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힘의 조건 (6)
낯선 공간으로의 갑작스런 전이.
간신히 몸을 추스른 리사는 바뀌어버린 주변에 두리번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낡은 방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
변해 버린 건 공간뿐만이 아니었다.
“리, 린제님?”
사람의 형체는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엔 검은 안개로 둘러싸인 묘한 형체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무척이나 기괴했으며, 거부감과 함께 오한이 돌았다.
급히 고개를 돌린 리사는 자연스레 소년을 쳐다보게 되었다.
“……!”
이전과 같은 덤덤한 얼굴은 아니었다.
이빨이 보일 정도로 살짝 벌어진 입술과 좁혀진 미간으로 보아 그도 어지간히 당황한 듯 보였다.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런 낯선 광경에 놀라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게 이상할 정도니.
그 또한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이 당황한 것일까 생각하던 순간,
“하!?”
그가 웃었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정신이 나가다 못해 웃음을 남발한다는데, 그런 것 같진 않았다.
그 웃음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순 없겠지만, 그래도 보이는 대로 얘기한다면,
어이없어서 웃은 것 같았다.
* * *
인간이 신의 힘을 쓸 수 있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이 직접 인간에게 힘을 전수하는 경우.
미스트 스톤을 통해 아에르의 힘을 물려받은 내가 딱 그런 경우고,
다른 하나는 신의 힘이 전승된 무구나, 아티팩트를 통해 그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나였다.
신의 힘을 거의 통째로 이어받았다 싶은 자식 같은 존재가 지금 내 품에 있으니.
“놀랐나 보구나! 그럴 수밖에 없겠지! 이건 너희가 절대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는 전능한 힘이니 말이야!”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애매한 신음은 무시한 채, 그녀가 뿜어낸 안개의 기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건 뭐 익숙하다 못해 친숙할 정도.
그냥 그 머저리 신이 새로 만들어낸 아공간이라 해도 믿을 만큼 전혀 거리감이 없었다.
이런 공간은 나도 못 만든다.
“허나, 자격이 있는 인간이라면 충분히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너와 마주하고 있는 나처럼!”
잠시 흐릿해진 안개 속에서 그녀가 나를 향해 의기양양한 눈웃음을 지었다.
더불어 왼쪽 네 번째 손가락의 착용한 금반지를 보란 듯이 내보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저건 아티팩트다.
이른바 <흡수의 반지>.
일정량의 마나를 응축해 주머니처럼 달고 다닐 수 있는 일종의 저장장치로, 때에 따라선 마나뿐만이 아닌 다른 기운들도 담아낼 수 있는 물건이다.
일단 정황상 저 반지에 아에르의 힘을 담아낸 것으로 보이는데…….
“하!?”
어이가 없어 절로 웃음이 나왔다.
설마하니 그 머저리 신은 자신의 힘이 탈취당하도록 놔둔 건가?
도둑이 창고에 처박힌 보물 훔치는 것도 아니고, 이건 당사자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와중에 대놓고 가져간 꼴이었다.
저런 흔하디흔한 아티팩트에 신의 힘이 담아졌다는 것도 웃기지만, 저걸 시도하고 성공했다는 게 참…… 뭐라 할 말이 없다.
아마 장담하는데 당주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다.
알고 있었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
내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달려와, 저 아티팩트를 부수려 했을 거다.
“내가 조직을 나와 램버스타에 정착한 이유가 뭐라 생각하느냐? 돈을 벌기 위해서? 그건 부가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도시에 은거하면서 줄곧 키우고 있었다. 신의 힘이 아닌, 온전한 나만의 힘을 말이다!”
그녀의 목소리로부터 개인적인 울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참 어리석지 않느냐? 결국 우리 인간들도 신의 손에 창조된 만큼, 그들의 힘을 이용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거늘! 어찌 계승자란 존재 하나를 위해 의미 없는 기다림을 감행해야 하냔 말이다!”
