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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작가의 막내도련님은 암살자-136화 (136/325)

제136화. 이름 없는 유적 (5)

“선배! 시안 선배!”

루나브의 애타는 부름에도 낙석 너머에선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무사하다면 무사하다고 답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급기야 몸을 일으킨 루나브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더니, 마나를 발현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이를 지켜본 카론이 재빨리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진정하십시오. 루나브님! 유적을 무너트릴 생각입니까?”

“놔요.”

짧고 간결한 대답이었지만, 루나브의 눈엔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가득했다.

당황한 카론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놔주었다.

“설명하세요.”

“무얼 말입니까?”

“멀쩡한 유적을 난데없이 무너트린 이유 말이에요.”

그녀의 갑작스런 추궁에 카론은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어찌 그런 되도 않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루나브는 동요하는 기색 없이, 카론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아지즈 페레이라…….”

“……?”

때 아닌 호명에 이름의 주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왕국 서부 아르그 지역 출신 땅 속성 계열 연구부 소속 7성 등급 보유자…….”

학회에 기록되어있는 그의 신원정보였다.

“세트 왕자에게 질문을 해서 시선을 분산시키는 동안, 당신이 뒤에서 마법을 썼죠?”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계속 가만히 있…….”

“내가 지금 당신의 몸을 끌어안아서 한 번 확인해볼까요? 마법을 썼는지 안 썼는지?”

탐방에 참여한 마법사들은 전부 일정 이상의 마법 등급과 학회에서도 어느 정도 위치가 있는 자들이었다.

즉 그녀가 가진 고유의 능력을 그들로선 모를 수가 없었다.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 없던 아지즈는 결국 시선을 회피했다.

“무의미한 의심은 옳지 않습니다. 루나브님. 일단은 이 유적에서 나가시죠. 나가서 나머지 학회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목소리를 가라앉힌 카론은 루나브에게 밖으로 나갈 것을 제안했다.

“도움이요?”

이에 그녀의 얼굴이 급격하게 싸늘해졌다.

“마법 발전이랍시고 되도 않는 헛짓거리를 남발하고 있는 당신들을 위한 도움말인가요?”

카론을 제외한 나머지 학회원들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굳어버렸다.

반면 카론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정색한 눈빛으로 루나브를 빤히 바라보았다.

언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미지의 공간 안에서 벌어진 두 남녀의 살벌한 기 싸움.

“이러셔봤자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루나브님…….”

급기야 눈썹을 치켜세운 카론이 그녀를 연민하듯이 말했다.

“루나브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무엇이 진정 학회를 위하고, 왕국을 위하고, 당신을 위하는 일인지 말입니다. 이런 불필요한 일에 관심을 두는 건 아무런 도움이…….”

“그건 뭣도 모르는 당신들 생각이고.”

그녀는 몰래 생성시켜놨던 푸른빛의 마나를 보란 듯이 내보였다.

“난 당신들의 꼭두각시가 아니야.”

-번쩍

일순간 어둠 속에서 나타난 환한 빛이 그들의 눈을 덮쳐버렸다.

순식간에 시야가 차단된 학회원들은 괴로움에 눈을 돌렸다.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선 시선을 되돌렸지만, 그녀가 있던 자리엔 이미 먼지만 휘날리고 있었다.

루나브는 낙석이 떨어지지 않은 다른 방향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카론은 일그러진 얼굴로 학회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두 명은 여기 남아 상황을 지켜보고 나머진 그녀를 잡으러 간다. 혹여 다시 나타난다면 반드시 산채로 생포하도록!”

“저 안에 있는 이들은 어찌할까요?”

“죽여.”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는 간결한 대답이었다.

“어차피 빠져나올 일도 없을 것 같지만…….”

이미 그들에게 있어 시안과 세트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었다.

하늘이 내려준 절호의 기회를 허무하게 버릴 순 없는 노릇.

루나브가 도주한 쪽을 바라보며 카론은 조용하게 읊조렸다.

“모든 것은 인간의 발전을 위한 것이니…….”

주문과도 같은 다짐을 끝으로 그들은 어디로 이어졌는지 모를, 유적의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

* * *

반으로 갈라져 몸 한쪽이 앞으로 엎어질 거라 생각했지만, 정말 예상치 못한 일격이 들어와 버렸다.

물론 피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허나 다시금 자세를 잡고 녀석을 바라본 나는 이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야 저거?”

