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꼬리 자르기 (3)
10초.
내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입을 열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넋 놓았다기 보단, 그냥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 고민하는 게 무의미하다 싶어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뭐니?”
짧고도 간결한 물음에 그녀는 초점 없는 어두운 눈빛으로 답했다.
“마치 황궁에 갇혀 심문이나 받고 있어야 할 사람을 마주친 것 같은 얼굴이시네요.”
잘 아네.
설마 고문까지 받진 않았겠다만, 그래도 멀쩡한 정신은 아닐 줄 알았는데,
그녀는 연회 전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루나브 레인리버.
못해도 황궁 지하 조사실에 있어야 할 그녀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새 음식을 사이에 두고 나를 대면하고 있었다.
“앉으세요. 식사하셔야죠.”
하필이면 또 정면에 마주 앉은 자리였다.
마냥 서 있을 순 없기에 일단 앉아보았다.
“제가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하신 모양이네요?”
“알면 좀 말해주지 그래? 설마하니 탈옥이라도 한 거냐?”
“네.”
“쿠흡!”
급기야 사레들린 에밀리와 브라이언이 기침을 남발했다.
“농담이에요.”
난 당연히 믿지 않았다.
애초에 정말로 탈옥했다면, 이 주변이 이렇게 고요할 리 없지.
“걱정하지 마세요, 받아야 할 조사 전부 받고 공식적으로 풀려난 거니까. 저희 가람 학회가 이번 사태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최종 판명 났어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이번 사태 수습에 대한 전권은 현재 1황자 세력이 도맡고 있다.
자신들의 비리를 덮어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그들을 이렇게 쉽게 풀어주다니.
그런 미련한 짓을 할 놈들이 아니었다.
“별로 안 기쁘신가 봐요?”
살짝 토라지기라도 한 듯, 그녀의 볼살이 조금 부풀어 올랐다.
“기쁘고 자시고를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정말로 무사히 끝난 거 맞아? 어쨌건 너희 측에서 데이즈 스톤이 나온 건 사실이잖아?”
“저희 측 인원이 가져온 건 맞지만, 학회랑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단 한 명이 모든 걸 주도했고, 거기에 대해 알고 있던 사람은 전무했으니까.”
“그걸 제국이 인정해준 거야?”
“일단 그 용의자에 대해 중점적으로 조사하기로 했죠. 그자를 먼저 조사하고 다음에 저희를 하는 것도 늦지 않으니까. 하지만…….”
루나브는 변함없는 얼굴로 뒷말을 이었다.
“죽었대요. 혀를 깨물고 자살한 것 같아요…….”
듣는 순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마저도 꼬리 자르기를 당한 건가?
그렇담 가람 학회로선 더욱더 억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상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는 유력한 용의자가 아무런 말도 없이 죽어버렸으니.
“근데 어떻게 혐의가 풀린 거야? 그런 상황이라면 오히려 너희에게 더 집중적인 조사가 들어가는 게 맞을 텐데?”
“저는 잘 모르겠지만, 듣기론 저희를 무혐의로 풀어주라는 황실의 지시가 있었다고 해요. 제국이든, 왕국이든 이번 일에 대해 서로 공론화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하면서요.”
황실에서 무혐의로 풀어주라 했다고?
1황자가 전권을 가진 상황에 그런 지시를 내릴 리는 없을 터.
만약 내릴 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당연히 1황자 보다 위에 있는 사람일 것이며, 그런 사람은 이 제국을 통틀어 한 사람밖에 없었다.
황제.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 사건을 종식시킨 건 디오네 황제였다.
“그래서 풀려났어요. 풀려나자마자 선배를 보러왔고요.”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그냥, 왠지 선배라면 또 시녀랑 기사를 데리고 밥을 먹고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황성에서 열린 식당을 무작정 찾아봤어요. 다행히 금방 찾았고요.”
어지간히 속 편한 꼬맹이군.
본국으로 쏜살같이 도망쳐도 모자랄 판에, 굳이 내 얼굴을 보러 왔다니.
나로선 참 이해하지 못할 정신세계였다.
“더 있다간 학회 사람들이 찾을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나야겠네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선배.”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짧은 손짓과 함께,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갔다.
보기와 다르게 딱히 질척거리는 성격은 아닌 듯 보였다.
“도련님~?”
굳건히 앉아있는 나를 에밀리가 빤히 쳐다보았다.
어색한 미소와 불안정한 시선 처리.
한눈에 봐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배웅 나가라는 거다.
어지간히 귀찮게 하는군.
그러면서도 자연스레 몸을 움직이는 나였다.
“……?”
