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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작가의 막내도련님은 암살자-180화 (180/325)

제180화. 신의 보호를 받는 자 (1)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이것은 분명 정신감응(Telepathy) 마법의 일환.

이 근처에 있는 누군가가 내 머릿속으로 말을 건 것이다.

‘제발 부탁이에요! 누구든 이 목소리가 들리신다면 저 좀 구해주세요!’

들으면 들을수록,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매우 간절하면서도 여린 목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구조요청 한 번 참신하네.

하기야, 무의미하게 소리 지르는 것보단, 더 나은 방법일 수 있는 건가?

물론, 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주변에 있다는 가정하에 말이지만.

애초에 정신감응이란 것도 무작정 지른다 해서 다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저렇게 전하고자 하는 특정한 목표도 없이, 마구잡이로 소리치는 건 더더욱 그렇지.

나야 하도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 보니, 마나를 해석하는 데 있어 거의 절대 경지에 이르렀다지만,

지금 이 장소에서 저 이름 모를 여인의 가녀린 호소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웬만해선 없을 것이다.

뭐 운이 좋으면서도 나빴다고 봐야겠군.

일만분의 일 확률로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지만,

그 사람이 이 분의 일 확률로 불의를 봐도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는 사람이니.

다음 기회엔 목소리도 들을 수 있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해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길 아주 작게 기원하는 마음을 가지며, 나는 고개를 돌렸다.

[흠…. 마차 안에 귀여운 고양이가 한 마리 있네?]

그래. 이 상황을 두고 그냥 넘어가면 내 애검이 아니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어떻게 위험에 빠진 여자를 도와주지 않고 갈 수 있냐, 그건 남자의 도리가 아니다 등등.

가당치도 않은 헛소리를 남발하며 나를 유혹하려 들겠지.

안 봐도 뻔하다.

내가 한두 번 속는 것도 아니고, 그런 같잖은 술수엔 안 넘어…….

[…….]

마차 쪽을 지그시 바라보던 케이람이 이내 시선을 돌렸다.

[왜? 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케이람은 불만 있냐는 듯 턱을 쭉 내밀었다.

“아무 말 안 하는 거냐?”

[그러니까 뭘?]

“저기 안에 있는 사람 구하라든가 하는…….”

익숙지 않은 낯선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던 케이람이 곧 씨익하고 입가에 미소를 보였다.

[우리 주인, 몸이 어른 되더니 생각도 성숙해졌나 보네? 이젠 이 누나가 굳이 안 가르쳐줘도 뭘 해야 하는지 깨달은 거니?]

당했다.

이건 뭐 나 스스로 무덤을 파다 못해 안으로 기어들어 간 셈이군.

그녀의 도발을 애써 무시한 채, 황급히 마차와 거리를 벌렸다.

[원래는 나도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설마 우리 주인이 관심을 두고 있는 줄은 몰랐네? 어때? 이렇게 된 거, 저 마차 안에 무슨 고양이가 있는지 말해줄까?]

“신이 있다고 해도 안 가.”

그 머저리 신이 있다면 또 얘기가 다르겠지만.

[화이트 엘프가 있어.]

성큼성큼 나아가던 두 발이 대뜸 뚝 하고 멈췄다.

“누가 있다고?”

[화.이.트.엘.프!]

다시 반문하지 말라는 듯, 그녀가 한 글자씩 또박또박 이어서 말했다.

“…….”

[게다가 암컷이야.]

* * *

작은 마차도 겨우 지나갈 비좁은 산길.

그나마 나 있는 흙길도 고르지 못한 탓에 마차는 심히 흔들렸다.

-덜그덕 덜그덕

그마저도 다급히 빠져나가려는 듯 마차는 빠르게 달려 나갔으며,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한 배려는 당연히 없었다.

손과 발이 밧줄로 꽁꽁 묶여 있던 탓에 그녀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를 반복했으며, 그로 인해 팔과 다리엔 시퍼런 멍이 군데군데 들어 있었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입엔 재갈이 물려 있어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제발 누군가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무의미한 정신감응뿐이었다.