케이람에게 베인 두 신체가 떨어지지 않고 급속도로 이어 붙더니, 급기야 꾸물꾸물 빠른 속도로 재생되고 있었다.

마치 생물의 몸이 아닌, 진흙더미나 늪 한가운데를 벤 듯한 기분.

내가 아는 발록은 저리 뛰어난 재생력을 가진 마수가 아니었다.

이건 저 마수의 고유 능력이 아닌, 저 마수를 소환한 누군가가 녀석에게 재생 마법을 걸어 놓은 것이다.

이게 무슨 혼종이야?

[어떤 머저리가 이런 같지도 않은 놈을 만든 거야?]

벤 느낌이 영 탐탁지 않았는지, 케이람도 눈을 찡그리며 불쾌감을 표했다.

발록은 당황한 나를 지그시 쳐다보다가도 다시 한 번 손에서 마나를 발현시켰다.

좀 전과 같은 공격 마법은 아니었다.

파괴의 목적이 아닌, 나와의 전투에서 발생할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제한 결계를 생성한 것이다.

드래곤과 필적할 힘을 가졌다고 불리는 만큼, 발록 역시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종족 중 하나다.

허나 인간이나 드래곤과 비교했을 때, 지성이 그리 뛰어나진 않았으며, 지성보단 파괴와 파멸이라는 순수 본능이 앞서는 종족인 만큼 마계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마수였다.

그런 발록이 유적을 지키기 위해 제한 결계를 펼쳤다라.

아마 이 마수를 소환한 자는 녀석으로부터 파괴가 아닌, 수호의 본능을 심어줌으로써 유적을 지키게 한 것으로 보였다.

뭐 그렇다 해서 말이 통할 존재라는 건 아니지.

본능이 뭐든 간에 상관없이, 이놈을 죽여야 한다는 것엔 변함이 없다.

일단은 잠시 거리를 벌린 채, 녀석의 동태를 확인해보았다.

저 발록이 정말 이곳 주민들 사이에서 레미하람이라고 불리는 마수라면, 결국 마서의 힘을 통해 소환됐을 가능성이 크겠지.

그렇다면 저 발록의 몸 어딘가엔 마력이 응집하고 있는 핵이 있을 것이다.

마법으로 창조된 소환수들은 본디 사람으로 따지면 심장 역할을 하는 마력의 핵이 존재한다.

달리 말하면 심장과 마찬가지로 공략할 수 있는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거지.

그걸 파괴한다면 제 아무리 뛰어난 재생력을 가진 소환수라해도 순식간에 소멸할 것이다.

길을 확인한 나는 바로 안개의 힘을 발현했다.

“암무(暗舞) 4식: 살기감지!”

발현된 안개에 마력을 융합하여 발록의 내부를 확인해 보았다.

수만, 수억 개로 나누어진 사람의 혈관처럼 전신에 걸쳐 흐르고 있는 마력의 지류.

사방으로 뻗어 나간 강줄기가 모이고 모여 바다로 이어지듯, 얽히고 읽힌 마력의 흐름도 한 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머리.

정확힌 정수리 한가운데.

검게 응축되어 있는 저 마력의 핵을 부숴야 한다.

제한 결계까지 생성된 마당에 나도 날뛰지 않을 이유는 없지.

케이람의 검 끝으로 서서히 몰려드는 검은 안개의 기운.

오래 기다릴 것 없이, 핵을 부술 준비가 완료된 순간,

-탓

바로 자리를 박차고 질주했다.

이에 살기를 감지한 발록이 퇴화한 날개를 펴고 돌풍을 일으켰다.

-휘우웅!

석벽에 금이 갈 만큼 위협적인 칼날바람이 몰아쳤지만, 내게는 어림도 없는 산들바람에 불과했다.

나는 비상의 날갯짓을 하는 새처럼 가볍게 뛰어올랐다.

“무검(舞劍): 굳건한 대목의 뿌리!”

-콰직

두꺼운 표피를 뚫고나간 도신이 출렁이는 마력의 핵과 맞닿은 순간, 케이람에 둘러싸여 있던 안개의 기운이 발록의 몸속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

발록은 저항은커녕 비명조차 내지르지 않았다.

-쿵!

마침내 무릎을 꿇은 녀석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핵을 파괴한 이상, 아까와 같은 재생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소멸이 진행되려는 듯, 곧 발록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음.

뭔가 허무한데?

큰 문제 없이 처리하긴 했는데, 뭔가를 얻었다고 하기엔 다소 난감한 상황이다.

