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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작가의 막내도련님은 암살자-179화 (179/325)

제179화. 검은 머리의 악마 (4)

‘루, 루나브?’

슈르츠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어 귀를 여러 번 의심했다.

왕국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왕국에 하루 이상 머물렀다면 절대 모를 수가 없는 그 이름.

가람 왕국 마법 학회의 수장 리겐스 레인리버의 손녀이자, 삼백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하는 희대의 천재 마법사.

최근엔 불과 열아홉 살 나이에 8성이라는 이례적인 경지에까지 오른, 그야말로 인간을 넘어선 존재.

손가락 하나만 까닥해도 이 건물 자체를 무너트릴 수 있는 그녀가 지금 자신의 앞에 자리하고 있다고?

그럴 리 없다.

그냥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이겠지.

하루 온종일 학회에 짱 박혀 마법을 연구한다는 사람이, 살인 사건 하나 조사하겠답시고 이런 먼 곳까지 올 리가 없다.

슈르츠는 못내 현실을 부정하였다.

“들어오세요.”

그녀가 출입을 허가하니, 푸른 망토를 두른 학회원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신 제임스 로드리안. 루나브 레인리버님을 뵙습니다!”

“……?!”

그 부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루나브라는 이름이 같을 순 있어도, 레인리버라는 성까진 같을 순 없을 것이다.

즉 지금 슈르츠 앞에 있는 그녀는 그가 알던 루나브가 확실했다.

이게 뭔 날벼락 같은 상황이란 말인가?

들어온 학회원이 뭔가 보고를 올리는 것 같긴 한데, 슈르츠의 귀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석화 마법을 건 것도 아닌데, 몸이 왜 이리 굳으셨나요?”

그런 슈르츠를 루나브가 무심한 시선으로 보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슈르츠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칼 같은 자세를 취했다.

“살인 사건이 벌어졌던 새벽엔 운동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원래 꾸준히 해오셨던 건가요?”

“예, 뭐, 그렇습니다…….”

“광산 쪽으론 잘 안 가시고요?”

“그 근처도 가끔 지나긴 합니다만 그날엔 가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날 광산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의 모습도 보지 못하셨겠네요?”

“무, 물론입니다.”

그 대답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슈르츠를 빤히 쳐다보던 루나브는 이내, 책상 위에 있던 종이 몇 장을 그에게 건넸다.

여러 사람의 신상정보가 적혀 있는 명부였다.

“혹시 거기 중에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슈르츠는 차마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명부에 적힌 사람의 수는 대충 60명 정도.

거기엔 슈르츠에게 있어 상당히 익숙한 이름도 여럿 존재하고 있었다.

“이, 이게 어떤 사람들을 모아놓은 명부인지, 혹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날 죽은 사람들의 명부에요.”

루나브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날 광산에서 죽은 사람들은 빈스 영주를 포함해서 총 63명. 영지 소속의 기사로 위장되어 있긴 했지만, 전부 빈스 영주가 개인적으로 고용했던 용병들이었어요. 학회에 등록되지 않은 마법사들부터 해서 왕국이 아닌, 타국에서 활동했던 용병들도 여럿 섞여 있었죠.”

“이, 이걸 저한테 보여주시는 이유는 무엇인지?”

슈르츠는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시온 씨도 타국에서 용병 활동을 하다 오셨죠?”

“그렇습니다…….”

이미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조사를 해왔다는 것을 인지한 만큼, 애써 부정하진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자신이 속해 있었던 붉은 말 소속의 용병들은 없었다.

“뭐, 용병 일 하다가 몇 번 봤던 사람들이 있는 것 같긴 합니다만, 그리 잘 아는 건 아닙니다. 애초에 전 이미 용병 생활을 접은 상태고요,”

슈르츠는 거리를 벌리며 자신과는 관계없는 이들이라 일축했다.

“손 한 번만 내어주시겠어요?”

그러자 대뜸 손을 내어달라는 루나브.

얼떨떨한 마음에 슈르츠가 손을 내어주니, 그의 손을 맞잡은 루나브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 가만히 있기를 10초 정도.

