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빛을 걷어내는 안개 (5)
대륙의 수호자 베르트 공작가의 장남 에쉘 베르트.
아린에게 있어 그의 첫인상은 매우 특별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늘에서 강림한 신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인간이라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용모와 악의 한점 없는 온화한 미소.
황실이라는 우물에 갇혀 세상을 보지 못한 아린에게 처음으로 조언이란 것을 해주었던 무척 의미 있는 사람이었다.
남들이 뭐라 하든 흔들리지 말고, 황녀로서 올곧고 당당한 모습을 이어가라.
얼핏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진심 어린 충고처럼 보일 수 있으나, 조금만 세상 물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바로 깨달을 것이다.
아무 의미 없는 환상 같은 말이라고.
어떤 마음을 갖고, 어떤 방향을 향해, 어떤 식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는, 그저 무의미한 희망만 심어줄 위선일 뿐.
당시의 아린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으며, 그 말이 진리라 믿고 나아가려 했다.
허나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그녀는 환상과도 같은 미소에 심취될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환상의 빛이 아닌, 현실의 어둠.
우물 안의 개구리였던 자신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해준 그런 어둠의 존재 말이다.
-휙!
아린의 시선은 곧 에쉘이 아닌 빠르게 엄습해오는 무언가에게 향했다.
-턱
조금 전까지 자신과 눈을 마주하고 있던 시안이 어느새 달려와 그녀의 손을 잡은 것이다.
허나 시안의 눈은 아린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희열에 찬 얼굴로 성검을 들어 올리고 있는 에쉘을 향해 있었으며, 그 자리에 아린을 끼워 넣지 않으려는 듯,
“꺄악!”
그녀를 뒤쪽으로 밀어냈다.
밀쳐진 아린의 몸을 기사들이 안전하게 받아낸 순간,
-쾅
금빛 성검과 흑빛 마검의 본체가 격돌하면서 주변에 강한 파장이 일었다.
검을 맞댄 두 남성은 마치 예고된 만남이었다는 듯, 서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기 싸움 끝에, 결국 시안이 먼저 검을 물리고 뒤로 물러났다.
이에 에쉘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성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러곤 어떠한 망설임이나 주저함 없이, 시안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익숙지 않은 공허한 바람이 불면서 주변의 격양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세상을 혼란의 도가니로 빠트린 절망의 존재와 그 앞에 나타난 구원의 존재.
숨소리조차 함부로 낼 수 없는 엄청난 긴장감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마른침을 삼키며 그들의 대면을 지켜보았다.
둘의 거리는 어느새 3보 밖의 거리까지 좁혀져 있었다.
이에 에쉘이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2년 전, 저택에서 나와 만났던 날을 기억하느냐 시안?”
시안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난 그날 보았던 네 눈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로부터도, 황제 폐하로부터도 보지 못했던, 무척이나 강렬한 눈빛이었지. 차마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만큼…….”
베르트가 저택에서 있었던 그들의 첫 만남.
에쉘은 당시 느꼈던 솔직한 심정을 시안에게 그대로 전했다.
“인정하겠다. 난 너를 처음부터 눈여겨 보지 않았어. 베르트가의 핏줄을 물려받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 하지만 크란츠와의 대련에서 승리하고, 전선에서 황녀님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부터 너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분명 내가 알고 있던 막내는 그런 방대한 그릇을 가진 아이가 아니었는데, 대체 무엇이 그 아이를 변하게 한 것일까? 필시 너에게 어떤 엄청난 일이 있었을 거라 보았다.”
시안은 묵묵히 듣기만 할 뿐,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네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지. 하지만 너에 대해 알아 가려 할수록 늘어나는 건 의문뿐이었다. 너는 밤하늘에 드리워진 안개처럼 무엇 하나 드러내려 하지 않았어. 마치 내가 접근할 것이란 걸 알고 사전에 모든 걸 차단한 느낌마저 들었지.”
말을 이어나가던 에쉘은 대뜸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비올렛 황녀님께서도 그러시더구나. 이전에 저택에서 우리에게 검을 들이밀었던 존재가 바로 너일 거라고. 그때 난, 살면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무기력함을 경험했다. 나빴다기보단 흥미로웠어. 내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에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흥미로웠지!”