결국, 이 마수가 마서랑 어떤 관련이 있는지 무엇 하나 속 시원히 알아낸 게 없지 않은가?

말도 못하는 소환수를 상대로 붙잡고 고문을 할 수도 없었던 마당에, 나로선 그냥 죽이는 게 최선이었다.

몸을 뒤져서 뭐라도 확인해볼까 싶었지만, 핵이 부서진 소환수는 이미 소멸을 완료하여 반투명 상태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윽고 사라진 자리에 먼지만 휘날리는가 싶었지만,

“……!”

순간, 어른 손톱만 한 크기의 작고 노르스름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신체조직은 물론 털 한 올조차 모조리 소멸한 발록으로부터 유일하게 남은 조각이었다.

나는 떨어진 동전 줍듯 그것을 재빨리 주워보았다.

먼지가 뭍은 듯 얇고 까끌까끌한 표면.

힘을 주면 찢어질 것 같고 물에 닿으면 흐물흐물해질 것 같은 나약한 재질.

더 볼 것도 없이 이건……

종이였다.

[야 그거 내놔 봐!]

어느 틈엔가 실체화한 케이람이 내 손에 있던 종이를 순식간에 낚아챘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이리저리 살펴보던 것도 잠시, 그녀의 얼굴이 곧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이 등신은 뭔 생각으로 이걸 흘려놓은 거야?]

분위기를 보니 종이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이에 무엇인지 물어보려 하자,

[네가 찾던 거다 주인아.]

그녀가 들고 있던 종이를 다시금 내 쪽으로 던졌다.

“이게 뭔데?”

[뭐긴 뭐야 마서의 조각이지.]

얼떨결에 벙쪄버린 나를 보며 케이람은 찝찝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놈 지금 여기 있어.]

* * *

미로 같은 구조를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루나브의 앞엔 외길만 속절없이 이어졌다.

아무리 구시대의 유적이라지만, 단순해도 이리 단순할 순 없을 것이다.

하다못해 갈림길에 트릭이라도 설치하여 시간이라도 벌어야 할 판에, 이 야속한 유적은 그마저도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이대로 간다면 머지않아 추격해오는 학회원들에게 붙잡히게 될 터.

그러면 기껏 시안을 따라온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루나브로선 상상하기조차 싫은 일이었다.

“꺄악!”

숨 가쁘게 달리던 나머지,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황급히 몸을 일으켜 다시 도주하려던 것도 잠시, 고개를 든 그녀는 별로 좋지 않은 무언가와 마주치고 말았다.

“좋지 않네…….”

돌아갈 곳이 전혀 보이지 않는 막다른 길이었다.

루나브는 분한 마음에 이를 아득 갈았다.

하지만 좌절하진 않았으며, 마저 몸을 일으킨 뒤 곧바로 자세를 잡았다.

-우우웅

나아갈 길이 없다면, 부숴서 만들면 그만.

설사 불가능한 일일지언정, 주저앉아 눈물이나 질질 흘리는 것보단 백 배, 천 배 나을 것이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이렇게 도망치는 것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얼마 남지않은 인생, 이리 휘둘리나, 저리 휘둘리나, 아무런 의미가 없을 거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막막하기만 했던 앞날에 어느 순간부터 나타난 작은 길,

이 길은 남에 이끌려서가 아닌, 스스로가 발을 내디디며 나아갈 수 있는 오로지 나만을 위한 길이었다.

그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이런 곳에서 절대 쓰러질 수 없었다.

그런 굳은 결의를 양손에 모인 마나에 담아내며, 마침내 벽을 부수기 위한 주문을 외치려던 순간,

“……?”

그녀의 앞에 대뜸 낯선 검은 구체가 나타났다.

루나브는 당황한 마음에 손을 내리며 구체와 눈을 마주하였다.

그러자 작은 공만 했던 구체가 대뜸 그녀의 몸을 감싸 안을 정도로 커지더니, 이윽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홀이 만들어졌다.

홀 안에선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던 낯선 기운이 흘러나왔으며, 마치 들어오라는 듯 유혹의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루나브는 자신도 모르게 그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

구체 안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자신이 달려왔던 유적의 통로와 유사한 공간.

하나 다른 게 있다면, 자신 외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정도였다.

통로 중앙에 쪼그려 앉아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는 흑빛 장발의 남성.

“…….”

반쯤 내려앉은 눈동자엔 어딘지 모르게 흥미로움이 담긴 듯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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