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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작가의 막내도련님은 암살자-75화 (75/325)

제75화. 꼬리 자르기 (2)

참혹했던 피의 연회가 끝나고, 스산함만 남게 된 황궁.

처절했던 밤이 지나고, 새벽을 거치면서 아침 해가 떠올랐다.

몸은 매우 피곤했지만 차마 잠에는 들 수 없었기에,

엘리스는 하염없이 창문 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똑똑

“들어와.”

그녀의 종자 세실리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

“루나브를 비롯한 가람 학회의 인사들은 모두 황궁의 기사들이 데려갔습니다. 아마 며칠을 두고 강도 높은 조사가 들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기에 크게 놀라진 않았다.

루나브 레인리버가 데이즈 스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 만큼, 그들은 이번 사태의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될 수밖에 없었다.

엘리스는 복잡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세실리아의 물음에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

“세실리아.”

“네.”

“내가 아홉 살 때, 에쉘 오빠한테 처음으로 선물 받았던 일. 기억나?”

“물론입니다. 마법에 관심이 많았던 아가씨에게 도련님께서 마법 스크롤을 선물해 주셨죠. 무척이나 좋아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마법 스크롤.

일종의 일회용 마법 아티팩트다.

특정 주문이나, 복잡한 공식 없이 오직 마나만 있으면 사용할 수 있기에, 수습 마법사들 혹은, 이제 막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신입생들의 교육 물품으로 사용되곤 했다.

“아무리 천재 소리를 많이 듣던 나지만, 그 스크롤은 당시의 나도 발동시키기 힘든 등급이었어. 하지만 에쉘 오빠는 이걸 주면서 말했지.”

엘리스는 그 말을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었다.

“네가 이 스크롤을 쓸 수 있을 때까지 성장한다면, 그때는 아주 엄청난 일이 벌어질 거다. 아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너에게 시선을 보낼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 꼭 봤으면 좋겠다고…….”

언뜻 들으면 가슴을 먹먹하게 해주는 따뜻한 조언이었다.

허나 에쉘이 정말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라면, 지금 그녀가 저렇게 굳은 표정을 지을 순 없었다.

“근데 그거 알아? 나 아직 그 스크롤 갖고 있다?”

엘리스는 탁상 위에 있는 소형 디멘션 박스에서 낡은 스크롤 한 장을 꺼냈다.

세실리아에게 직접 보여주려는 듯, 돌돌 말린 스크롤을 풀어 안을 보여주었다.

“이거 아직 쓸 수 있어. 찢어지거나 파손되지 않은 아주 멀쩡한 상태니까. 다만…….”

“……!”

세실리아는 눈을 의심했다.

“에, 엘리스님. 그 스크롤은 설마……?”

그녀의 눈으로 봤을 때, 그건 절대 마법 스크롤이 아니었다.

“응. 마법 스크롤이 아닌, 소환 스크롤이야. 그것도 마수를 소환할 수 있는…….”

푸른 양피지 중앙에 새겨진 붉은 색의 마법진.

그것은 전선 지역에 살법한 하급 마수를 소환할 수 있는 분명한 소환 스크롤이었다.

“어, 언제부터 아신 겁니까?”

“열네 살쯤이었나? 학업에 집중하고 있던 터라 잠시 잊고 있었는데, 돌연 생각나서 다시 꺼내 봤어. 당시 내 등급이 4성 정도였으니까, 아무 문제 없이 쓸 수 있을 줄 알았지.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 철없는 꼬맹이였을 땐 몰랐던 이 스크롤이 알고 보니까 소환 스크롤이었으니…….”

스크롤을 발동시키는데 필요한 건, 조건에 부합하는 마나뿐이다.

어떠한 주문도 필요 없이, 오직 시전자의 마력에만 반응하는 만큼, 설사 스크롤의 정체를 모른다 해도 발동시킬 수 있었다.

“난 그때 소름이 돋았어. 만약 그때의 내가 혹시라도 이 스크롤을 발동시켰다면, 꼼짝없이 마수와 대면했을 테니까.”

그날의 기억이 상기된 듯, 엘리스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러면서 또 이런 생각이 들더라? 오빠는 정말 내가 이 스크롤을 발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만약 정말로 발동을 시켰으면? 그럼 난 어떻게 되는 건데? 에쉘 오빠는 사실 내가 이 스크롤을 발동시키고 난 이후의 일을 바라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엘리스는 무덤덤한 얼굴로 꿋꿋이 말을 이었다.

“에, 에쉘 도련님께선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습니까?”

반면 세실리아의 얼굴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한 번 묻기는 했어. 자기가 준 스크롤 아직 갖고 있냐고. 그래서 난 말했지. 잃어버렸다고…….”

