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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작가의 막내도련님은 암살자-87화 (87/325)

제87화. 램버스타 케이지 (6)

신의 힘으로 만들어진 비현실의 아공간.

미스트의 당주 시리카는 아무도 없는 넓은 광장에 홀로 앉아 정신 수련을 이어가고 있었다.

초연하게 감긴 눈에선 그 무엇도 의식하지 않는 절제된 감정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한줌의 검은 안개가 서서히 다가왔다.

(시안에게 재밌는 일을 시켰더구나?)

그녀의 감겨있던 두 눈이 한순간에 떠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지령서에 적혀 있던 자 말이다. 그자는 네가 정했던 정화 작업의 대상이 아니지 않느냐?)

시리카는 차마 바로 답하지 못했다.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딱히 나무랄 생각은 없다. 그저 네 사적인 일에 그 아이를 보낸 것이 의외라서 물어본 것뿐이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연하게 답했다.

“시안은 처음 저와 만난 순간부터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아이였습니다. 그런 아이가 이 세상에 왜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요. 아마 아에르님께선 그 이유를 알고 계실 테죠.”

(…….)

아에르는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도, 앞으로도 거기에 대해 딱히 추궁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시안은 깨달을 필요가 있죠.”

(무엇을 말이냐?)

“본인이 가진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말입니다. 이번 임무에 제 사적인 감정이 담겨 있는 건 사실입니다. 허나 그 임무를 통해 시안은 깨달아야 할 겁니다. 그래야지 훗날 자신의 힘을 후회 없이 쓸 수 있을 테니까요.”

그녀의 입가로 새싹이 피어오르듯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 * *

전에 한 번 언급했듯, 지금 내 얼굴은 미스트의 비기를 이용해 타인이 인지하지 못하도록 술수를 부려 놨다.

그런 와중에 나로선 처음 보는 놈이, 내 얼굴을 보고 날 알아차렸다?

이건 절대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일단은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날 아나?”

“그럼 알지! 사실은 얼굴이 좀 긴가민가했는데, 네 주먹질 보고서 바로 알겠더라! 아까 보여줬던 그 날랜 움직임이랑 똑같던걸?”

뉘앙스를 보니 낮에 있던 내 경기를 봤던 놈인 것 같다.

근데 움직임만 보고서 나를 알아봤다고?

머리는 조금 비었을지 모르지만 일단 감각 하나는 알아줘야 할 듯싶었다.

“구, 군터님?”

대뜸 널브러져 있던 잡배들이 그를 보고선 소스라치게 놀랐다.

물론 군터라는 이름 역시 내겐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소개할게. 내 이름은 군터 릭투스. 서쪽 폐기물 장을 관리하고 있는 이 도시의 지배인 중 한 명이야.”

도시의 지배인?

감투는 있는 놈이라 이건가?

녀석은 둘째 치고, 일단 쓰러져 있는 놈들의 얼굴이 아주 가관이었다.

내게서 팔다리가 부러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가 아닌 군터라는 남자에 대한 엄청난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난 말이지. 그러니까, 일단은 네 팬이라고 해둘게. 너의 그 화려한 기술에 감동을 먹었거든! 마치 옛날의 나를 보는 것처럼!”

“제정신이 아니군.”

실로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오해하진 마! 순전히 좋게 봐서 한 말이니까! 그래서 경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케이지의 대빵한테 달려갔지. 너랑 붙게 해달라고!”

순간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대빵?”

나로선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들어버렸다.

“아, 넌 모르겠구나? 워낙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이상한 여편네니까. 딱히 신경 쓰지 마. 넌 몰라도 되는…….”

나는 아무런 대꾸 없이 녀석을 향해 차분히 걸어 나갔다.

일이 의외로 쉽게 풀릴 듯하다.

“워우? 분위기가 이상해졌네? 내 말에 뭔가 꽂힌 모양이다?”

정확히 2보 거리.

주먹을 뻗거나, 발을 휘두르면 1초도 안 돼서 닿을 거리.

그 거리 안에서 나는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램버스타 케이지의 주인…… 넌 알고 있어?”

녀석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알지! 난 이 도시에서 그년의 얼굴을 아는 몇 안 되는 존재 중 하나인걸? 그 린제 니할로프를 말이야……”

-휘익

찾고 있던 이름을 언급한 순간, 내 몸은 지체 없이 움직였다.

-퍽!

반원을 그리며 휘둘러진 오른발이 그의 머리 쪽으로 향했다.

둔탁한 타격음이 일어났지만, 밀려나진 않았다.

녀석이 팔을 들어 올려 막은 것이다.

“하! 너 지금 뭐 하자는 거냐?”

탐색은 끝났고 내가 할 일은 정해졌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놈의 입을 열게 만든다.

그 린제 니할로프에 관한 것을.

