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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작가의 막내도련님은 암살자-183화 (183/325)

제183화. 신의 보호를 받는 자 (4)

이 낯선 타지에서 스스로를 지키겠답시고 들고 다니는 호신용이 아니다.

검 끝에서 뚝뚝 흐르는 이 녹 빛의 진득한 액체를 보라.

독이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이 엘프는 순전히 나를 죽일 목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익!”

꼴에 저항하겠답시고 내 얼굴로 다른 쪽 주먹을 휘둘렀다.

고개를 틀어 가볍게 회피한 나는 바로 녀석의 비어있는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날갯죽지 아랫부분을 강하게 짓눌렀다.

“아악……!”

비명을 지르려는 것을 바로 녀석의 주둥이를 움켜쥐며, 소리가 나오는 것까지 완전히 차단했다.

급소가 괜히 급소겠는가?

작은 힘으로도 최상의 고통을 만끽하게 할 수 있는 만큼, 이보다 더 확실하게 노릴만한 곳도 없다.

하물며 엘프의 신체라 해봤자, 인간과 크게 다를 것도 없지.

고통이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진 않을 것이다.

딱 10초.

마음 같아선 일생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고통을 느껴본 소감이 어떠냐고 묻고 싶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쉴 틈 없이 바로 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너 대체 뭐야? 어째서 하스티아님 곁에 너 같은 놈이 있는 거냐고!”

지금 질문을 해야 하는 건 네놈이 아닐 텐데?

내가 선사해준 깨달음의 시간이 아무래도 부족했던 모양이다.

이번엔 의문조차 생길 일이 없도록, 두 번째 깨달음의 시간을 주기 위해 다시금 손을 들어 올렸다.

“자, 잠깐! 오해하지 마! 난 그저 네가 하스티아님께 해코지하려는 것 같아서 나타난 거야! 다른 뜻이 있었던 게 아니라고!”

이런 상황이 닥칠 때마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이왕 변명할 거면 좀 그럴싸한 거로 했으면 좋겠다.

이 어리석은 엘프를 비롯해, 저 모퉁이에 숨어 차마 나올 생각조차 안 하고 있는 나머지 일원들까지.

이들은 도시 입구에서부터 우리의 존재를 의식하고선 계속해서 뒤따라왔다.

아마 하스티아와 마찬가지로 같은 화이트 엘프 기운을 인지하여 찾아온 것이겠지.

실종된 줄만 알았던 동료가 멀쩡히 살아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녀의 생환을 진심으로 바란 정상적인 동료들이라면 숨을 필요 없이 바로 나타나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을 것이다.

허나 이들은 그러지 않았다.

반갑게 나타나긴커녕, 오히려 악의를 넘어선 살의의 마음을 가지고선 은밀하게 뒤따랐다.

‘제 목소리 들리시나요? 저 하스티아에요! 주변에 아무도 안 계시나요!’

이를 알 리 없는 어리숙한 엘프님께선 사방에 정신 감응을 해대고 있었다.

다른 곳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곳은 가람 왕국의 수도 가울이며, 7성급 이상의 마법사들이 즐비한 가람 학회의 본관 앞이다.

나 외에 저 정신 감응을 들을 수 있는 인간이 넘치고 넘친다는 뜻이지.

저렇게 좋다고 남발하다간 화이트 엘프가 아닌, 학회의 마법사들에게 먼저 끌려갈 것이다.

상황이 여유롭지 않음을 판단하고선, 다시금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더 이상의 경고는 없어. 지금부턴 넌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어떤 사설도 허용하지 않아.”

슬며시 들어 올린 반대쪽 손을 다시 놈의 날갯죽지에 갖다 대니,

엘프는 어떤 물음에도 대답해주겠다는 처량한 눈빛으로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상했다.

분명히 주변에서 일족원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어째 나타나 주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혹여 자신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것일까 싶어, 마나를 더욱 정밀하게 조절해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하스티아는 답답한 마음에 양 볼살을 크게 부풀렸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다시금 눈을 감고 정신 감응에 집중하려는 순간,

-턱

‘……!’

기척 없이 다가온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깜짝 놀란 하스티아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시, 시안님?’

다름 아닌 자신과 조금 전에 헤어졌던 시안이었다.

“…….”

시안은 아무런 말이나 설명 없이, 당황한 하스티아를 어디론가 묵묵히 끌고 갔다.