“왜, 그러셨던 거죠?”

“그냥,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거든. 혹시라도 그 스크롤이 어떤 거였는지 오빠도 몰랐을 수도 있잖아? 그러자 에쉘 오빠는 무척이나 아쉬워했어. 그런데…….”

감정이 복받친 듯, 엘리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얼굴은 절대 모르는 얼굴이 아니었어.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고, 내가 그 스크롤을 발동시키지 못해 정말로 아쉬워하는 눈빛이었어. 나한테 정말로 불행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듯이…….”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피를 나눈 형제이자 가족인 그가, 어째서 자신에게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일까?엘리스는 아직까지도 그 저의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오빠가 또 선물을 전한 것 같더라고. 이번엔 내가 아닌 시안에게…….”

“막내 도련님께 말입니까?”

“응. 나비넥타이였던 것 같은데, 시안에게 전해주기로 한 시녀가 그만 잃어버렸나 봐. 그래서 받질 못했대…….”

불과 몇 시간 전의 상황이었던 만큼 또렷이 기억나고 있었다.

아쉬움과 더불어 부정적인 기운이 가득했던 그 눈빛이 과거에 접했던 감정과 너무나도 동일했기에,

엘리스는 그 선물이 시안에게 있어, 절대 좋은 선물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네 동생은, 네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할지 모른다.’

지난날 벨리아스에서 공작이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지만, 엘리스는 시안의 눈빛으로부터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그의 모든 것을 다 알고선 그를 부정하려는 듯한 감정을.

“시안은 뭔가를 알고 있는 걸까?”

엘리스는 생각했다.

공작의 말대로 시안이 정말 대단한 존재로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자신을 넘어, 더 나아가 에쉘까지도 뛰어넘는, 가문의 새로운 계승자로 말이다.

* * *

그 혼란스러웠던 연회의 밤이 지나간 지도 어느새 3일.

연회에 참석했던 귀족들은 전부 일련의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으며, 대부분 도망치듯 황성을 벗어났다.

제국은 아직 이번 사태에 대한 범인을 단정 짓지 못했다.

다만 유력한 용의자를 가람 학회로 지목한 만큼, 계속 황궁에 연금하며 조사를 이어나가는 것으로 보였다.

참고로 나와 누나는 일체의 조사도 받지 않았다.

알리바이가 성립 돼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아마 우리 남매를 조사 대상에서 배제해 달라는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겠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닌, 전적으로 본인을 위해서 말이다.

내 입에서 나올 말들이 그들에게 있어, 결코 좋을 리는 없을 테니까.

“황성에 와서 처음 접하는 외식이 겨우 이런 평범한 술집일 줄이야. 내 인생도 참 기구하지…….”

탁상에 코를 박으며 좌절한 에밀리를 브라이언이 위로했다.

“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시국이 시국인지라, 고급 식당들은 다 문을 닫아버렸으니…….”

황궁에서 괴한들이 출몰했다는 소문이 퍼짐에 따라, 분위기 좀 있다는 식당들은 죄다 영업을 중지해버렸다.

이 술집도 골목골목 뒤져다가 겨우 찾아낸 곳이었다.

“이런 술집은 벨리아스에도 널리고 널렸다고요! 당신 술이나 먹을 줄은 알아?!”

“자, 잘은 아니더라도 조금은…….”

“나나는 먹을 수 있어요! 음식이라면 뭐든 안 가리거든요!”

“주인을 곁에 두고 시녀가 술을 먹어선 어쩌자는 거야? 넌 대체 시녀 교육을 어디서 받은 거니?”

왠지 저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

익숙한 기운이 느껴짐과 동시에 시선이 돌아갔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실 가세요, 도련님?”

묻기도 전에 마실 가냐고 묻는 에밀리였다.

하여튼 눈치 하나는.

“어. 알아서들 먹고 있어.”

나는 곧바로 식당을 나와 기운이 느껴지는 모퉁이 골목으로 향했다.

그곳엔 검은 장 코트에 후드를 둘러쓴 시리카 당주가 벽에 기댄 상태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잡 얘기를 할 것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 시녀는 어찌할 생각이니?”

시녀는 당연히 에밀리를 말한 것이었다.

“일단 돌려보낼 생각은 없습니다. 돌려 보내봐야 좋을 게 없거든요. 입만 뻥긋하지 않는다면, 그쪽에서도 딱히 건들 생각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은 생각이야. 안 그래도 황녀에게 펜던트를 전해줬다는 시녀가 조금 전, 혀를 물고 자살했다더구나. 아마 그쪽에서 미리 손을 썼다고 봐야겠지.”

꼬리 자르기였다.

