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공작가의 막내도련님은 암살자-115화 (115/325)

제115화. 응보 (2)

먹구름이 드리워진 우중충한 하늘과 그 속에서 내리는 굵은 장대비.

칙칙하고 어스름한 날씨는 그녀의 불안정한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끼익

문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어오자, 비올렛 황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에쉘입니다.”

원했던 손님이 아니었는지, 황녀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실망하신 모양이군요.”

에쉘이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묻자, 황녀 또한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실망은 제가 아니라 당신이 한 것 같은데요. 에쉘 공? 계획이 틀어져서 아쉬우시겠어요? 아님, 아직 보여주지 않은 최후의 계획이라도 남아있으신 건가?”

“…….”

“이렇게 된 거 서로 대범하게 말해볼까요? 날 죽이려 했죠? 오라버니의 사주를 받고?”

에쉘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투기심 많은 우리 오빠가 이런 일에 절 그냥 보낼 린 없겠죠. 오라버니의 사람인 당신이 붙은 이유가 그 증거일 테고요.”

작게 실소한 에쉘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양피지 스크롤이었다.

“마수를 소환할 수 있는 소환 스크롤입니다. 일정량의 마나만 발현해내면 그 자리에서 바로 마수를 불러낼 수 있는 굉장히 유용한 아티팩트죠. 물론 지금 이 자리에서 쓰는 것도 가능합니다.”

사실상 자백이나 다름없는 설명이었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황녀님의 생각대로 루이넬 황자님은 제게 전선에서 황녀님을 죽여 달라 부탁 하셨고, 전 이 스크롤을 통해 순방 도중 마수들을 소환하여 혼란을 유도한 다음, 황녀님을 암살하려 했습니다.”

-화르륵

허나 이제는 필요가 없어졌다는 듯, 에쉘은 그 자리에서 스크롤을 불태워버렸다.

“하지만 계획은 처음부터 꼬였습니다. 예상치 못한 황군의 증원과 더불어, 저희 측에 심어둔 황녀님의 기사가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그래요. 하지만 죽임당할 걸 알고도 발버둥 치지 않으면, 그건 지능 없는 미생물이랑 다를 바가 없어요.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거죠.”

황녀는 팔짱을 끼며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였다.

“하나 물어볼게요. 에쉘 공. 당신은 이번 순방에서 정말 저 혼자만을 죽이려 했나요?”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제게 엘리스를 개인 수호 기사로 추천할 리 없잖아요? 당신의 계획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여동생을 말이에요…….”

“…….”

“같이 죽일 생각이었던 거죠? 저랑 동생을?”

비올렛 황녀가 빛의 기사 엘리스로부터 개인 호위를 받길 원한다.

이것은 에쉘이 처음 엘리스와 접했을 때 전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진실은 그러지 않았다.

이는 황녀가 아닌, 어디까지나 에쉘이 원한 일이었으며, 황녀는 그의 추천에 응해 엘리스를 부른 것뿐이었다.

“대답하지 않는 걸 보니, 얼추 제 생각이 맞았던 모양이네요.”

에쉘은 옅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뭐 이유는 굳이 안 물을게요. 콩가루 집안이 어디 한둘인가요? 물보다 진한 피마저 져버릴 만큼 다 개인의 사정이 있는 거지…….”

황녀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뭐든 선수는 먼저 치는 게 좋은 법이죠. 세실리아에게 듣자 하니, 엘리스도 당신을 어지간히 불신하고 있다던 걸요? 이대로 놔뒀다간, 에쉘 공의 그 고운 민낯이 훤히 드러날지도 모르겠어요?”

“……재밌는 사실을 하나 알려드리죠.”

침묵을 유지하던 에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번 순방에서 발생한 일은 아직 황성에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정보원조차 아직 보내지지 않았죠.”

“그래서요?”

“순방은 끝났지만, 순방에 대한 보고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겁니다.”

언뜻 별거 아닌 말로 들릴 수 있지만, 속뜻은 절대 그러지 않았다.