마침내 눈을 뜬 루나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마법 등급은 어림잡아 6성 정도, 속성 수치는 51%쯤 되는 꽤 준수한 수치네요. 어둠 속성 중에 이런 수치를 가진 사람도 흔치 않은데…….”

슈르츠의 눈은 일순간 크게 번뜩였다.

“지금 뭘 하신 겁니까?”

“놀랄 것 없어요. 그냥 제 능력으로 당신의 능력을 확인해본 거니까. 생각보다 재능이 꽤 있으신 분이었네요? 이 정도라면 설사 광산 안에서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 해도, 어둠 속성 마법으로 흔적을 말끔히 지울 수 있을 수준이에요.”

어째 말 한마디가 나올 때마다, 정곡이 계속해서 찔리는 기분이었다.

슈르츠의 내면에선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땀을 많이 흘리시네요? 원래 그런 체질이신가요?”

잦은 충격에 정신이 몽롱해진 슈르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그를 보며, 루나브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저랑 같이 광산에 좀 가주셔야겠네요.”

승낙의 긍정도, 거절의 부정도 하지 못한 슈르츠는 어느새 자신의 몸이 그녀를 따라 광산으로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도착한 우이토 광산 내 작업장.

함께 온 수호 기사와 학회원들과는 잠시 거리를 벌린 채,

루나브는 오직 슈르츠 한 명만을 데리고선 빈스 영주의 시체가 발견되었던 지점에 이르렀다.

“킁킁.”

그러곤 주인 찾는 강아지마냥 대뜸 사방을 향해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뭐, 뭘 하시는 겁니까?”

“그냥 찾는 냄새가 좀 있어서요. 역시 며칠이 지나서 그런지, 딱히 풍겨오는 냄새는 없네요.”

그런 건 개도 불가능하지 않겠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던걸, 슈르츠는 간신히 참아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바닥에 주저앉은 루나브는 손에서 발현해낸 마나를 바닥에 갖다 대었다.

-우우웅

그러자 마력에 반응한 지면에서 기묘한 공명이 일어났다.

살면서 처음 보는 생소한 광경에 슈르츠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으며, 루나브는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로 지면의 공명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재밌는 일이 있었네요?”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지그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무, 무슨 말이신지?”

“어떠셨나요? 검은 머리의 악마를 눈앞에서 보신 소감은?”

“……!”

슈르츠의 동공이 지진 일어나듯 흔들렸다.

“뜨, 뜬금없이 검은 머리의 악마는 왜 찾으시는 겁니까?”

“애써 부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전에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방금 확인 다 했으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의심을 내비치는 슈르츠를 향해, 루나브는 손가락을 탁하고 튕겼다.

그러자 아직 그녀의 손에 남아있던 마력 구체가 갑자기 슈르츠에게 향하더니, 이내 그의 머리를 순환하듯 빙빙 회전해나갔다.

이게 뭔 일인가 싶어 눈을 멀뚱멀뚱 깜빡인 순간, 곧 슈르츠의 머릿속에서 이전 날의 기억이 꿈을 꾸듯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리플레이(Replay)라는 이름의 마법이에요. 특정 공간에 남은 마력이나 기운을 이용해 이전 날 그 자리에 있었던 장면을 머릿속에서 다시 보여주는 마법이죠.”

“그, 그런 마법은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을 거예요. 이 마법은 아직 학회는커녕 할아버지조차도 모르고 계신 마법이니까.”

학회도 모르는 마법이라고?

마법에 미친 이들이라면 둘째라도 서러울 그들조차 모르는 마법이란 게 과연 있기는 한 걸까?

여러모로 정신이 아득한 슈르츠를 루나브가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광산 근처에도 안 가셨단 말과 다르게, 현장에도 계셨고, 검은 머리의 악마로부터 치유까지 받으셨네요?”

자신이 보았던 기억이 그녀 또한 그대로 봤을 거란 걸 깨달은 이상, 더 이상의 부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슈르츠는 이전 날과 마찬가지로 일초의 망설임 없이 땅에 머리를 박았다.

“원하시는 게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전 그 악마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단지 우연히 그 자리에 있다가 마주친 것이……!”

“악마가 아니에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돌아오자, 슈르츠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악마의 탈을 쓰고 있는 사람이자, 암살자죠. 저와 시온 씨를 비롯해 여러 사람을 구원하고 다니는…….”

