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화. 검은 피의 일족 (4)
“반신반의했는데 진짜였군. 네놈의 그 얼빠진 눈빛을 보고선 바로 확신이 들었다. 오랜만이다. 보리스…….”
“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갤라스 영주님!”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어 땀만 삐질삐질 흘리는 보리스.
액실리움의 영주 갤라스 에이번은 그런 처량한 모습을 언짢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영주의 거처가 있는 도시의 중심부도, 사람의 왕래가 잦은 거리도 아닌, 인적이 닿지 않는 으슥한 골목.
지금의 만남이 외부로 퍼지는 것을 원치 않는지, 곳곳엔 검은 복면을 두른 남성들이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최근엔 로열 아카데미의 교관직을 맡았다는 소식까지 들었건만, 갑자기 액실리움에 다시 나타난 이유가 무엇이냐?”
“아, 아카데미 교관 말입니까?”
보리스는 처음 듣는 사실이라는 듯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죄, 죄송합니다 영주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제게는 근 몇 년간에 관한 기억이 없어서…….”
보리스는 시안에게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기억이 정상치 않다는 걸 영주에게 설명하였다.
설명을 들은 갤라스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하! 기억 장애라……. 난 또 황자님의 비밀 임무라도 수행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하기야 니들 같은 저주받은 핏줄이 제대로 된 정신 상태를 갖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쯧쯧 혀를 차며 모욕적인 언행을 던짐에도 불구하고, 보리스는 흔들림 없는 낯빛을 유지했다.
“그래서, 넌 계속 여기 있을 작정이냐?”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주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이전처럼 사람들을 위한 일을…….”
“무슨 말이냐 보리스? 그럴 필요 없다.”
갤라스는 보리스의 말을 단번에 일축했다.
“넌 이전처럼 사람들을 아닌, 나를 위한 일을 해주어야겠다.”
“이, 일이라 하시면……?”
“시치미 떼지 마라. 네놈도 그건 기억하고 있을 것 아니냐? 루이넬 황자님을 위해 야심 차게 준비했지만, 네놈이 황궁으로 떠나버리면서 흐지부지된 그 일 말이다. 이번엔 황자님이 아닌, 전적으로 나를 위한 일을 해다오.”
보리스는 차마 바로 대답할 수 없어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사람들을 위하겠답시고 거리의 잡일을 도맡아 할 필요 없다. 네놈이 나를 위해 힘을 써주는 동안엔 슬럼가의 주민들이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언뜻 사려 깊은 제안처럼 들릴 수 있으나, 사실은 거부권 없는 강요와도 같았다.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보리스로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영주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보리스는 조용히 몸을 돌려, 곧 자신이 왔던 슬럼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지그시 지켜보던 갤라스는 이내 부하를 불러 은밀히 지시를 내렸다.
“저놈이 여기 있다는 것을 절대 액실리움 밖으로 새게 하지 마라. 아침부터 밤까지 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알겠습니다 영주님!”
갤라스는 그제야 만족스러워하는 미소를 보였다.
“2년 전 모습 그대로군. 황자님을 봤을 땐, 뭐 딴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변하더니만, 다시 내가 아는 본래의 놈으로 돌아왔어…….”
근 2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몰라도, 알 수 없는 기억의 공백이 그를 지배하고 있는 지금,
이는 갤라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보리스가 사라진 방향을 지켜보던 것도 잠시.
“……!”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척을 느낀 갤라스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섬뜩한 살기를 보낸 것 같은 느낌.
“뭐, 뭐야?”
허나 고개를 돌린 곳엔 적막한 밤바람만이 쓸쓸하게 휘날릴 뿐이었다.
* * *
알다시피 난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허나 좋아하지 않는다 해서 책의 가치를 모르진 않는다.
사람 다섯이 앉기도 벅찰 이 좁은 공간에 자리한 수백 권의 책들.
아카데미 연구진들이나 읽을법한 고등급 마법 교서를 비롯해, 함부로 구할 수 없는 각국 학회의 연구서들까지.
어디서 구해 왔는진 몰라도, 이런 슬럼가에 있기 어울리는 책들은 아니었다.
“……절 따라오셨군요.”
대뜸 움막 안으로 들어온 그가 내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딱히 숨길만 한 사실은 아니었기에, 부정은 하지 않았다.
긴장과 두려움이 가득했던 조금 전의 모습은 어느덧 사라져버린 상태.
그러더니 대뜸 어지럽게 널브러진 주변의 책들을 주섬주섬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치 이 공간을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람처럼.
“구차하게 굴진 않겠습니다. 절 죽여주십시오…….”