밖으로 나온 순간, 그녀의 반쯤 감긴 눈이 0.5cm 정도 떠졌다.
나름 놀랐다 이건가?
“오해하지 마. 단순한 배웅이니까.”
그렇게 300걸음 정도를 같이 걸어주었다.
“이 정도면 됐어요. 배웅해줘서 고마워요 선배.”
배웅해줬다는 사실이 못내 기쁜 듯, 목소리에서 활기가 느껴졌다.
“그래 조심히 잘……!”
인사와 함께 보내려 주려는 것도 잠시,
그녀가 대뜸 내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상처는…… 괜찮으신 모양이네요.”
그러면서 어깨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나는 짐짝 치우듯 루나브의 몸을 가볍게 떼놨다.
“상처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이런 식으로 확인할 필요 없어.”
“그때는 잘도 끌어안았으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며 이유 모를 불만을 표출하는 그녀였다.
“진짜로 갈게요. 아카데미에서 봐요, 선배.”
짧은 마지막 인사에 나는 말 없이 손만 흔들어주었고, 머지않아 루나브는 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휘~]
그녀가 떠남과 동시에 케이람의 심술궂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백마 탄 왕자님이 따로 없네? 이정도면 나한테 두 번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이가 없어 웃음밖에 안 나왔다.
누가 들으면 자기가 다 의도한 줄 알겠군.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쨌든 네가 그토록 싫어하는 놈의 계획을 망친 셈이네? 결국 그놈들은 아무런 이득도 못 본 거잖아?]
“그런 셈이지. 아마 지금쯤 얼굴을 된통 찌푸리고 있을 거야.”
그 얼굴을 직접 못 본다는 게 내심 아쉽지만.
[근데 딴 건 몰라도 그 황자란 놈은 무슨 힘이 있어서 마리오네트를 쓴 거야? 그건 암만 뛰어난 인간이라도 쉽게 부릴 수 있는 마법이 아닌데?]
“황자가 한 게 아니야. 더군다나 에쉘이 한 것도 아니지.”
[그럼 누군데?]
“있어. 뒤에서 더러운 짓을 일삼던 나와 다르게, 앞에서 모든 것을 군림했었던 악마의 최대 심복이…….”
잠시 잊고 있었다.
시기상 아마 이쯤이었겠지.
마리오네트, 소환술, 네크로맨서, 흑마술 등.
인간의 손으로 다다를 수 있는 모든 마법의 경지를 통달한 최강의 흑마술사.
“보리스 르헬름…….”
지금 에쉘의 곁엔 그가 있을 것이다.
* * *
황궁에서 오직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공간, 황제의 집무실.
고뇌에 가득 찬 황제의 눈엔 실로 많은 감정이 엿보이고 있었다.
책상엔 수십 장의 문서들이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지만, 그걸 정리할 의사는 없어 보였다.
-뚜벅뚜벅
그런 집무실로 서서히 다가오는 한 사람.
걸음이 매우 빠른 것으로 보아, 무언가 급박한 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걸음의 당사자가 들어왔음에도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아바마마께서 가람 학회의 인사들을 풀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제국을 욕보이고, 감히 아바마마가 계신 황성에서 불경한 난동을 일으킨 유력 용의자들이란 말입니다!”
황제는 여전히 대꾸조차 없었다.
“설사 가람 학회 자체는 관련이 없었다 해도 이는 차후 가람 왕국에 제기할 중요한 정치적 구실로써…….”
“루이넬.”
떠오른 공기마저 가라앉힐 만큼 무거운 어조에 루이넬 황자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호명은 했지만 황제는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이에 루이넬은 황제의 입이 다시 열리기까지 잠자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냐고 묻지 않겠다. 하물며 어떻게 했냐고도 묻지 않겠다.”
“무, 무슨 말씀을?”
루이넬의 뺨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마지막 경고다. 더 이상 황실을, 아니 제국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마라.”
“……!”
루이넬은 표정관리를 위해 눈이 움찔거리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소자. 송구스럽게도 아바마마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잡아뗄 생각은 말거라. 황궁의 모든 이들을 속일 수 있을지언정, 나는 못 속인다.”
“근거 없는 심증으로 저를 매도하시려는 겁니까?”
“때로는 그 심증이 너무 확실해서 묻을 수밖에 없는 거다.”
황제는 어두운 낯빛을 유지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루이넬. 너는 참 많은 능력을 갖추고 있다. 남을 이끌 수 있는 지도력은 물론이고, 강인한 결단력도 가지고 있지. 장차 내 뒤를 이을 황제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허나 네겐 단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다.”
“그, 그게 무엇이옵니까?”