자신들은 애초부터 관련이 없었다는 점을 증명하려는 거다.

만약 내가 에밀리가 준 나비넥타이를 파괴하지 않고 계속 갖고 있었다면, 그녀도 똑같은 꼴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가람 학회 쪽은 어쩌고 있습니까?”

“우선 데이즈 스톤을 가져온 자에 대해선 학회 쪽에서 먼저 색출한 모양이야. 그들도 일단 꼬리 자르기를 하려는 거겠지. 리겐스 학회장이 손녀까지 보낸 와중에 그런 계획을 단체로 꾸밀 리는 없을 테니까.”

설사 그들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해도, 어쨌든 범인이 가람 학회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터.

이건 일이 어떻게 밝혀지든 간에, 차후 우시프 제국과 가람 왕국 사이의 민감한 마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은 주변이 시끄러워지지 않을까 싶다.

“그건 그렇고. 시안 너, 어떻게 안 거니?”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온 당주가 대뜸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무, 무엇을 말입니까?”

“내가 드레니안이랑 약혼한다는 사실 말이야. 집안에서 비밀로 맺은 약혼인 데다, 알고 있는 대원도 분명 몇 없었을 텐데, 대체 우리 계승자님은 그걸 어디서 아셨을까?”

그녀의 손이 내 뒷목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도망치지 못하도록 자연스레 끌어안았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그, 그때도 말씀드렸듯이, 제자가 스승의 앞날을 몰라서야…….”

-꽈아악

“똑바로 말하렴……!”

어물쩍 넘어갈 생각은 말라는 듯, 손아귀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난감한 마음에 식은땀만 흘리고 있던 그 순간,

-스스스

품속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에 당주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당주 아이는 내 경고를 대체 뭘로 들은 걸까?]

안개 속에서 나타난 케이람은 내 목을 잡고 있는 당주의 손을 살며시 떼놓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돋는 차가운 미소를 지은채로 말이다.

[늙은 떡두꺼비한테 시집 안 보낸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겨야지. 이렇게 죄 없고 선량한 주인을 괴롭혀서야 되겠니?]

당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듯, 역시나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케이람님이야말로 참 짓궂으시군요. 듣자 하니, 이미 계획을 다 알고 있으면서 시안에게 제대로 안 알려주셨다고 하던데……, 뭐 마검의 성정을 제가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너무 사욕을 채우시는 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어머? 임무를 가장해 지 약혼상대를 죽이려했던 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처음부터 그놈이 네 약혼상대라고 대원들에게 말 하지 그랬어? 밝히기가 그리 창피하셨나?]

“글쎄요? 수백 년 동안 남자도 없이 사신 분 보단 낫다고 생각하는데…….”

더 놔뒀다간 또 한 번의 소동이 벌어질 것 같으니, 이쯤에서 갈라놔야 할 듯싶다.

나는 케이람의 움직임을 제어한 뒤, 당주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아카데미에서 뵙죠. 당주님.”

케이람은 당연히 난동을 부렸다.

[이거 안 놔? 저 망할 년, 처음부터 맘에 안 들었어! 누가 뭐 어쩌고 어째?]

어째 수습하느라 고생한 건 나인데, 왜 둘이서 난리를 피우는지 도통 모르겠다.

간신히 분을 삼킨 케이람이 나를 보며 말했다.

[너도 이제 와서 나한테 돌릴 생각 하지 마라? 나 솔직히 재미도 별로 못 봤거든? 겨우 100명 남짓으로 무슨 재미를 보겠냐?]

어련하실까 우리 마검님.

딱히 나무랄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녀가 있었기에 놈들의 계획을 이렇게라도 망칠 수 있었으니.

“뭐라 할 생각 없어. 도리어 고마울 따름이야.”

[…….]

예상 밖의 반응이었는지,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그래! 나라도 있었던 걸 감사히 생각하라고! 나같이 똑 부러진 마검 어디 가서 찾겠냐?]

부정할 생각 없다.

저 말마따나, 그녀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나의 유일한 애검이니.

다만 앞으로 좀 더 제어를 잘해둘 필요는 있어 보이지만…….

당주와의 면담도 끝났으니, 다시 에밀리 일행이 있는 술집으로 향했다.

시간도 좀 지났겠다, 나나의 식성 상 이미 한 테이블은 갈아치우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자리로 돌아간 순간.

“……?”

순간 잘못 봤다 생각해, 눈살을 찌푸렸다.

나와 마찬가지로 당황을 금치 못하고 있는 에밀리와 브라이언.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 식사에 전념하고 있는 나나.

그리고…….

“어서 와요, 시안 선배.”

한없이 자연스러운 얼굴로 나를 맞이하고 있는 또 한 명의 얼굴이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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