확실히 뚫린 입이라고 두서없이 떠드는 건 아니다.
실제로 나란 존재가 미스트에 등장할 때까지 지난 50년 동안, 수많은 미스트의 대원들이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으니 말이다.
그 속에서 아무런 불만도 없었으면 거짓말이겠지.
결국 저 여자도 그런 부류 중 하나인 것이다.
“어쩌면 너 역시 안타까운 존재일지 모르겠구나. 변하는 세상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수동적으로 따를 뿐이라니. 이제 와 왜 활동을 재개했는진 모르겠지만, 상관없다! 너희의 조직은 머지않아 내 손에 괴멸될 것이니…….”
“꿈이 너무 과한 것 같은데?”
그녀가 가소롭다는 듯 말을 이었다.
“네 병아리 같은 눈으론 그리 보이겠지. 허나 난 그러니 너를 시작으로 네 조직과 네 당주에게까지 똑똑히 인지시켜 줄 것이다! 그러곤 다시 한번 아에르님 앞에 서서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야말로 당신의 힘을 온전히 이어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말이다!”
“…….”
기분이 되게 묘하다.
저 여인의 말에 다소 공감이라도 한 것일까?
자신의 힘이 썩히는 게 싫어 조직에서 나왔고, 스스로 힘을 키우며 세력을 증대해나갔다.
그 목적이 어떻든 간에 결국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마음을 굳히고 이행했다는 것인데, 솔직히 말해 내가 욕할 수준은 못 될 것 같다.
왠진 모르겠지만, 이 말 한마디를 묻고 싶어졌다.
“그 힘으로 당신은 뭘 할 생각이지?”
나를 죽이고, 조직을 괴멸시킨 뒤, 아에르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그다음엔 과연 뭘 하고 싶은 걸까?
린제는 기다렸다는 듯 환희에 찬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다!”
바로 되물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
“그래! 본래 모든 힘에는 그것을 소유하기 위한 자격이 필요한 법! 하지만 이는 힘을 소유하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다! 힘과 능력이 있음에도 쓰지 않고 묵혀만 둔다? 그것이야말로 엄청난 기만이고 낭비라 할 수 있지! 주어진 힘을 아낌없이 발휘해야한다! 그게 바로 힘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다!”
뭔가 장황스럽게 말하긴 했어도, 사실 뜯어보면 뻔하고 당연한 말이었다.
자신이 가진 힘을 아낌없이 발휘해야 한다.
세간에 흔하디흔한 명언서를 들추다 보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말이지.
중요한 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있겠지만.
훗.
사람은 가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깨달음을 얻었을 때라지.
내가 지금 딱 그렇다.
당주가 이런 이상한 곳에 왜 날 보냈는지, 조금은 알 것 같거든.
“좋은 말이네.”
나로선 흔치 않은 인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결국 이 자리에서 당신은 내 손에 죽을 테니까.”
-스윽
늘 그렇듯, 천천히 케이람을 들어 그녀에게 겨눴다.
눈앞에 둔 상대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암살자들만의 의사.
그걸 인지한 린제는 같잖은 듯 헛웃음을 내었다.
“하! 조금은 깨달은 게 있나 싶더니만, 여전히 어리석구나. 하긴 살려달라고 비는 것보단 낮겠지. 내 특별히 네게 어울리는 죽음을 선사해주도록 하마!”
살며시 손가락을 내민 그녀가 이내 술식을 외쳤다.
“암무 6식: 무(霧)의 공간!”
* * *
-스스스
손가락에서 빛줄기처럼 뻗어 나간 안개는 곧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시안을 사방으로 감싸 안았다.
시안은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잠식되었으며, 곧 그를 봉인한 하나의 공간이 완성되었다.
“신체 능력 자체는 간부급에 비견될 정도지만, 결국 비기를 다루는 데 있어선 어리숙할 수밖에 없지.”
미스트의 여섯 번째 비기, 무(霧)의 공간.