“포용력이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던 황자의 미간이 기어코 심하게 찌푸려지고 말았다.
“넌 능력 있는 자들에 대해선 한없이 우대하지만, 반대로 무가치 하다고 판단한 이들에 대해선 모두 내쳐버리는 습성이 있지. 안 그렇다고 생각하느냐?”
루이넬은 대답할 수 없었다.
“인재들을 등용하는 건 좋다. 허나 그 외의 이들을 하찮게 보고 포용하지 않는 군주는 결국 모두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파멸할 뿐이다.”
황제이자 아버지로서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조언이었다.
“네펠리스 가에서 아무리 훼방을 논다 해도 상관없다. 내 자리는 무조건 너에게 간다. 그러니 너 역시 그들을 배척하지말고 포용하거라. 그게 군주의 덕목이다.”
황제가 직접 자신의 후계를 약속한 상황.
허나 고개를 숙인 루이넬의 얼굴에선 기쁨의 감정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부디 지금의 내 마음이 앞으로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두 주먹이 하염없이 떨리던 것도 잠시, 고개를 든 루이넬은 무척이나 평온한 얼굴로 황제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아바마마의 말씀, 굳게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집무실을 나와 그의 방이 있는 동쪽 별관으로 향하기까지, 루이넬은 샘솟는 감정을 꿋꿋하게 억눌렀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방에 도달해 방문을 닫은 그 순간,
-쾅!
참아왔던 인내심이 마침내 폭발하면서 탁상을 주먹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후우, 후우…….”
루이넬은 별다른 말 없이 거친 호흡만을 반복했으며, 눈가엔 섬뜩한 살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 * *
의자에 앉아 명상을 취하고 있던 에쉘의 눈이 조심스레 뜨였다.
그의 곁엔 종자 켈린이 아닌, 또 다른 남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황자께선 어찌하고 계십니까?”
“황제 폐하와의 대화 도중 무척이나 진노하신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당분간을 자신을 찾지 말라며, 방에서 안 나오고 계십니다.”
에쉘은 멍한 눈으로 천장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마리오네트와 소환수들은 의문의 존재로부터 괴멸, 데이즈 스톤을 이용한 제 동생과 5황녀를 죽이려던 계획은 실패, 가람 학회에게 모든 걸 떠넘기려했던 계획도 황제 폐하의 명령으로 모두 물 건너갔으니, 그야말로 아무것도 이룩한 게 없군요…….”
사실상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게 이상할 정도.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실패의 굴욕감에 에쉘은 너무나도 치욕스러울 따름이었다.
“계획은 분명 실패했지만, 재밌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재밌는 사실이요?”
“이걸 봐주시겠습니까?”
남성은 품에서 작은 오브를 꺼내 그에게 내보였다.
“마리오네트의 사체를 분석하던 와중 낯선 기운이 느껴져, 급히 기운을 담아본 것입니다.”
그가 손가락으로 오브를 두어 번 문지르니, 투명 유리구슬 같았던 오브는 이내 흑색으로 물들여지더니, 곧 그 속에서 미지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에쉘은 눈을 의심했다.
“대체 무슨 기운입니까? 마법도 아니고, 하다못해 마수의 기운도 아니지 않습니까?”
마치 영적인 존재의 기이한 힘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나마 확신할 수 있는 건 절대 인간이 낼 수 있는 기운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건 마검의 기운입니다.”
에쉘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고한 신들의 힘을 물려받은 영적인 무구. 제가 소환했던 마리오네트와 헬하운드는 전부 이 기운에 의해 힘을 소실했습니다.”
“확신할 수 있습니까?”
“확신할 수 있습니다."
결코 어쭙잖은 허풍 따위가 아니라는 건 오브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마검 정도는 되지 않고서야 차마 풍길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하고, 어두웠기에.
에쉘은 곧바로 수긍할 수 있었다.
“즉 마검의 소유자가 당시 황궁에 있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군요.”
“혹 짐작이 가는 자라도 있으신지요?”
팔짱을 낀 에쉘은 또 한 번 상념에 잠겼다.
다른 것도 아닌 신의 무구를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자신들의 계획을 망쳤다.
황궁에 일원일 수도 있지만, 연회 참석인 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담 귀족일 수도 있다는 말인데, 대체 누가 이 신성한 황궁에 그런 흉물을 들여온단 말인가?
“혹, 마검을 제어할 수 있는 조건 중에, 속성 수치와도 관련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마검의 특성에 미루어 볼 때, 어둠 속성과 관련이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에 에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보리스.”
“예, 에쉘님.”
“아카데미에 가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