급기야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며 죽음을 구걸하고 나섰다.
내가 전생 살면서 목숨을 구걸 받은 것과 반대로, 죽음을 구걸 받은 적도 많았다.
이른바 참회의 시간이란 이름으로 죽음보다 더한 극악의 고통을 선사하다 보면, 그들의 입에선 항상 제발 좀 죽여 달라는 호소가 간절하게 울려 퍼졌다.
그 모습을 딱히 즐기면 산 건 아니었지만,
지금의 광경은 여태 봐왔던 죽음의 구걸 중 제일 최악이다 싶을 만큼 감흥이 없다.
짜증나네.
그나마 뒷일 방지를 위해 죽이고자 했던 마음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이런 내 모습을 어디선가 지켜볼 진짜 보리스의 음흉한 미소를 떠올리자니,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오름과 동시에 이가 갈렸다.
“사람들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있는 것 자체가 용인되지 않는 저주받은 일족. 이제야 깨닫는 제가 참으로 한심하군요…….”
“무슨 말이지?”
힘없이 고개를 든 보리스는 자신의 옆에 놓인 책 한 권을 집었다.
“세상은 저희를 보며 항상 말했습니다. 있을 필요가 없고, 있어서도 안 될 무의미한 존재들……. 전 그 말들이 무척이나 싫었고, 항상 반박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도 분명 이 대륙 위에 존재할 수 있는 당당한 인간이라고…….”
그가 집은 것은 이제 막 아카데미에 입학한 신입생이나 볼 법한 초급 마법 교서였다.
“제게는 소위 재능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열 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마나를 발현하였고, 1년도 안 돼서 여러 속성의 마법을 섭렵하였습니다. 의지할 거라곤 그때 어렵사리 구한 이 마법 교서뿐이었죠.”
족히 수천 번을 봤다고 해도 믿을 만큼, 책의 상태는 굉장히 낡아있었다.
“마법을 연마하고자 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제힘이 슬럼가를 넘어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저희를 보는 세상의 시선이 달라질 거라 생각했죠. 그래서 미친 듯이 마력을 키웠고, 그렇게 키운 힘을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순간 목이 메여버린 듯, 보리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절 따라오셨다면, 제게 갤라스 영주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으셨겠죠…….”
녀석은 대뜸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내게는 익숙하다 못해 치가 떨리는 아티팩트.
마리오네트의 인형이었다.
“뭔지 아시는 것 같군요.”
네놈의 주특기라 해도 모자랄 아티팩트를 내가 모를 리 없지.
“매일같이 거리에 나가 일을 해도 혼자선 한계가 있었습니다. 슬럼가 주민들을 위해 먹을 걸 나눠 주다 보면 결국 남는 게 없었죠. 그런 제게 어느 날 갤라스 영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자기랑 일해볼 생각이 없냐면서 말이죠.”
“일?”
“예. 성과만 나온다면 슬럼가 주민들에 대한 지원을 대폭 늘려준다고 했습니다. 거절할 수 없는 저로선 영주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그게 마리오네트를 만드는 일이었다고?”
“그렇습니다…….”
나는 약간의 미심쩍은 시선으로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액실리움의 영주 갤라스 에이번.
제국의 관리 중에선 특이하게 우시프 제국 마법학회의 출신으로 7성급 경지까지 올랐던 고등급 마법사로 자신의 주특기였던 마법을 적극 활용해, 황실 몰래 마법 아티팩트를 대량으로 생산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자 했다.
사실이 발각되고선, 지체없이 암살 명령이 떨어졌지.
이후 미스트 대원들과 함께 놈을 암살하고선 그가 만들어두었던 아티팩트는 모두 흔적도 없이 전소시켰다.
내가 액실리움에 혼자 가는 것을 당주가 걱정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갤라스라는 대상을 처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나, 그가 만들어둔 아티팩트들이 생각 외로 많았던 만큼, 이를 처리하기 위해 꽤 많은 대원들이 투입되었었다.
거의 학회에서 생산되는 수준에 근접할 정도였지.
거기서 하나 의문점이 드는 건,
당시 소멸시켰던 놈의 아티팩트 중 마리오네트는 없었다는 거다.
마리오네트는커녕 비슷한 아티팩트 조차 없었다.
그런 와중에 사실은 이 뭔지도 모를 놈이랑 손잡고 마리오네트까지 만들었다고?
나로선 그랬구나 하며 무작정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만드는 이유가 무엇이든, 이 아티팩트가 절대 옳지 않은 곳에 쓰일 거란 걸 전 알고 있었습니다.”
“…….”
