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힘의 조건 (5)
솔직히 조금 놀랐다.
검을 잡은 자세,
칼끝에서 전해지는 악력,
공간을 활용하는 능력까지.
단순한 매니저는 아닐 거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그 이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눈빛.
나를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강렬한 살기가 불길처럼 퍼지고 있었다.
살고 싶으면 최대한 빨리 이 도시를 벗어나라 했던가?
불과 몇 시간 전, 우유부단하기 그지없던 모습과는 정말 딴판이었다.
린제는 뒤에서 흐뭇이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스릉
짧은 대치를 이어가던 것도 잠시,
그녀가 허리춤에서 또 한 자루의 검을 빼 들었다.
-챙 챙 챙
부드러운 곡선과 함께 이어진 네 번 의 검격.
너무 크지도, 그렇다고 단조롭지도 않은 것이 마치 나비의 날갯짓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내게 닿을만한 공격은 아니었다.
3평 내지의 좁은 공간인 만큼, 이런 상황에서 큰 동작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걸 그녀도 모르지는 않을 터.
나는 슬그머니 한쪽 발을 내빼 두 걸음 정도 거리를 벌렸다.
그다음 검 자루를 돌려 자연스레 고쳐 잡은 뒤, 내뺐던 발을 다시 앞으로 내디뎠다.
치켜 올렸던 검을 대각선으로 한 번, 이후 반쯤 들어 일직선으로 또 한 번.
-챙 챙
동선을 예측하고 있었는지 그녀는 무리 없이 막아냈다.
허나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나는 앞선 두 번의 검격을 자연스레 연계해 검격을 재개했다.
-슈욱
오른쪽 아래로부터 사선으로 한 번,
-챙
재빨리 검자루를 돌려 반대로 고쳐 잡은 뒤 수직으로 또 한 번.
네 번까지는 예상 못 했는지 다소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도 흔들림 없이 막아내는 그녀였다.
안타깝게도 아직 안 끝났다.
떨어진 발이 다시 지면에 닫기까지 불과 1cm.
수직으로 베어 가른 팔을 다시 한번 명치까지 들어 올린 뒤 정중앙을 향해 부드럽게 내질렀다.
-까앙
기어코 막지 못한 마지막 연격에 그녀의 한쪽 검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튀어 나간 검이 바닥으로 꽂힌 지 대략 5초.
그 시간이 지나기까지 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행동이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는 법.
내 행동의 의미를 모르진 않을 거라 본다.
-으득
어쩔까 싶어 잠시 주저하던 그녀가 이내 이를 갈았다.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그녀는 눈빛은 살기를 넘어 이제는 독기까지 머금고 있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시 들어오기만을 잠자코 기다렸다.
-슈욱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으로 검을 집어 올린 그녀가 다시 자리를 박찼다.
-챙
이번엔 거창한 검격 같은 거 없이, 두 검을 앞세워 그대로 밀어붙였다.
교차된 검 날에서 무시 못 할 압력이 느껴졌다.
성인 여성이라곤 하나, 어쨌든 체급 상으론 나보다 우위에 있는 만큼 힘으로 누르는 쪽을 선택한 것으로 보였다.
“……!”
단순하게 힘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 그 너머에서 전해져오는 절실함.
꽤나 흥미로운 감정에 신경을 쓰다 보니, 내 몸은 어느샌가 벽 쪽으로 밀리며 그녀에게 짓눌리고 있었다.
“……없습니다.”
쳐내려고 하는 와중에 그녀가 대뜸 뭔가를 속삭였다.
“뭐라고?”
“개인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순간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감정이고 나발이고 그딴 건 애초에 신경조차 안 쓰는 나이니, 상관은 없다만,
뭔가를 좀 제대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봐 매니저 양.”
나는 침묵을 깨며 덤덤히 입을 열었다.
“……!?”
“그런 말은 자기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는 절대적인 확신이 들었을 때나 해야 하는 거야.”