하스티아는 그저 어버버한 얼굴로 입만 벌리고 있었으며, 이유는 모르겠지만 양 볼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런 낯부끄러운 상태로 어딜 가나 싶다가도, 둘의 발걸음은 얼마 못 가 거리 한가운데에서 멈추고 말았다.

“……?”

이에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니,

둘이 바라보고 있는 거리의 끝자락으로부터,

후드를 뒤집어쓴 다수의 사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마주한 방향에서 오는 둘을 발견하고선, 하나둘 시선을 돌렸다.

‘제 일족원들이에요!’

찾던 이들을 발견한 하스티아는 반가움의 미소를 지었지만, 마주 선 일족원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제 목소리들 듣지 못한 것 같아서 걱정했었는데! 시안님께서 찾아 주셨…….’

시안을 돌아보며 반색하던 것도 잠시,

하스티아의 얼굴은 이내 돌처럼 굳어버렸다.

무심한 눈빛으로 전방을 응시하고 있는 시안의 눈동자에, 이유 모를 경계심이 섞여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꽈악

시안은 하스티아의 손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휘익

그러곤 나아가던 방향이 아닌, 몸을 틀어 바로 옆 골목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시, 시안님 왜 그러세요? 제 일족원들과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하스티아의 다급한 물음에도 시안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달리는 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쑤욱

‘……!’

대뜸 그녀의 하체를 들어 올리고선, 벽을 짚고 건물 위쪽으로 날아올랐다.

얼떨결에 안긴 하스티아는 얼굴이 사과처럼 빨개졌으며, 말은커녕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의도치 않은 둘만의 도피 시간이 이어지고,

다시금 땅에 발을 내린 하스티아의 얼굴 앞으로 시안이 손가락을 튕겼다.

“정신 차려.”

깜짝 놀란 하스티아는 급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시안의 반쯤 내려앉은 눈꺼풀에서 한심스러워하는 기색이 잔뜩 엿보이고 있었다.

“너희 일족원이 이 땅에서 살고 있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

시안은 숨 고를 시간도 없이 바로 질문을 날렸다.

‘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 아니고, 인계에 갔다 온 경험이 있는 일족원들을 통해 들었어요. 꽤 오래전부터 그곳에 정착해 있었다고…….’

“그 정착해 있다는 곳이 어디인지는 알고?”

‘그게, 우시프 제국이라고 들었어요.’

“근데 왜 가람 왕국에서 만나기로 한 거야?”

‘어, 그건, 저 그러니까…….’

하스티아는 쉽사리 답을 하지 못했다.

‘죄, 죄송해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저 함께 온 동료들이 여기 가울에서 그 일족원을 만나기로 약속받았다고 해서…….’

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모기 소리처럼 작아지고 있었다.

“그 만나기로 했다는 일족원의 이름, 혹시 네프로디테야?”

‘어, 어떻게 아셨어요?’

시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 자리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하스티아님?’

심각한 대화가 오가는 와중 대뜸 둘의 머릿속으로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은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바로 시선을 돌렸다.

“이, 이럴 수가! 정말로 하스티아님이야!”

앞서 거리에서 마주쳤던 화이트 엘프들과 비슷하게, 후드로 머리를 가린 세 명의 화이트 엘프들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로엘!”

하스티아의 얼굴은 급 환하게 밝아졌다.

엘프들은 달려오자마자 그녀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저희는 정말 하스티아님이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일부는 너무 감동한 나머지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이 도시를 급히 벗어나셔야 합니다! 모든 게 잘못되었어요! 이 땅에 저희를 도와줄 일족원 같은 건 없습니다!”

하스티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난처한 얼굴로 일족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전생에 딱 한 번.

프루이나에 발을 들인 적이 있었다.

그때의 감상을 한줄 평으로 논하자면, 그냥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이라 칭하고 싶다.

추운 날씨와 척박한 땅은 둘째치더라도, 인간을 바라보는 화이트 엘프들의 시선이 아주 인상적이었지.

그냥 쉽게 말하면 인간을 해충 급으로 기피한다.

드래곤처럼 나약한 하급 종족이라 생각하고 멸시하는 개념이랑은 다르다.

그냥 상종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오죽하면 너희는 이 땅에서 아예 없어져야 할 만큼 불필요하단 말까지 들었으니, 그거면 뭐 말 다 했지.

그래서 이 어리숙한 엘프가 더 특이한 거다.