“하지만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죠. 그래도 제힘이 가치 있는 곳에 쓰인다는 애꿎은 믿음과 저를 의지하는 슬럼가의 사람들을 버릴 수 없다는 마음이 저를 이 지경까지 끌고 와버렸습니다.”
“…….”
“하지만 이젠 지쳤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군요. 비록 제 기억엔 없는 시간이라곤 하나, 그 2년 사이에 저를 죽이려 하는 사람까지 나타난 이상, 더 살아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쯤에서 죽는 게 마땅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절……!”
-콰직
같잖은 혀 놀림을 들어주는 것도 여기까지, 나는 대답 대신 녀석의 머리를 움켜쥐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앞장 서.”
“예?”
“앞장 서라고…….”
사람의 외면이 괜히 중요한 게 아니다.
분명 내면은 전혀 다른 존재임을 알고 있음에도, 지금 내가 마주한 녀석의 얼굴은,
“네놈이 그 대단한 힘을 펼친 장소가 있었을 거 아니야. 거기로 날 안내해.”
내게서 딱 도망치기 직전,
당황과 의문이 한데 뒤섞여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던 얼굴과 소름 끼치게 닮아있었다.
* * *
-서걱!
“치, 침입자다! 속히 지원군을……!”
-서걱!
다급히 지원군을 요청하려던 기사의 입은 이내 공중으로 승천하다가, 힘없이 떨어졌다.
딱 스무 명.
단순히 재보를 숨겨놨다기엔 필요 이상으로 많은 병력.
위치도 도시 중심부에서 상당히 떨어진 굉장히 외진 곳이다.
코흘리개 어린 애들도 알 법한, 어떤 중요한 것이 감춰져 있음을 대놓고 드러내는 꼴이지.
경벼병들을 처리한 나는 망설임 없이 문으로 다가갔다.
-철컹
문은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
걸쇠나 자물쇠가 걸려있는 것이 아닌, 다른 인위적인 잠금장치가 서려 있다.
제한 결계.
못해도 7성 이상의 마력이 느껴지는 거로 봤을 때, 이 장소의 주인께서 직접 걸어 놓은 듯했다.
해제하는데 그다지 어려움이 있는 건 아니지만,
“뭐해?”
“예?”
“풀어.”
굳이 내가 할 필요는 없다.
영혼 빠진 시체마냥 멍한 눈으로 있는 보리스에게 문을 열 것을 지시했다.
녀석은 황급히 문으로 달려오더니, 바로 마나를 발현했다.
-우우웅
곧 작은 빛과 함께 고운 가루가 휘날리는 소리가 들리며 결계가 해제되었다.
“되, 됐습니다!”
-뻥
해제됨과 동시에 문을 강하게 걷어찼다.
“……앞장 서.”
“옙!”
긴장한 마음에 침을 꿀꺽 삼킨 보리스는 빠르게 앞장섰다.
나는 말없이 그 뒤를 묵묵히 따랐다.
빛 한 점 들지 않은 어두운 공간이지만, 그는 주춤거리거나 망설이나 기색 없이 이어진 길을 계속해서 나아갔다.
이따금 고개를 돌리며 내 시선을 파악하려는 모습이 꽤나 거슬렸지만, 일단은 내색하지 않았다.
5분 정도를 걸었을까?
입구의 정문보다도 커다란 철문이 앞을 떡하니 가로막았다.
보리스는 지체할 것 없이, 바로 결계를 풀었다.
“하, 하나만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침묵으로 응답했다.
“전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
차마 그 질문을 내 얼굴을 보며 할 순 없었는지, 놈의 시선은 계속 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제가 아무리 기억이 없다 해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당신 같은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에게 되도 않는 죄를……!”
-쾅!
나는 대답 대신 녀석의 목을 움켜잡으며 그대로 벽에 처박았다.
“혓바닥 작작 놀려 죽기 싫으면…….”
구구절절 설명해봤자, 기억조차 안 나는 놈을 상대로 무슨 말을 지껄일까?
네놈이 지금 무슨 이유로 어떤 말을 하든 간에 상관없이, 내게는 하찮은 도발에 지나지 않는다.
네놈을 죽일 수 없어 이렇게라도 분노를 해소할 수밖에 없는 내가 너무나도 짜증나거든.
또다시 분노에 휩싸인 내 힘을 견디지 못했는지, 굳게 닫혀있던 출문이 스르릉 열리기 시작했다.
문에 막혀있던 공간 속의 빛이 환하게 번쩍이며, 너머에 있던 낯선 무언가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순간,
“……!?”
난 눈을 의심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