허나 아무리 호소하고 도움을 요청해봐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야말로 도와줄 수 사람이 아무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

혼자 고립되었다는 사실에 여인의 눈에선 처량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스스스

그러자 문틈 사이로 희미한 검은 안개가 느닷없이 들어오더니, 그녀의 몸을 가볍게 휘감았다.

뭔지 모를 낯선 상황에 눈을 깜빡이던 것도 잠시.

곧 눈물로 범벅되어 희미해진 시야 속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치렁치렁한 흑발의 긴 머리와 선명한 붉은 눈동자를 가진 기이한 풍모의 여인.

그녀는 마주한 좌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 여인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여인은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그녀는 필시 범상치 않은 존재일 거라고.

인간이 아닌 것은 물론, 지고의 존재들로부터 풍겨오는 고귀한 아우라가 그녀에게서 잔뜩 느껴지고 있었다.

‘시, 신님?’

“컥!”

예기치 못한 만남에 당황한 것도 잠시,

갑자기 주변에서 외마디 신음과 함께 마차가 뚝 하고 멈췄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머지않아 사람들이 하나둘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밖이 보이지 않는 창문에선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들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어둠은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를 쉽게 자극한다.

볼 수 없으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니, 이후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게 된다.

상황도 상황이지만, 느껴지는 기운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이건 마치 지옥 밑바닥에서 살다 온 악마가 지상으로 올라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듯한 기분.

전신을 옥죄이는 기괴한 두려움에 여인은 자신의 몸을 더욱더 감싸 안았다.

-터벅터벅

십여 명에 달했던 생명의 기운은 어느새 전부 사라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단 하나의 기운만이 마차를 향해 다가오는 상황.

이에 여인은 생각했다.

만약 지금 자신을 가두고 있는 저 문이 열린다면,

자신은 틀림없이 죽게 될 거라고.

“…….”

죽음의 집행자가 마침내 문 앞에 이르게 되고,

-덜컥

거친 쇳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돌아가며, 머지않아 마차의 문이 열리자,

-풀썩

여인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 * *

오해 할까 봐 미리 말하는데, 난 이 마차 안에 있는 여인을 구하겠답시고 움직인 게 아니다.

진심이다.

케이람으로부터 화이트 엘프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냥 가던 길 쭉 갈 생각이었다.

그런 내가 지금 왜 이런 상황을 만들었느냐?

마차 안의 여인 때문이 아닌, 마차를 지키는 호위 병력들 때문이다.

외관상으론 모험가 혹은 의뢰를 수행 중인 용병 정도로 보일 수 있으나, 이들은 전부 어딘가에 소속된 기사들이다.

증거는 그들이 착용한 검에 있다.

검의 종류는 이 세상에서 굉장히 다양하다.

크기와 무게에 따라 장검, 단검, 대검, 소검 등으로 나뉘며, 이를 다루는 검사들 역시 자신의 체형과 적성에 따라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검을 하나씩 갖추곤 한다.

글도 쓰던 펜으로 써야 잘 써지는 법인데, 자신을 지켜야 하는 검이라면 뭐 말할 것도 없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위장을 밥 먹듯이 하는 미스트의 대원조차 검까지 바꾸는 경우는 드물다.

하물며 명예와 신의를 중시하는 기사들은 더더욱 그렇지.

한두 명이었다면 또 모를까, 열 명이 넘는 인원들이 전부 비슷한 검을 착용하고 있는데 어찌 수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 수 있을까?

그것도 빛의 기사단의 검을…….

7년 전 사건 이후, 나를 비롯한 검은 안개의 추종자들을 척결하기 위해 제국은 빛의 기사단의 세력을 본격적으로 확장했다.

물론 세력을 확장했다 해서, 율켄 같은 전선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사들이 늘어났다는 건 아니다.