순방에 대한 보고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이 말은 즉 황실의 순방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그녀에게 더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음을 예고하는 일종의 경고였다.

이를 알아챈 황녀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요?”

에쉘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 계획은 이미 무산 되었습니다. 이제 와 새 계획을 짜고 싶은 마음도 없죠. 다만 황녀님의 시야를 더 넓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황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굳이요? 당신은 우리 오빠의 사람이잖아요? 자신의 주군이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굳이 좋은 일을 시켜줄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요?”

“누가 그러던가요? 루이넬 황자님이 제 주군이라고?”

-콰릉!

순간 장대비가 내리는 창문 밖에서 거센 천둥이 몰아쳤다.

“네……?”

비올렛 황녀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 생각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에쉘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전 그 누구도 섬기지 않습니다. 하물며 황자님을 섬기고 있지도 않죠. 그저 서로의 목적을 위해 협업하는 비즈니스적 관계일 뿐입니다.”

“그 말을 지금, 저보고 믿으라는 건가요?”

“허무맹랑한 말로 거짓을 꾸밀 만큼, 제 입은 가볍지 않습니다.”

“그럼, 이 말을 오라버니에게 그대로 전달해도 된다는 거죠? 오라버니도 그리 생각하고 계실지 참으로 궁금하네요!”

에쉘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황녀는 당황한 나머지 말을 잇지 못했고, 둘 사이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에쉘…… 당신은 대체 뭘 원하고 있는 거죠?”

다시금 입을 연 황녀의 목소리에는 이전과 다르게 미세한 떨림이 일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한 순간, 경계심과 더불어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이 나라를 원하기라도 하는 건가요?”

“그런 게 아닙니다.”

에쉘은 황녀의 추측을 바로 일축했다.

“전 인간이란 존재가 추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꿈을 꾸려 합니다.”

“가장 높은 꿈?”

“네. 인간에게 규정된 한계의 벽을 넘어, 닿을 수 있는 최상의 경지에 이를 것입니다.”

황녀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 너무 허무맹랑한 말 아닌가요? 뭐 신이라도 되시려고요?”

“어찌 생각하실지는 황녀님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에쉘은 몸을 움직여 황녀의 앞까지 서서히 다가갔다.

그녀와 코앞의 거리에서 눈을 마주한 순간,

“제 꿈을 위한 길에 황녀님이 함께해 주셨으면 합니다.”

에쉘은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보고 당신의 사람이 되어라……. 이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지고한 황실의 일원을 본인의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굉장히 위험한 발언이었다.

발언의 당사자는 전혀 문제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전 누구도 섬기지 않는다고. 그러니 황녀님께서 제 사람이 돼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올렛 황녀는 생각했다.

이 무례하고도 불순한 행동에 대해 과연 자신은 어찌 반응해야 할까?

황녀의 위세를 보여주며 그를 눌러야 할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온갖 잡생각들은 곧 사라지고, 단 하나의 생각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하게 되었다.

지금 당장 그의 손을 잡아야 한다고,

마음을 굳인 비올렛 황녀가 에쉘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킥!”

공간 한쪽에서 낯선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내 인기척을 느낀 에쉘과 황녀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쿠궁!

“……!”

또 한 번 천둥이 몰아치면서 창문턱에 올라서 있는 낯선 존재의 실루엣이 비춰졌다.

마치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창문턱에 쪼그려 앉아, 그들을 흥미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웃음소리가 들리기 전까진,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신을 감춘 칠흑의 망토와 가면.

이 벨리아스 전체를 통틀어 저런 차림을 하고 다닐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누구냐?”

정신을 차린 에쉘이 가장 먼저 물었다.

-툭

미지의 존재는 말없이 한 손에 들고 있던 주머니를 그들 쪽으로 던졌다.

데굴데굴 굴러간 주머니는 비올렛 황녀의 앞에 멈추었다.

뭔가 꺼림칙한 기운에 뒷걸음질 친 황녀 대신, 에쉘이 안을 확인해보았다.

