗값은 프루이나로 돌아갔을 때 당당히 치르겠…….”
그리 좋지 않은 대화가 이뤄지고 있는 그들의 곁으로 아직 돌아가지 않은 빛의 기사들이 다가왔다.
“이분들을 건들진 마십시오! 저희가 알아서 데리고 가겠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접근을 만류했지만, 기사들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이유 없는 침묵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으며, 그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한 일족원이 기사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나섰다.
“그러고 보니 전부터 묻고 싶었습니다. 대체 제국도 아닌, 이런 타국의 땅에 저희를 왜 끌어들인 겁니까?”
“…….”
“이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제국에서 모든 걸 진행했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이유도 없이 하스티아님을 납치한 이유는 무엇이며, 그 성녀란 자는 대체…….”
-푹
어지러이 뒤엉켜있던 의문과 의심을 풀려 했던 것도 잠시,
살집을 파고드는 섬뜩한 소리에 말문이 턱하고 막혀버렸다.
불안에 찬 눈동자를 서서히 아래로 내린 일족원의 시야엔,
붉은 선혈의 분수로 잔혹하게 물들여진 차디찬 검날이 보이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쑤욱!
기사는 물음에 대답으로 검을 자비 없이 뽑아냈다.
일족원은 외마디 비명조차 없이 동공이 풀리며, 그 자리에서 뒤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레오!!”
이를 지켜보던 다른 일족원들이 황급히 달려와 그를 받았다.
레오는 눈꺼풀이 반쯤 닫힌 맹한 눈으로 간신히 호흡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족원들은 일단 흐르는 출혈부터 막기 위해 지혈 및 치유 마법을 시전 하였다.
세상 누구보다 다급한 그들의 모습을 기사들은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대들의 말이 맞습니다. 이건 모두를 위한 일이지요.”
“……!?”
“허나 그 모두에 그대들까지 포함되어 있진 않습니다.”
일제히 검을 뽑은 기사들은 빛의 마력을 머금은 순백의 칼날을 전부 화이트 엘프들을 향해 겨누었다.
“혹여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시고 계신다면 그대로 접어주십시오. 이것은 그대들과 저희가 처음 손을 잡았을 때부터 예정된 일이었습니다. 하물며 그분의 뜻이기도 하죠…….”
일족원들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저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눈으로 기사들을 노려만 볼뿐.
이에 기사들은 어떠한 주저함이나 망설임 없이, 그들을 처리하기 위해 서서히 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성스러운 빛의 은총이 그대들을 지킬 것이니…….”
아련히 퍼지는 주문과 함께 화이트 엘프들의 주위로 새하얀 장막이 드리워졌다.
“……!”
엘프들은 물론, 검을 들어 올린 기사들까지 전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대범하다고 해야 할까요? 아님, 겁을 상실했다고 해야 할까요? 누가 보면 이곳이 우시프 제국인 줄 알겠어요?”
무심한 목소리에 담긴 은연한 분노.
레메아 협곡에서 사는 마수의 울음소리라도 들은 것마냥, 기사들은 몸에서 절로 오한이 돌았다.
덩달아 느껴지는 이질적인 마력의 기운은 덤.
이에 기사들은 목소리를 따라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당신들, 빛의 기사단 맞죠?”
당당함이 묻어나는 팔짱과 불쾌함이 잔뜩 묻어난 도도한 눈빛으로 그들을 마주하고 있는 하늘빛 머리의 여성.
루나브였다.
* * *
위를 올려봐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순백의 기둥과 그 사이로 길게 펼쳐진 복도.
둘은 아무런 대화나 잡설 없이, 빛나는 복도 위를 무심히 걸어 나갔다.
“그러고 보니 가르니안. 그대는 300년 동안 신의 열쇠를 지켜왔다고 들었소.”
“발언을 조심해주십시오. 열쇠라는 단어가 무척 거슬립니다.”
“허허. 오해하실 필요 없소. 순전히 내 존경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으니.”
미한은 능글맞은 웃음으로 넘기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종족의 차이라고 봐야 할까요? 그대의 경우만 봐도 우리 인간이 엘프에 비해 얼마나 나약한 종족인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저란 놈이 수십 년을 보전해온 기사의 신념도 지금에 와선 살짝 흔들리고 있는 마당에, 무려 300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일족을 지켜오셨다니……. 참으로 든든한 수호자가 아닐 수 없군요.”
미한은 손수 박수까지 치며 그의 굳은 정신을 칭찬해주었다.
가르니안은 별로 탐탁지 않은 듯 오히려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사는 보금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고 엘프고 할 것 없이 모든 종족이 가진 본성입니다. 허나 때로는 그 본성이 서로 겹칠 때도 있죠. 그때는 영역싸움으로 번지기 마련입니다.”
두 남성은 복도 끝에 자리한 거대한 철문 앞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췄다.
철문 너머에선 이 공간의 주인이 내뿜는 빛의 마력이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들어가시죠. 성녀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미한은 옆으로 살짝 물러나, 안으로 들어갈 것을 안내했다.
가르니안은 개의치 않고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끼이익
신의 계시가 내려지듯 천장에서 내려온 한 줄기의 빛이 공간의 중심을 비추고 있었다.
낮게 솟아오른 제단에는 가지런히 손을 모은 채 잠들어 있는 하스티아가,
그 앞엔 경건한 자세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이 공간의 주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서 와요. 가르니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