내 투기에 반응하듯 녀석도 반대쪽 주먹을 움켜쥔 뒤 힘껏 내리쳤다.

-쾅!

몸을 회전시키며 무리 없이 피해냈다.

지면이 갈라질 정도의 엄청난 괴력.

이에 잠시 동안 땅이 울리게 되었다.

“생긴 것과 다르게 되게 화끈하네? 너도 나랑 싸우고 싶었던 거냐?”

굳이 대꾸하진 않았다.

“그래, 굳이 경기 날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지! 네가 원하고, 내가 원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붙어도 문제없는 거라고! 캬하하!”

일단 나불대는 저 입부터 다물게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자세를 바로잡은 뒤, 주먹에 힘을 끌어올려 다시 한번 달려든 그 순간.

“멈춰, 군터!”

어디선가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자동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쐐액

짧은 단검에서 새어 나온 검기가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흩날리는 갈색 머리와 말끔히 차려입은 제복.

케이지의 의문투성이 종업원이었다.

그 뒤론 우락부락한 가드들이 잔뜩 대기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손님?”

“음?”

예상치 못한 물음에 살짝 당황했다.

“군터 너 이게 무슨 짓이야! 감히 밖에서 우리 손님을 건드려? 그 아니꼬운 얼굴 똥통에 박혀서 썩고 싶니?”

꽤 수위 높은 발언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역시 이 종업원도 정상은 아닌 것 같군.

“뭔 개 잡소리야? 저놈이 먼저 날 공격했거든?”

“네 말은 듣지 않아! 뭐해? 어서 손님을 보호하지 않고!”

그녀의 말 한 마디에 가드들이 잽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나를 보호하는 둥근 방어진이 형성되었다.

뭐지? 이 과잉보호는?

“누가 VIP 손님 아니랄까 봐 아주 왕처럼 떠받드네. 거 경계들 좀 푸시지? 누굴 앞뒤 안 가리는 양아치로 아나?”

나는 모르겠지만, 저 종업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충분히 그리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말해 군터! 이런 야심한 시간에 우리 손님을 습격한 이유가 뭐야?”

“진짜 미치겠네. 내가 아니라 쟤가 먼저 날 공격했다니까? 그리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여기 엄연한 내 구역이거든? 내 구역에서 내가 쌈질하겠다는 데 니들이 무슨 상관이야?”

구역이라.

그러고 보니, 저 군터란 남자는 자신을 소개할 때 이 도시의 지배인 중 한 명이란 말을 했었다.

지들끼리 땅따먹기 놀이라도 하는 걸까?

그러고 보면 이 종업원은 날 어떻게 찾아온 거지?

본의 아니게 나는 배제된 채, 둘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게 되었다.

서로는 포식자가 또 다른 포식자를 만난 것처럼 사나운 눈빛을 유지하였다.

“됐다 됐어! 너랑 싸워서 뭐 볼 게 있다고?”

먼저 물러선 건 의외로 양아치 쪽이었다.

“나 진짜로 깽판 치는 꼴 보기 싫으면 저 친구랑 경기나 잘 주선시켜. 무슨 말인지 알지?”

그는 품에서 꺼낸 담배 한 대를 물고선 대뜸 내 쪽을 보며 말했다.

“그럼 붙을 날을 기대하고 있겠다 시온!”

쩌렁쩌렁한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군터는 곧바로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덥썩

“괜찮으신가요 손님?”

순간 뭐라 답해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았다.

“여긴 왜 온 거지?”

“그, 그게 저 양아치 아니, 군터 놈을 쫓으러 왔다가 우연히 손님을 발견해서……. 아무튼 참 다행이네요! 녀석의 위협으로부터 손님을 지킬 수 있어서.”

“내가 먼저 공격한 건데?”

“네?”

순간 주위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아! 그, 그거네요! 군터 녀석이 먼저 손님에게 시비를 걸었다거나…….”

“전혀 아니야. 그냥 내가 먼저 공격한 거야.”

철옹성 같은 대답에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뭐, 뭐에요? 그럼 대체 손님이 왜?!”

“뭐…… 저 꼬마 친구 때문이랄까?”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남자아이를 가리켰다.

아이는 흠칫 놀라며 빈 바구니 속에 숨으려는 듯 꽤 귀여운 모습을 보였다.

사실 진짜 이유가 있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크흠…….”

뭔가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렸다 생각했는지, 그녀는 머리를 심히 움켜쥐었다.

“그러고 보니, 그 군터라는 남자한테서 이상한 걸 들었는데?”

“무, 무엇을 말인가요?”

“나랑 싸우고 싶어서, 이 시설의 대빵을 찾아갔다고.”

“아…… 기어이 말한 모양이네요.”

해탈이라도 한 듯 고개를 푹 숙인 그녀였다.

