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신의 보호를 받는 자 (2)
새하얀 눈이 내려앉은 것 같은 고운 머리카락과 우유에 몸을 담근 듯한 매끈한 피부.
악의 한점 없는 푸른 눈동자는 그야말로 때 묻지 않은 순수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눈동자에선 나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적지않게 서려 있었다.
얼핏 보면 조금 기이하긴 해도 굉장히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성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저 긴 머리카락에 숨은 이형의 귀를 보기 전까진 말이지.
이른바 화이트 엘프.
대륙 북쪽, 신마 전쟁 이후 수백 년간 인간과의 교류를 단절했던 극지방 프루이나의 주인이 되는 일족이다.
일단 정신감응으로 말을 걸길래 똑같이 대답해주긴 했지만, 어째 돌아오는 답이 없다.
그저 순수한 두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을 뿐.
“왜 말이 없지? 내 말을 못 들었나?”
‘죄, 죄송해요! 인간과 정신감응으로 대화해 본 건 처음이라…….’
흠칫 놀란 그녀가 다시금 내 머릿속으로 말을 걸었다.
‘제가 지금 입으로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어서, 본의 아니게 이런 식으로밖에 대화를 못 할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뭐 무언(無言)의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건가?
케이람은 그녀가 신의 보호를 받고 있다 했는데, 어째 내 눈에는 특별히 그렇다고 할만한 게 보이지 않는다.
뭔가 마력이 특출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나 같은 신의 힘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신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여자가 진영도 못 갖추는 조무래기들에게 납치는 왜 당한 거야?
뭐 하나 이렇다 하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상황에 그녀가 또 한 번 말을 걸었다.
‘다, 당신은 그러니까…… 절 구해주신 분 맞죠?’
“착각하지 마. 너 구하겠다고 나선 거 아니니까. 지금부터 묻는 말에나 대답해.”
‘네. 알겠어요…….’
그녀는 살짝 주눅이 든 듯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가 깨어나기 전, 이미 그녀를 호송하고 있던 조무래기들을 붙잡고 심문을 하긴 했다만, 특별히 얻은 건 없었다.
그들 또한 특정 장소에서 그녀를 인도받아 어딘가로 데려가라며 명령만 받았을 뿐, 안에 뭐가 있는지조차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다.
문제는 그 목적지가 다름 아닌, 가람 왕국의 수도 ‘가울’이라는 것.
대충 봐도 꼬리의 꼬리가 복잡하게 얽혀 보였다.
나로선 딱히 선호하지 않는 일이지.
“넌 왜 제국 기사들에게 납치를 당했던 거지?”
‘제국 기사들이요?’
멀뚱멀뚱 깜빡이는 눈동자로 보건대, 아무래도 제국 기사란 단어 자체를 지금 처음 들은 것 같다.
‘제가 인간분들 영역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게 아니라서 그런데, 제국이라면 그 우시프 제국이란 곳을 말씀하시는 거죠?’
나는 까딱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제 외형을 보고 어느 정도 유추는 하셨겠지만, 전 이곳의 사람이 아니에요. 대륙 북쪽 프루이나라는 지역에 사는 화이트 엘프의 일족이에요.’
이미 아는 사실이기에 반문하지 않았다.
‘원래는 저희가 타 일족과 교류 자체를 하지 않지만, 지금 저희도 워낙 위급한 상황에 직면한지라 인간분들께 도움을 요청하러 왔어요!’
“도움?”
‘네! 사실 저희 중 유일하게 인간 사회에 교화돼서 사는 일족원이 한 명 있어요. 듣기론 많은 사람이 따를 정도로 굉장히 유명하다고 하는데, 그분을 만나서 도움을 요청하려고…….’
“그 먼 땅에서 홀로 이곳까지 왔다?”
‘호, 혼자는 아니에요! 일족원들 몇 명과 함께 왔는데, 자는 도중에 갑자기 모르는 사람들에게 저항도 못 하고 끌려온 터라…….’
결국 납치당한 이유는 본인도 모른다는 거군.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인간 사회에 교화된 화이트 엘프가 있다고?
그것도 아주 유명한?
