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피의 연회 (1)
황궁의 그레이트 체임버(Great Chamber) 3층 서쪽 끝 방.
아린은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며 좀처럼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곱게 쓸어내린 은발의 머리카락.
분가루를 골고루 묻혀 새하얗게 변한 피부.
입가엔 입술 본연의 색을 밝혀줄 수 있도록 백합 꽃잎을 지어 말린 하얀 연지까지.
평소와는 다른, 누가 봐도 미모에 힘을 줬음을 알 수 있었다.
열세 살.
2차 성징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성장의 시기.
신체의 발달과 더불어 여자로선 본격적으로 미(美)에 관심이 생길 변화의 시기였다.
매년 찾아온 연회지만, 오늘만큼 화장에 신경 쓴 적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려는 것처럼.
“어때 레시무스? 나 괜찮아 보여?”
“예뻐요. 황녀님! 제가 여태 봤던 황녀님 중에 제일 아름다우시다니까요? 그만 보셔도 돼요!”
“아니야. 조금만 더 살펴볼게!”
그럴 거면 대체 질문을 왜 한 건지.
벌써 몇 시간 째 같은 상황만 반복되고 있으니, 레시무스를 비롯한 황녀의 시녀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하겠지만, 이곳은 황제를 비롯한 황실 일가가 거주하는 황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시무스는 곁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했다.
아린 황녀가 원했기 때문이다.
둘의 관계는 엄연한 주종관계.
관계상 아린이 원한다면 어디든지 데려갈 수 있었다.
사실 평민이라는 신분 때문에 처음엔 황성 내에서 그녀를 반대하는 이들도 매우 많았다.
허나 예로부터 막내딸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아버지는 없는 법.
둘의 관계를 황제가 직접 인정하고 허락함에 따라, 레시무스는 지금까지 황녀와 함께 황궁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너무 과하면 오히려 독이 되신다니까요? 시안님 성격상 그렇게 화려한 걸 좋아하시진 않을 거예요.”
아린 황녀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무, 무슨 소리야! 시안한테 잘 보이려고 꾸미는 거 아니라니까!”
“변명할 걸 하셔야죠, 황녀님! 초대장까지 직접 보내셔놓곤.”
“아, 아니, 그, 그게 그러니까…… 진짜로 올 줄은 몰랐단 말이야!”
그녀의 얼굴은 이미 첫사랑의 감정을 느낀 소녀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난 그냥 시안이 방학에도 아카데미에 있는 게 안타까워서……. 이런 자리에 온 경험은 있을까 싶은 마음에 그냥…….”
핑계는 좋았지만, 그 말을 믿을 레시무스가 아니었다.
이미 아린이 시안을 좋아한다는 건, 오래전에 눈치챘던 일.
이렇게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황녀가 그저 안쓰러울 뿐이었다.
-똑똑
문으로부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정황상 복도에 있는 수호 기사들이었다.
허나 아린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 거울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에 한 시녀가 직접 문으로 다가가 확인해 보았다.
“아린 황녀님. 루이넬 황자님으로부터 사람이 왔습니다!”
“음?”
고개가 획 돌아간 건 한순간이었다.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놀란 두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루, 루이넬 오라버니께서?”
“네! 황자님의 담당 시녀인 것 같은데, 어찌할까요?”
한 번도 있었던 적이 없는 낯선 상황이었다.
평소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1황자가 난데없이 사람을 보내다니.
당황한 아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드, 들여보내 줘……!”
황자의 시녀를 함부로 돌려보낼 수도 없는 만큼, 일단은 들여 보기로 했다.
방에 들어선 시녀는 아린의 모습을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상에 아린 황녀님! 너무 아름다우세요! 꼭 여신의 어린 모습을 보는 것 같아요!”
눈치 좀 있는 사람은 저게 입바른 소리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건 아린도 마찬가지였다.
“그, 그래. 좋게 봐줘서 고마워……. 근데 무슨 일이야!”
“이걸 전해드리러 왔어요!”
시녀는 황녀가 앉은 탁상 위로 작은 보석함을 내밀었다.
“루이넬 황자님께서 저보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아린 황녀님께 잘 어울리실 것 같다면서요!”
“오라버니께서 선물을 보내셨다고?”
“네! 일단 한번 열어 보세요!”
아린은 금색의 보석함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함 안의 선물을 본 이들은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 우와……!”
작은 보석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화려한 펜던트였다.
중앙엔 루비인지, 가넷인지 모를 붉은 색의 보석이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너, 너무 예뻐……. 정말 내가 받아도 되는 거야?”
“그럼요! 이거 보석이 주인을 찾은 것 같은데요? 한 번 착용해보세요!”
아린은 그녀의 말대로 펜던트를 차보았다.
“어, 어떤 것 같아?”
방 안에 있던 모두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말 잘 어울려요. 황녀님! 분명 시안님도 좋게 봐주실 거예요!”
“그, 그러겠지! 이거라면 시안도…… 아니 잠깐만! 시안 보여주려고 하는 거 아니라니까!”