석상과도 같던 시안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 세상은 안개의 존재를 배척한다. 그것은 지금 네가 이 상황에 직면하게 된 가장 큰 이유기도 하지. 하지만 난 널 버리고 싶지 않다. 시안.”
그 일그러짐에 맞받아치듯, 에쉘은 더욱 환한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했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등, 내 너의 과거에 대해선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닌 미래. 그 미래를 위해 네가 해야 할 일은 바로 내 손을 잡는 것이다.”
에쉘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시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안. 네 힘은 분명 여러 곳에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제국을 위해, 대륙을 위해, 인간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어두운 새벽하늘을 걷어내는 따뜻한 아침의 햇살처럼,
“내가 너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주겠다.”
손을 내민 에쉘의 뒤에는 알 수 없는 금색 광채가 은은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
시안의 입은 여전히 닫혀있었지만, 시선만큼은 에쉘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없이 덤덤하면서도 무심한 눈빛.
그리 심각한 고민을 하는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에쉘은 어떠한 재촉이나 다그침 없이, 시안의 다음 행동을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스윽
짧지 않은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손을 들어 올리는 시안,
허나 시안의 손이 향한 곳은 에쉘의 손이 아니었다.
검을 들지 않은 그의 반대쪽 손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자신의 품 주머니.
그 속에 고이 감춰져 있던 무언가가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
“……!”
에쉘의 얼굴이 종이 구겨지듯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이거 달라는 말을 너무 어렵게 하시는군요.”
반면 입이 귀에 걸린 시안의 얼굴엔 희열과 환희가 가득 서려 있었다.
오랜 시간, 세상을 보지 못해 빛이 바래진 성검의 보석이 초라한 광채를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다.
* * *
칠흑의 검은 안개가 주변을 잠식하고 있는 마검의 아공간.
-터벅
안개를 침대 삼아 편히 누워있는 케이람의 공간 속으로 한 여성이 발을 내디뎠다.
이에 시선을 돌린 케이람이 왠지 모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을 오래 자긴 했나 봐? 피부가 새빨갛네? 어디 가서 관리라도 받고 오는 게 어때?]
케이람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분노와 살기가 혼합된 경멸의 시선으로 케이람을 노려만 볼 뿐.
[우리 구원자님께서 어째 성격이 많이 죽은 것 같네? 왜 돌로 만든 석고상처럼 입도 뻥긋 안 하고 계실까?]
“…….”
[힘이 너무 빠진 나머지, 입 열 힘도 없어진 거야?]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여성이 쌍심지를 켜며 소리쳤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케이람!!”
케이람은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네년은 기어이 이 세상을 혼란에 빠트려야만 성이 차는 것이냐? 저런 말도 안 되는 계승자는 어디서 나타난 것이야!”
맹수의 거센 포효 같은 우렁찬 외침에 케이람의 아공간이 살짝 뒤흔들렸다.
[힘은 잃었어도 기세는 여전하네? 예전에 날 보던 네 기분이 이랬을까? 주인 잘 만나야 인생이 편하다는 그 머저리 신의 말도 이럴 때 보면 틀린 게 아니라니까?]
“같잖은 혀 놀림 하지 말고 묻는 말이나 대답해! 분명 너 아니면 아에르일테지! 너희가 이상한 수작을 부린 게 아니고서야 저런 처음부터 완벽한 계승자는……!”
[그래 맞아. 너무 완벽해서 나조차도 덮칠 수가 없지. 그래서 너무 짜증나!]
미소가 만연했던 케이람의 얼굴이 돌연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나란 여자를 너무나도 완벽히 조련해서 아주 화가 나서 미치겠다고! 대체 어디서 저런 계승자가 나타났냐고? 나도 묻고 싶어! 어디서 저런 잡아먹을 수 없어 안달을 나게 하는 꼬맹이가 나타났는지!]
슬쩍 혀를 내밀며 입맛을 다신 케이람의 입가로 다시금 미소가 드리워졌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 우린 늘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즐기자고. 네 주인이 선택한 계승자가, 나를 선택한 계승자에 의해 처참히 무너지는 꼴을……!]
구원이라는 이름의 초라한 빛을 점점 잠식하고 있는 검은 안개의 공간.
그 속에선 환희에 가득 찬 마검의 웃음소리가 널리 퍼지고 있었다.