이건 전 현생을 통틀어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다.
어디서 뭐 하는 놈인진 몰라도 알려진다면 상황에 따라선 꽤 큰 파장이…….
잠깐만.
불현듯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인간 사회에 교화된 화이트 엘프라.
많은 사람이 따를 정도로 유명하단 말이지?
‘뭐 잘못된 거라도?’
대뜸 말문을 닫고 생각에 잠긴 나를 보며 그녀가 한 발짝 다가와 물었다.
“너, 원래 가려던 곳이 어디야?”
‘그러니까, 가울이란 곳이었어요. 듣기론 가람 왕국이란 곳에 수도라고 들었는데…….’
원래 가고자 했던 목적지랑 납치범들이 데리고 가려 했던 목적지도 동일한 상황.
이거 절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하물며, 나랑 아예 관련 없는 일도 아니고…….
‘절 구해주신 것에 대해선 뭐라 다른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정말 감사드려요! 한데, 정말 염치없는 부탁인 거 알지만 혹시 절 그 가울이란 곳으로…….’
“따라와.”
‘네?’
그녀의 눈이 놀란 토끼마냥 동그랗게 떠졌다.
“따라오라고. 어차피 일족원들과 다시 만나려면 가울에 가야 하는 거잖아. 데려다줄 테니까 그냥 따라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입을 벌리던 것도 잠시, 그녀는 곧 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네!’
그러곤 쫄래쫄래 내게 다가와 손을 모으며 초롱초롱한 눈을 밝혔다.
어딘지도 모를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의 속내 모를 제안을 좋다고 덜컥 받는 꼴이라니.
살짝 어이가 없는 마음에 헛웃음이 나왔다.
‘저, 저기!’
“왜?”
‘하나 안 물어보신 게 있지 않나요?’
“없는데?”
이곳에 왜 왔는지도 알았고, 앞으로 뭘 할지도 정했으니 더 물어볼 건 없다.
이 이상의 정보는 필요치 않은 잡설에 불과하지.
‘제 이름은 안 궁금하세요?’
난 또 뭐라고.
“알아야 하나?”
‘그, 그래도 저희 앞으로 계속 다니게 될 텐데…….’
몸을 비비 꼬며 꼭 좀 물어봐 달라 사정하는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
“뭔데?”
‘하스티아! 하스티아라고 불러주세요!’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나는 무심하게 고개만 까딱거린 후 다시 고개를 돌렸다.
-턱
그러자 이번엔 아예 팔목을 잡으며 멈춰 세웠다.
“왜?”
‘당신은요? 당신 이름도 말씀해주셔야죠!’
“알아서 대충 불러.”
‘그런 게 어딨어요? 자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는 삶은 무척 불행한 삶이래요!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게 불편해서 그러시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전 아무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난 지난 7년간, 특정 사람을 제외하고 누군가에게 이름으로 불려본 적이 없다.
가끔씩 가명을 쓴 적은 있어도 시안 베르트라는 본명이 직접 불린 적인 거의 없다시피 했지.
하물며 처음 보는 인간에게 본명을 가르쳐준 적도 당연히 없다.
‘…….’
그녀는 어서 이름을 말해달라는 듯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사정없이 반짝였다.
“시안.”
얼떨결에 말해버렸다.
하도 오랜만에 말해서 그런지 굉장히 어색했다.
‘좋은 이름이네요. 잘 부탁드려요. 시안님!’
하스티아는 절망과 두려움이 가득한 부정의 시선이 아닌, 정이라고 하는 순수한 감정이 담긴 시선으로 나를 봐주고 있었다.
이에, 한동안 잊고 살았던 감정이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 * *
“하스티아가 실종되었다고요?”
“예! 그녀를 가울에 이송하려 했던 기사들이 전부 우이토 인근에서 실종되었다고 전해왔습니다. 급히 비상 병력을 풀어 수색에 돌입하려 했지만, 그곳에 부득이하게 가람 학회의 일원들이 있다고 하여, 세세한 조사는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가람 학회원들이 있다고 해서 안 될 게 뭐 있나요? 우리 쪽에 마법을 쓰는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닌데?”