슈르츠로선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눈만 깜빡거렸다.

“우리 아직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죠?”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루나브의 입가엔 흥미로움이 뒤섞인 기이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 * *

손가락에 잡힌 마력 결정에서 청아한 빛이 발현된다.

사람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 줄 아는가?

바로 사람이라면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 마력 결정을 보아라.

금은보화 이상의 가치가 있어 보이는가?

가공할 필요가 없는 순수 그대로의 결정이라 해도, 이 안에 담긴 마나로는 마법은커녕 마나를 발현하는 것조차 힘들다.

순전히 연구 재료로서나 가치가 있는 것이지, 암지에 갖다주면 엄청 비싸게 팔리는 보석 같은 게 아니란 거다.

허나 세상은 원래 허황된 소문 하나로도 분위기가 천차만별로 뒤바뀌는 곳이다.

우이토의 영주, 빈스 레브람.

그는 높은 보수를 앞세워 광산에 필요한 인부들을 대거 끌어모았지만, 사실 그 보수를 전부 지급한다면 광산은 1년도 안 돼서 문을 닫을 것이다.

그래서 퍼트린 것이 바로 거짓 소문.

마력 결정을 훔쳐 다른 곳에 팔면 그 즉시 인생이 바뀔 거라는 거짓을 퍼트려 인부들을 자극했다.

이에 실제로 결정을 훔쳐 달아나는 이가 나타나면, 광산 직속의 노예로 만드는 영지의 법을 이용해, 많은 인부를 노예로 전락시켰다.

그러곤 인부들과 접촉할 일이 없도록 따로 빼두어 진실이 새 나갈 일을 없게 만들었지.

아마 이대로 계속 갔다면, 머지않아 광산 인부들 전체가 돈 한 푼 받지 않은 노예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결정의 가치를 알았다면 훔쳐내지 못할 거라 했던가?

뭐 맞는 말이라고 본다.

보석 이상의 가치가 있을 줄 알았던 물건이 사실은 반짝이는 돌멩이랑 다를 게 없다는 걸 알았다면, 그 누구도 훔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이 도시에서 볼일은 끝났다.

나는 손에 든 마력 결정을 흐르는 강물에 던지고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 꼬맹이는 그냥 두고 갈 거니?]

그러자 검은 안개와 나타난 케이람이 나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누구?”

[그 흑발의 꼬맹이 말이야. 너한테 다짜고짜 머리를 박았던…….]

“아…….”

불현듯 잊고 있었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날, 광산에서 피떡이 되어 쓰러져있었던 흑발의 남자.

아마 마력 결정을 훔치려 했다기보단, 그냥 뭘까 싶어 확인하러 왔던 것 같은데, 뭐 나로선 그가 영주를 유인해준 덕에 비교적 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원래 100명은 죽이려 했던 걸, 63명으로 퉁쳤으니 그 정도면 쉽게 처리된 거지 뭐.

가만 놔뒀다간 내가 한 일을 덤터기 씌울 수도 있었던 만큼, 대충 치유해주고 알아서 도망가라 했던 건데,

설마하니 나를 마주치자마자 자길 거두어달라고 머리를 박을 줄은 몰랐다.

단순한 지나침 만으로 나인 걸 감지하고 따라온 것도 대단하긴 했다만,

뭐 나로선 거둘 마음이 1도 없었던 만큼, 그가 엎드려 있는 사이에 바로 자리를 떠났다.

내가 관상을 보거나 하는 능력은 없지만.

적어도 젊은 나이에 요절할 놈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끼릭 끼릭

대뜸 길목 저편에서 미세한 바퀴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연스레 나무에 올라 몸을 숨겼으며, 머지않아 사람 두 명은 간신히 들어갈 법한 작은 마차와 함께 그 주위를 지키는 다수의 무장된 인원들이 나타났다.

어째 마차를 지킨다기보단, 마차 안에 있는 누군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디 귀하신 분의 자제를 호송하기라 하려는 모양이군.

나랑 상관은 없는 일이기에 조용히 빠져나가려는 순간,

‘도와주세요…….’

난데없이 머릿속에서 가녀린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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