실질적으로 늘어난 건 이렇게 무늬만 그어져 있는 햇병아리들이 대다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진영도 못 갖춘 채 허무하게 무너질 리 없지.

뭐, 결국 내가 눈여겨봐야 할 건 이들이 아닐 것이다.

제국 소속의 빛의 기사단이 제국도 아닌, 타국에서 사람도 아닌 화이트 엘프를 납치하고 있었다라.

구린내가 나다 못해 코가 썩을 지경이다.

아니, 애초에 화이트 엘프는 또 어떻게 납치한 거야?

인간이라면 드래곤 못지않게 벌레 취급을 하는 일족이 제 발로 왔을 리는 없고, 그렇다고 목적을 가지고 납치했다기엔 그것도 말이 안 되잖아?

고민할 필요 없이, 당사자께 물어보는 것이 가장 좋긴 한데…….

[이 아이 제대로 기절했다 야.]

케이람이 그녀의 하얀 볼살 꼭꼭 찌르며 말했다.

뭔가 추궁이라도 할까 싶어 문을 열어봤더니만, 그냥 내 얼굴을 보자마자 바로 기절해버렸다.

이런 상황이 뭐 낯선 건 아니다만,

꽤 순탄치 못한 일에 휘말려 버린 느낌이군.

일단 깨워라도 볼까 싶어 몸을 흔들어보려는 순간,

-파지직

“……!”

스파크가 일어나듯 손에서 강한 전류가 흘렀다.

“뭐야 이거?”

마치 그녀의 몸에 흐르는 강한 기운이 나의 접근을 거부하려는 듯, 은근한 위압감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말했잖아. 귀여운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고.]

앞 좌석에 마주 앉은 케이람이 요염한 눈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이 아이 신의 보호를 받고 있어.]

* * *

차디찬 흙바닥의 감촉에 망토의 온기가 더해져 의도치 않게 흘러간 숙면의 시간.

부스스 눈을 뜬 것도 잠시,

여인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펴보았다.

쓰러지기 전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여전히 마차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손발의 포박과 입에 물려 있던 재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누구의 것인지 모를 흑색의 망토가 몸에 둘려 있었다.

여인은 기절하기 전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분명 마차가 멈추고,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으며, 차마 이 땅의 기운이라곤 할 수 없는 어두운 기운이 마차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곤 문이 열린 순간, 기절했던 것 같은데…….

마치 한낮의 기묘한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

문득 문밖에서 졸졸 물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여인이 조심스레 문에 귀를 기울이자,

-끼익

마차의 문이 힘없이 열려버렸다.

나갈지 말지 잠시 주저하던 여인은 이내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갔다.

환하게 쌓이고 있는 오후의 밝은 햇살과 맑게 흐르는 계곡물.

청아한 물살에 홀리기라도 한 듯, 여인은 계곡으로 달려갔다.

그러곤 양손을 고이 모아 흐르는 물을 받아 입안을 적시니,

“하…….”

여인은 그제야 행복한 함박웃음을 지었다.

“……!”

그런 행복의 순간도 잠시, 등 뒤에서 전해온 낯선 인기척에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무심한 눈빛으로 팔짱을 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흑발의 남성.

여인은 자신을 감싸고 있던 망토를 들이밀며 경계의 자세를 취했다.

허나 여인은 머지않아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들이밀고 있는 이 망토는,

눈앞에 있는 남성의 것이라고.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상처투성이였던 전신이 어느새 멍 하나 없는 깨끗한 몸으로 돌아온 상황.

이 남자가 자신을 구해준 것도 모자라 만신창이였던 자신을 치유까지 해준 것인가?

자신의 간절한 호소를 들어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당신이 절 구해주신 건가요?’

이에 그녀가 정신감응으로 말을 걸어봤지만,

“…….”

남성은 눈만 찌푸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목소리가 닿지 않은 것인지, 다시 한번 말을 걸어보려는 순간,

‘말을 못 하는 건가?’

남성의 무심하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가 여인의 내면으로 깊게 퍼지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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