여인의 단호한 반문에 기사는 숨을 죽인 채로 말을 이었다.
“그, 그것이 지금 우이토에 루나브 레인리버까지 있다는 지라…….”
“루나브 레인리버요?”
조금 당황한 듯 그녀 또한 살짝 고개를 틀며 물었다.
“예. 자칫 저희의 모든 것이 들킬 수 있는 상황인지라 일단은 자중하라 지시했습니다. 그녀를 비롯한 가람 학회원들이 도시를 떠나고 나면 그때 조사를…….”
“그곳에 가용 가능한 병력 전부 끌어모아서 가울로 가라 전해주세요.”
“수도로 말입니까?”
“네. 어차피 그녀가 가야 하는 목적지는 정해져 있으니, 기다리다 보면 알아서 오겠죠.”
“하, 하지만…….”
뭔가를 더 말하려던 기사는 이내 단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성녀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러곤 재빨리 방을 나가니, 홀로 남겨진 여인은 중앙에 자리한 석상을 향해 성스러운 기도를 올렸다.
“역시 뭐든 순탄하게 진행되는 일은 없나 보네요. 그래서 인생이 재밌는 것 아니겠습니까?”
석상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기라도 하듯 작은 빛을 뿜어냈다.
그 빛에 반사된 여인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기품있게 휘날리고 있었다.
* * *
시린 공기가 살결을 스치는 산중의 밤.
하룻밤 있다 가기 적당한 동굴을 찾은 시안은 바로 자리에 앉아 불부터 피웠다.
하스티아는 시안이 준 망토를 아직까지 몸에 두른 채, 그가 불피우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차디찬 극지방에 살다 온 지라 추위에는 꽤 익숙한 그녀였지만, 망토에서 느껴지는 시안의 온기가 싫지 않은 듯, 좀처럼 벗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
그중에서도 시안의 손을 유심히 관찰하던 하스티아는 이내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시안님께선 치유 마법에 굉장히 능통하신 것 같아요. 일어나기 전만 해도 아픈 곳이 정말 많았는데, 지금은 전부 멀쩡해졌어요!’
“…….”
‘시안님은 제가 있던 곳을 우연히 지나가셨던 건가요?’
“…….”
거듭되는 질문에도 시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분명 머릿속에서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로 일관하는 모습에 하스티아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전히 도움을 받는 처지기에 뭐라 할 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마음을 교류하며 관계가 발전하길 바랐지만, 아무래도 그는 자신과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원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그녀가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
그녀의 양어깨로 긴 흑색의 머리카락이 내려앉았다.
[이해하렴. 우리 주인이 지난 몇 년간 새로운 사람이랑 대화 같은 걸 해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
깜짝 놀란 그녀가 뒤로 고개를 돌리니, 낮에 마차에서 보았던 흑발 붉은 눈동자의 여인이 자신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지?”
[왜? 어차피 같이 갈 사이라며? 그럼 어색하지 않게 인사 정도는 나눠줘야 하지 않아?]
시안은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듯, 굉장히 불쾌한 기색을 보이며 물었다.
하스티아는 마음을 빠르게 진정시킨 뒤, 그녀의 자태를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그녀의 발끝에 이어진 희미한 안개를 따라가니, 시안의 바로 옆에 자리한 자줏빛 단검과 연결된 것이 보였다.
이에 무언가를 깨달은 하스티아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마검님이셨군요!’
[어머? 날 아는 거니?]
‘물론이죠! 먼 옛날에 저희 일족을 구해주신 분이잖아요! 화이트 엘프라면 모를 수가 없는 분인걸요?’
[……!]
순간 케이람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누가 누굴 구해줬다고?”
시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못 믿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는 정말 많이 들었어요! 그때 함께 하셨던 주인분과 전쟁에서……!’
마검의 차가운 손가락이 하스티아의 여린 입술을 틀어막았다.
당황한 하스티아는 눈을 멀뚱멀뚱 깜빡였다.
[하지 않아도 될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아. 꼬맹아.]
그러건 허리를 살짝 기울여, 그녀의 귀에 입을 갖다 대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