“부정은 안 할게요. 사실입니다. 조금 전 저희 쪽에 녀석이 다짜고짜 찾아와서 손님과 경기를 잡아달라고 요청했어요.”

“뭐 때문에?”

“그야 손님이랑 싸우고 싶어서겠죠. 그놈도 원래 여기 케이지 출신이었어요. 꽤 잘나가는 선수이긴 했지만, 몇 년 전 경기 도중 사람을 죽인 일로 영구 퇴출되었거든요. 근데 지금 와서 손님이랑 경기를 잡아 달라 하니, 저도 골치 아픈 참이었어요.”

설마하니 그 녀석도 여기 출신이었던 건가?

근데 좀 전도 그렇고 어째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 종업원과도 뭔가 관계가 있는 것만 같았다.

뭐 나로선 상관없는 일이니, 딱히 추궁할 일은 없다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게 하나 있었다.

“그럼 너희는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멋대로 경기를 잡았다는 거로군. 난 니들한테 소속되어 있는 입장이 아닐 텐데?”

올 게 왔다는 듯,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아, 아직 확정된 건 아닙니다만, 일단 군터뿐만 아니라 저희 지배인님께서도 그 경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손님께도 그 의사를 여쭤보려던 참이었어요.”

“지배인이라고?”

나로선 그 단어에 반응 안 할 수가 없었다.

“왜, 왜 그러시죠?”

“네가 말하는 지배인이라면, 램버스타 케이지의 주인을 말하는 건가?”

“네, 맞아요. 저희의 오너이신 린제 니할로프님입니다만…….”

케이지의 주인인 린제 니할로프라는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 크게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이 여자.

좀 전의 말도 그렇고, 그녀는 마치 자신의 오너로부터 직접 지시를 하달받은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단 속마음을 감추며 덤덤하게 말했다.

“네?”

그녀는 잘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경기 잡으라고. 내일 당장이라도 상관없어.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어…… 진심이세요?”

예상치 못한 빠른 승낙에 그녀는 당황하고 있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마, 말씀하세요! 웬만한 건 다 들어드릴 테니까!”

네 시선은 이 상황에 어찌할 줄 몰라 방황하고 있는 담배 팔이 꼬마에게 향했다.

“쟤, 너희 시설에서 일 좀 하게 해줘.”

* * *

혜성 같은 신인이 케이지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진지 불과 일주일.

케이지엔 역대 단기간 최대인원으로 불릴 만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긴가민가했는데 정말이잖아? 폐기물 장의 군터가 돌아오다니.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대?”

“듣자 하니 군터가 직접 경기를 주선해 달라 했다던데? 그 당돌한 꼬맹이랑 어지간히 싸우고 싶었던 모양이야.”

“킥킥! 진짜 케이지도 오래 두고 볼 일이군. 설마하니 저런 시답잖은 꼬맹이가 케이지에 군림하는 날도 보고.”

일주일.

시온 이름의 소년이 나타나 케이지를 제패하기 걸린 시간이다.

순수하게 경기 시간만 따지면 5분도 채 되지 않았고, 두 합 이상을 넘어간 적이 없었다.

분명 입을 떡 벌리게 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긴 하나, 사실 경기 자체로 봤을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사람들은 자극적인 맛을 추구하니 말이다.

그런 관객들의 맛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자가 간만에 케이지에 나타난 것이다.

“램버스타 케이지를 사랑해주시는 관객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토록 고대하던 오늘의 경기가 지금 시작됩니다!”

사회자로 보이는 선글라스를 낀 남성이 중앙에 나타나 시작의 알림을 외쳤다.

이에 반응한 주위가 한순간 들썩였다.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양쪽에서 선수가 등장하였다.

군터와 시온.

다소 싱글벙글한 군터와 달리, 시온은 한결같은 무덤덤함을 유지했다.

“자 오늘 같은 화끈한 경기를 그냥 즐기는 건 또 예의가 아니겠죠. 지금 이 시간부로 본 경기엔 특별한 룰이 추가됩니다!”

이에 관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특별한 룰? 설마 저 소년한테 핸디캡이라도 주려는 건 아니겠지?”

“그럴지도 모르지. 암만 좀 친다는 꼬맹이라도 상대는 군터잖아? 아마 서로 죽이지 말라는 조항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낄낄!”

“이상한 제한만 안 걸었음 좋겠는데…….”

사실 관중들은 대부분 군터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시온의 활약도 대단했지만, 관중들의 뇌리엔 그동안 군터가 보여주었던 악랄한 모습들이 더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관중들의 심리를 예상이라도 한 듯, 사회자는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노룰 매치! 오늘 경기는 노룰 매치로 진행됩니다!”

관중석에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말 그대로 규칙이 없는 경기! 주먹뿐만 아니라 무기, 마법, 하다못해 꼼수도 상관없습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상대를 제압하면 되는 겁니다!”

정적이 환호로 뒤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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