일정 영역을 검은 안개로 뒤덮어, 안에 있는 대상들로 하여금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하는 기술.
단순히 벽을 치는 것만이 아닌, 대상이 보유한 일정량의 힘과 마나까지 모조리 제어시키는 만큼 상대에게 엄청난 무력감을 줄 수 있는 비기였다.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
그리고 그 속에서 야기되는 비참함.
린제의 목적은 시안에게 그런 잔혹한 감정을 선사해주는 것이었다.
“그 안에서 천천히, 아주 오랫동안 음미하거라! 그리고 마지막엔 깨닫거라! 너란 존재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절대적인 존재 앞에선 땅바닥에 기는 벌레들보다 못할 만큼 무력한 존재였다는 걸 말이다!”
말을 마친 린제의 양손이 활짝 펼쳐진 순간, 내재되어있던 기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나갔다.
그 기운들이 점차 시안의 몸을 덮어나갈수록, 그녀의 웃음소리는 점차 커지고 있었다.
[아에르의 힘을 담아낸 반지라……. 이런 거 보면 인간들도 참 재밌단 말이야?]
허나 환희는 오래가지 않았다.
등 뒤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린제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
피를 머금기라도 한 듯 강렬하고 고혹적인 눈빛이 그녀를 향해 살가운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소한 인기척도 없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 버린 의문의 여인.
눈을 의심하기도 잠시, 린제는 곧 자신의 몸이 석화라도 걸린 것 마냥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달았다.
[호, 대단한데? 보통 인간이라면 움직일 생각조차 못할 텐데 말이야.]
냉소가 담긴 목소리는 린제의 간담을 절로 서늘하게 만들었다.
마치 청초한 얼굴의 악마가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기분.
허나 흑발의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의 반지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솔직히 놀랐어. 인간 주제에 아에르와 유사한 아공간을 만들다니. 그 머저리 신이 알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나?]
그녀는 느꼈다.
자신이 펼친 아공간의 기운과 유사할 만큼 매우 익숙한 기분을,
하지만 그 익숙함을 모두 억누를 만큼의 이질적인 기분이 그녀의 감정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아공간이란게 참 재밌는 곳이야. 일종의 자신을 위한 파라다이스라고나 할까? 이 안에 있을 때만큼은 모든 할 수 있는 신의 기분을 느끼게 해주거든. 하지만…….]
흑발의 여인은 허공에 손을 뻗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주변에 만개했던 검은 안개가 일제히 반응하더니, 즉각 한 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만큼 사수하기도 어려워. 언제, 어디서, 자기보다 높은 초월적인 존재가 이곳을 강탈해갈지 모르니까.]
-슈우욱
몰려든 안개는 여인의 손바닥 위에서 소용돌이처럼 돌고 있었다.
마치 본연의 주인을 찾아가기라도 한 듯.
린제는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저었다.
“어, 어째서! 어째서! 이곳에 당신이 있는 겁니까?”
[어머? 날 아는 거니?]
여인은 능청스럽게 웃어 보였다.
마검 케이람.
검은 안개의 신 아에르의 힘을 이어받은 무구이자 계승체.
미스트의 몸을 담았고, 안개 신의 힘을 다루는 이로선 모를 수가 없는 존재였다.
믿을 수 없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허나 그녀는 곧 깨달아야만 했다.
케이람이란 마검이 이 자리에서 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은 달리 말해 신의 무구를 다룰 수 있는 존재 또한 이 자리에 있다는 말이었다.
“그, 그럼 네놈이 설마……!”
린제의 시선은 즉시 무(霧)의 공간에 갇힌 시안에게 향했다.
칠흑의 안개 속, 희망처럼 뻗어 나온 한 줄기의 빛.
사실 빛처럼 보이는 거지 엄밀히 말해 빛은 아니었다.
추악한 살기의 기운이 날카로운 도신에 반사되어 빛처럼 보였을 뿐.
그 검의 끝은 정확히 린제의 목덜미를 향해 있었다.
“계승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