“꺄아악!”

내용물을 확인한 황녀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에쉘의 얼굴 또한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세, 세……!”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한 2황녀는 떨리는 손길로 주머니 속 내용물을 가리켰다.

미지의 존재가 던진 것은 도저히 눈뜨고 쳐다볼 수 없을 만큼 기괴하게 일그러진,

“세실리아!”

기사 세실리아의 목이었다.

대체 어떤 고통을 겪었으면 사람이 얼굴이 저만큼이나 괴이해질 수 있는 건지, 속에서 역한 감정이 치솟을 정도였다.

“…….”

미지의 존재는 선물이 맘에 들었냐는 듯, 비열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 * *

예기치 못하게 참 재밌는 얘기를 들어버렸다.

인간이란 존재가 추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꿈?

참으로 멋있는 말이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오르겠다는 굳센 의지가 돋보이는 말이 아닌가?

근데 이 멋있는 말을 저 악마의 입에서 들어버렸으니, 내 어찌 안 웃고 넘길 수가 있을까?

어이없다 못해 참 가소로울 지경이다.

“……!”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건가? 어째 말들이 없다.

선물이라도 주면 입을 열지 않을까 싶어 한 번 던져봤는데, 얼마나 감격했으면 주저앉기까지 하는지, 참으로 뿌듯할 따름이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누구냐, 네놈은?”

존귀해 마지않는 형님께서 어찌 귀여운 동생의 얼굴도 못 알아보실까?

물론 물어봤다 해서 답할 생각은 1도 없다.

애초에 저 자식이 알고 싶어 하는 걸 내가 알려줄 리도 없지 않은가?

나는 말 없이 녀석을 향해 걸어 나갔다.

2황녀와 세실리아가 누나의 암살을 작당했다는 걸, 녀석 또한 알고 있을 터.

그걸 알면서도 2황녀에게 손을 내미는 꼴이라니.

가만 생각하자니 또 화가 치밀어 오른다.

-기이잉

위협을 감지한 그가 검에 마나를 주입했다.

새하얀 빛의 마력이 다가오지 말라는 듯 찬란한 광채를 내뿜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이이상 불응하면 네놈을……!”

-깡!

같잖은 개소리에 웃어주는 것도 한 번이면 족하다.

놈의 목소리를 더 듣고 있다간, 간신히 부여잡고 있는 내 정신마저 어찌 변할지 모를 것이다.

녀석의 검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괴, 괴한! 괴한이다! 괴한이 지금 내 방에……!”

사람이 겁에 질리면 보통 몸의 감각이 정지되기 마련인데, 대게 입은 그러질 못한다.

나는 한걸음에 달려가 황녀의 입을 틀어막았으며, 자연스레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

두려움에 잠식된 얼굴이 아주 가관이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라 했던가?

뭐 인간이 할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지.

하지만 이를 위한 수단이 우리 누나였다는 게 나로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마음 같아선 이년에게도 나뒹구는 저 목의 주인처럼 우리 누나가 겪은 아픔을 돌려주고 싶지만…….

-피익

그녀의 몸이 대뜸 픽하고 쓰러져버렸다.

기절한 것이다.

김새는군.

어차피 오늘 죽일 것도 아니니 그냥 내버려 둬도 상관없겠지.

몸을 일으킨 나는 다시 녀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

나를 의문의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지만, 정작 몸을 움직이지는 못하고 있다.

장차 대륙을 구원할 수호자께서 일개 암살자에게 벌벌 떠는 꼴이라니.

이런 놈을 지금 죽여 봤자 성이 차지도 않겠지.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의문스럽겠지.

지금 벌어진 상황이 미치도록 이해가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네놈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일은 네놈에게 있어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네놈이 계획하고, 네놈이 장차 이루고 싶은 그 원대한 꿈은,

나로 인해 철저히 부숴지고 망가질 것이다.

그 순간이 되도록 빨리 오기만을,

나는 무척이나 기다리겠지만.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