* * *
성검 듀란다르크가 가진 힘의 원천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보석.
케이람을 되찾았던 그 날, 난 성검에 붙어있던 이 보석을 떼어내 그 힘을 절반 이하로 감축시켰다.
나중에 있을 엄청나게 재밌는 일을 위해.
“어찌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형님? 이걸 원하고 계셨던 것 아니었습니까?”
내 얼굴이 지금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진 모르겠지만,
난 지금 웃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참아내고 있다.
전 현생을 통틀어 거의 처음이지 않을까 싶거든.
우리 친애하다 못해 증오하는 형님의 얼빠진 얼굴을!
“형님께선 제 손이 아닌, 제 손에 쥐어진 이 보석이 형님 손에 얹어지기를 원하시겠지만…….”
-꽈악
“안타깝게도 전,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의 시선은 내 눈이 아닌 보석을 쥔 내 주먹에게 향해 있었다.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의문이 차오른 그의 시선이 다시 내 얼굴로 향했다.
“유복하고 지체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핏줄도 변변찮고 태생적으로 무능력했던 만큼 아무도 찾아주는 이가 없었지요.”
문득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그가 보았던 내 마지막 얼굴이 딱 저렇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힘이 생겼습니다. 남자는 그 힘을 미치도록 갈고 닦으며 성장시켰죠. 결국 남자의 노력은 인정받았고, 그토록 갈망했던 사람의 밑으로 들어가 평생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뼈아픈 배신이었습니다.”
지금 내 손에 칼이 아닌 거울이 있다면, 당장 손을 올려 보여주고 싶을 정도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연신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가관이거든!
“모든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 사람은 절 쓰다 버릴 소모품으로만 생각했을 뿐. 작은 믿음조차 갖고 있지 않았으며, 결국 남성은 등신같이 살아온 일평생을 후회하며 쓸쓸히 눈을 감았지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부로 형님의 사람이 된 제가, 30년 후에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보신다면, 쉽게 이해가 가실 겁니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거라 본다.
“제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이제 형님께선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선택?”
“진정한 빛의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선 성검의 힘이 필요할 것이고, 성검의 힘을 취하기 위해선 성검의 힘이 담겨있는 이 보석이 필요하실 테죠. 그러니 선택하십시오.”
나는 천천히 허리를 굽힌 뒤, 얼굴만 앞으로 들이밀었다.
“평화로운 되찾음을 위해 제 앞에서 무릎을 꿇을지, 아님 강제적인 탈취를 위해 저와 다시 한 번 검을 맞대실지. 선택하십시오. 빛의 구원자시여…….”
파르르 떨리는 동공과 움찔거리는 입술.
정말 돈 주고도 못 볼 귀한 광경이다.
“어찌 망설이십니까? 이 보석이 필요 없으신 겁니까?”
망설이지 말라고 친절히 선택지까지 내줬는데, 어찌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이에 나는 속으로 딱 3초를 셌다.
“하기야 빛의 구원자님께선 이딴 돌멩이 따윈 필요 없으실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그냥 없애도록 하겠습니다.”
-스릉!
1초, 아니 0.5초만 늦었어도 끝났다.
차마 성검의 힘이 눈앞에서 소멸하는 것은 볼 수 없었나 보다.
정말 필사적이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검을 뽑아 내 몸을 베어 갈랐지만, 저런 달팽이 같은 속도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
“아무래도 후자를 선택하실 모양이로군요…….”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느냐?”
“차라리 무릎을 꿇고 빌지 그러셨습니까? 그나마 그편이 비굴할지언정, 가능성은 더 컸을 텐데 말이죠.”
“이런 식으로 나와봤자 너만 후회할 뿐이다. 시안…….”
후회?
내 인생의 후회는 당신이 내 심장을 찔렀을 때가 마지막이야.
그러곤 결심했지, 두 번 다시는 그런 참혹한 순간을 오게 하지 않겠다고.
그러니, 당신도 한 번 느껴봐.
옳다고 믿어왔던 세상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을.
“대륙의 수호자 베르트 공작가의 장남이자, 빛의 구원자라는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아주 극진히 모셔드리겠습니다. 형님.”
나는 케이람을 들어 올리며 나직이 읊조렸다.
“암무 9식: 마검 발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