낯선 땅에서, 그것도 납치라는 몹쓸 짓을 당한 와중에도, 나라는 수상하기 그지없는 인간을 따라나서지 않았는가?

다른 화이트 엘프였다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다.

아무튼, 인간을 해충만큼 기피하는 종족이 자기들에게 위험이 생겼다고 인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온다?

그래도 태고의 관습마저 져버릴 만큼 양심 없는 종족은 아니다.

자신들에 닥친 위험은 설사 멸족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스스로 해결하려 할 것이다.

내로남불의 습성을 타고난 인간보다는 훨씬 정직한 종족이라 할 수 있지.

즉, 다시 말해 지금까지 이들이 하려 했던 일은 화이트 엘프 전체의 의사가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용납되지 않는 일탈인 것이다.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인간 사회에 교화된 일족원 같은 건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어요! 전부 가르니안 일당이 꾸민 계략이었던 겁니다!”

로엘이란 이름의 중년 엘프는 가르니안이라는 일족원이 하스티아가 사라진 이후 본색을 드러내며, 자신들을 가울로 얌전히 따라올 것을 지시했다고 말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가던 도중, 도시 안에서 하스티아의 목소리가 들려 그 기운을 따라 이곳까지 찾아왔다 하니, 하스티아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하, 하지만! 비록 저희가 속아서 넘어왔다곤 해도, 가르니안은 저희를 인계로 데려와서 대체 무슨 일을 하려 했던 거죠?’

“그것은 나중에 알아볼 일입니다! 지금은 여길 빠져나가 프루이나로 돌아갈 것만 생각해주십시오!”

하스티아는 쉽사리 결정이 서지 않는 듯, 양 주먹을 다잡으며 고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저 심각한 상황에 딴지를 걸고 싶은 건 아니지만, 지금 저 친구들은 두 가지의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인간 사회에 교화된 일족원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아니다.

있다.

그것도 아주 유명한 곳에서 엄청난 위치에.

그리고 뭐? 가르니안이라는 일족원이 이 사태를 벌인 원흉이라고?

아직 100%까지는 아니어도 내가 99%는 확신할 수 있다.

그놈은 원흉이 아니다.

그저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충직한 이행자일 뿐.

진짜 원흉은 훨씬 더 위에 따로 있다.

낯선 이방인들의 편치 않은 대화를 나름 흥미롭게 지켜보는 와중, 대뜸 내 앞으로 한 엘프가 다가왔다.

쌍심지를 잔뜩 켜고 있는 것이 어째 좋은 말을 하려고 온 것 같진 않았다.

“너! 정체가 뭐야?”

아무래도 시위를 잘못 겨눈 것 같다.

“무슨 꿍꿍이로 하스티아님 곁에 있었던 거냐고!”

내가 니들의 경계심을 이해 못 하는 사람도 아니다만, 이런 무절제한 의심은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걸 아직 깨닫지 못한 건가?

굳이 대꾸할 가치도 없다 생각했기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만하세요 알폰스! 시안님은 순전히 절 도와주신 분이에요!’

“그래서 더 의심 간다는 겁니다! 이런 수상하다 못해 악독한 기운을 대놓고 풍기는 인간이, 순수한 마음으로 하스티아님을 도와줬을 리 없지 않습니까?”

수상하다 못해 악독한 기운이라.

뭐 틀린 말도 아니지.

그나마 저 어리숙한 여자보단 나를 제대로 판단했다고 본다.

‘무의미한 폄하는 좋지 않아요! 확실한 건, 전 여기 계신 시안님께 구원을 받았다는 거예요! 이분이 없었더라면 전 지금쯤 어디서 어떤 나쁜 일을 당했을지도 몰라요!’

그녀의 당찬 외침에도 불구하고, 나를 향한 불신의 시선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못했다.

‘비록 함께한 시간도 적고, 저의 미숙한 마음이 섣부른 판단을 내린 걸 수도 있지만,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확실히 말씀드릴게요!’

그러다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내 옆으로 오더니, 일족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턱

그러곤 갑자기 내 손을 잡더니,

‘전 여기 계신 시안님께 제 소울 스톤을 드렸어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뭐 소울 스톤?

가만있어 보자. 마냥 처음 듣는 물건은 아닌 것 같은데?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미, 미치셨습니까 하스티아님?!”

질색하다 못해 기겁을 금치 못한 그들의 반응이 아주 가관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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