대답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넌 내게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억눌렀던 힘을 살짝 풀어 그대로 내질렀다.
“……!”
예상치 못한 척력에 스텝이 꼬인 그녀의 균형이 자연스레 무너져버렸다.
-턱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목을 잡아 역으로 짓눌렀다.
“크윽!”
완전한 제압은 아니었다.
목은 잡혔어도 아직 그녀의 손은 멀쩡했기에,
그녀는 놓치지 않은 검을 가까스로 바로잡았고 이내 빠른 반격으로 전환시켰다.
-까앙!
물론 이 역시 내게는 어림도 없는 일격이지만.
치고 오는 일격을 물 흐르듯 좌우로 맞받아치니, 그녀의 검은 크게 회전하며 튕겨 나갔다.
비로소 아무런 공격수단도 갖추지 못한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말았다.
회심의 반격이 무의미하게 막히자, 불꽃처럼 타오르던 그녀의 의지가 촛불 꺼지듯 사그라들었다.
“하…….”
속절없는 탄식과 함께 아예 눈까지 감아버렸다.
패배를 직감한 것이다.
인정이 빠른 건지, 아님 포기가 빠른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말의 주저함 없이 고쳐 잡은 케이람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쿵
그녀의 몸을 바닥에 내리꽂으면서 격음과 함께 먼지가 일었다.
또다시 정적이 흐르기를 5초.
나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아, 하아…….”
아래에선 생사의 기로에서 빠져나온 한 여인의 숨결이 거칠게 올라오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지?”
줄곧 상황을 지켜보던 린제가 나를 보며 물었다.
조소가 뒤섞였던 이전과 다르게, 매우 경직된 목소리였다.
굳이 바꿔본다면 이렇게도 말 할 수 있겠지.
왜 안 죽인 거냐고.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당신이야말로 뭐 하는 짓이지?”
“뭐?”
“비록 환영이긴 해도 충분히 나설만한 상황이었을 텐데, 어째서 나서지 않고 그냥 방관한 거지?”
그녀는 분명히 말했다.
자신의 아이와 비교했을 때, 내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갖추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고.
인정한다.
이 매니저, 꽤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그 폐기물 장의 양아치보다 훨씬 더 뛰어날 정도.
대상을 죽이는 데 있어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는, 암살자로서의 마음가짐도 매우 훌륭했다.
그저 내게 닿기엔 역부족이었을 뿐.
문제는 그 사실을 나도 알고, 눈앞의 그녀도 알며, 아래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이 매니저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반격이 막힌 순간, 그녀는 눈을 감았다.
모든 삶의 의지를 체념한 듯한 얼굴.
그 얼굴은 나뿐만이 아닌 린제 또한 버젓이 지켜보고 있었다.
허나 그녀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의미 불명한 조소를 머금은 채 하염없이 지켜보기만 했을 뿐.
나는 그 이유를 묻는 것이었다.
그녀는 가소롭다는 듯 혀를 찼다.
“하? 설마하니 내가 나서서 저 아이를 구할 거라 생각한 거니?”
“…….”
“암살자라는 아이가 참으로 미련하구나. 다른 것도 아닌 자신을 죽이려 했던 대상에게 자비를 베풀다니.”
왜?
자신의 아이라 하지 않았나?
이리 손쉽게 죽도록 내버려 둔다고?
적어도 이 매니저는 나에게 진심이었다.
자신의 모든 걸 퍼부어 나를 죽이려 했고, 그것이 막히자 깔끔히 인정하고 모든 걸 내려놓았다.
고작 같잖게 방관이나 하고 있던 저 여자를 위해.
내가 그 꼴을 볼 리 없지 않은가?
“무척 오만하구나. 대체 시리카는 무슨 생각으로 너 같은 아이를 보낸 거지?”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것도 잠시,
물결처럼 흔들리던 그녀의 몸이 일순간 안개에 휩싸였다.
마나를 끌어낸 마법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아티팩트의 힘도 아닌,
지고한 존재로부터 부여받는 전능한 힘.
이는 부정할 것 없는 아에르의 기운이었다.
“이제야 본 모습을 드러내는 건가?”
그녀는 이전과 같은 거만 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이미 눈치 챘겠지만, 나 역시 한때 미스트에 몸을 담갔던 암살자란다. 네 당주인 시리카와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와서 칼을 나눴지.”
예상했던 일이기에 딱히 놀라진 않았다.
“넌 아마 모를 거다. 만약 내가 미스트를 떠나지 않고 아직까지 있었다면, 지금 네가 당주라고 부를 사람은 그녀가 아닌 나일 수도 있었다는 걸…….”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눈빛.
허풍이나 떨자고 하는 말이 아닌, 순전히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못 믿는 얼굴이구나? 나와 시리카는 말단 대원이었던 시절부터 서로 누가 우수하다 할 것 없이, 전부 뛰어난 성장을 이루어냈단다. 검술, 마법, 비기의 응용력까지……. 간부급 대원으로 올라가는 것도 순식간이었지.”
서서히 퍼져 오른 안개는 좁은 방안을 점차 잠식해나갔다.
마치 그 속에 있는 나를 옥죄이려는 듯이.
“안개의 신 아에르……. 비록 신계에서 추방된 존재긴 하나 그의 힘은 분명 엄청나다고 할 수 있지. 미천한 인간의 힘으론 절대 닿을 수 없는 경지이자, 실로 많은 것을 이뤄낼 수 있는 힘이야. 더불어 무한한 발전을 추구할 수도 있지.”
그녀가 나를 보며 물었다.
“하나 묻겠다. 미스트의 암살자여. 넌 미스트의 존재 이유가 뭐라 생각하느냐?”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석적인 답변뿐이었다.
“빛을 중심으로 한 기존 세계 질서의 부정,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인간의 추악한 면모를 드러낸다.”
그리 답할 줄 알았다는 듯,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 알고 있구나. 그럼 또 하나를 묻지. 그 목표를 위해서 미스트가 한 것은 뭐였지?”
암살이라고 답하려던 순간 입을 멈칫했다.
예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미스트는 꾸준히 활동을 이어온 것이 아니다.
머저리 신의 변덕으로 자취를 감춘 것이 50년.
그 긴 시간 동안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기약 없는 기다림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많은 것을 이루고,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갖췄음에도, 미스트는 움직이지 않았어! 언제 세상에 태어날지 모를 계승자를 기다리기 위해!”
공교롭게도 그게 나였다.
“참으로 한심하지 않느냐? 신의 힘을 가지고서 무엇이 두려운 거지? 어째서 세상으로부터 숨어야 하는 것이냐? 왜 이 힘을 무의미하게 썩혀야 하는지 난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누가 들으면 스스로 이룩한 힘인 줄 알겠군.
“그래서 그 조직을 나왔다! 난 내 힘이 썩히는 꼴을 볼 수 없었으니! 하지만 그냥 나온 건 아니었다! 그곳에서 썩고 있는 나 혼자만이 아니었으니…….”
조금은 들어줄까 싶어 잠자코 있어 봤는데, 더 이상은 못 참을 것 같다.
실체도 드러냈겠다, 이제 그만 당주로부터 지시 받은 진짜 정화 작업을 진행해보려던 순간,
“……!”
줄곧 응집되었던 안개의 힘이 마침내 사방으로 퍼지며 공간을 변형시켰다.
잠깐 여기서 이걸 펼쳐낸다고?
낡은 나무 바닥이 먼지 날아가듯 사라지고, 그 위로 무지 안개가 드리워졌다.
내 감각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이건 필시…….
“아공간?!”
신의 힘으로 생성해내는 비현실의 공간.
어떤 외부적인 접근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인 구역.
이는 결코 환상 따위가 아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