아린의 얼굴이 또 한 번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착용한 펜던트의 보석 역시 빛을 받으며 붉게 반짝이고 있었다.
* * *
황궁 내에서 가장 넓은 장소인 그랜드 홀(Grand Hall).
수십 개에 달하는 샹들리에 아래로 연회를 즐기기 위한 수많은 귀족들이 몰려들었다.
일단은 홀 안에 있는 인원들만 파악해보기로 했다.
총 참석인은 약 60명 정도.
이들을 지키는 수호 기사는 그보다 두 배인 120명 정도.
시녀 및, 기타 시종들까지 합하면 약 300명 정도의 인원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중 잠입한 미스트 대원들은 나를 포함해 10명 정도.
나머지는 황궁 주위에서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예상은 했다지만, 정말 적응 안 되는 곳이군.
대륙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모인 만큼 저마다 겉치레들이 극에 달해 있었다.
어쩜 저렇게 하하 호호 미소의 가면을 쓰며, 자신들을 감춰낼 수 있는지.
미스트의 비기와도 견주는 엄청난 은신술이었다.
[눈이 굉장히 바빠 보이시네? 찾는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
“찾는 다기보단, 봐야 할 사람이 많은 거지.”
[그 인형이 한 말이 꽤나 신경 쓰이나 보지?]
신경이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라 본다.
이제 와 켈린이 내게 의도적으로 거짓을 고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분명 어떤 근거가 있기에, 그런 말을 전한 거겠지.
루나브 레인리버의 암살이라.
이 많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와중에 그녀를 제거하겠다고?
1황자는 벌써부터 가람 왕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려는 건가?
이건 분명 전생에 없었던 일이다.
실제로 시도하려 했다가 무산된 건지, 아니면 흐름의 변화로 이번 생에 새롭게 시도하려 드는 건지 아직은 의문점이 많다.
아무래도 좀 더 확인을 해봐야 할 듯싶은데…….
“연회에서 그렇게 꽁한 표정으로 있으면 안 되지.”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바로 고개를 돌렸다.
진홍빛 붉은 머릿결에 풍성하게 살려진 롱 웨이브.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가슴을 돋보이게 해주는 핏빛 실크 드레스.
어른의 성숙미가 확연히 나타내는 매우 고혹적인 모습이었다.
“드레스 잘 어울리시네요. 시리카 교관님?”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모습을 칭찬했다.
“눈이 굉장히 음흉하구나. 시선 처리 잘하렴. 안 그럼 오해 받는다.”
그녀는 손에든 와인 잔을 능숙하게 돌리며 자연스레 맛을 음미했다.
[하……!]
그 모습이 못마땅한 듯 케이람이 헛웃음을 내었다.
당주는 그런 케이람이 보이기라도 하는지, 보란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리카 니그리티.
로열 아카데미의 학술 교관이자, 미스트의 당주.
허나 그녀에겐 여태 말하지 않은 또 하나의 타이틀이 있다.
제국의 유서 깊은 학자 집안인 니그리티 백작가의 장녀.
작위를 보유한 귀족가이면서도 구성원 대부분이 지식 연구에 몰두한 학자 출신으로 대륙에서 명망 있는 지식 가로 인정받고 있다.
즉 그녀 또한 사실은 귀족이었던 셈.
그러니 지금 나처럼 연회 참석인의 신분으로 이 자리에 와있는 것이다.
사실상 나로선 이 자리에서 가장 편한 사람이었다.
허나 여타 귀족들처럼 미소의 가면을 쓰고 수다를 나눌 시간은 없기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그녀에게 조용히 읊조렸다.
‘시간 없으니 본론만 짧게 말하겠습니다.’
“……?”
‘이번 정화 작업. 시간을 조금만 미뤄주시죠.’
‘이유는?’
다소 갑작스런 정신감응(Telepathy)이지만, 당주는 내색 없이 화답했다.
‘1황자 측에서 루나브 레인리버를 암살하려 하고 있습니다.’
“……!?”
그녀의 동공이 아주 살짝 흔들렸다.
‘확실한 거니?’
‘확률로 따지면 반반입니다. 저 또한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기에, 지금부터 이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때까지 정화 작업은 잠시 미뤄주시지요.’
당주는 일말의 고민 없이 답을 내었다.
‘좋아. 하지만 많이는 못 줘. 지금으로부터 딱 한 시간. 그때까지 답을 내오지 않으면 곤란해. 가능하겠니?’
‘충분합니다.’
‘무리할 필욘 없어 시안. 정 불안하면 정화 작업 자체를 보류해도 되니까.’
‘그럴 순 없죠. 당주님을 위해서라도 드레니안은 오늘 죽여 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니?’
‘드레니안 네펠리스와 약혼식이 얼마 안 남으셨죠?’
당황했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녀의 미간이 눈에 띄게 찌푸려졌다.
“그거…… 어디서 들었니?”
“제자가 스승의 앞날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전 좀 있다 또 뵙겠습니다. 시리카 교관님.”
다소 속도를 높여 그 자리를 빠져나오는 동안, 당주의 불꽃 어린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거 일 끝나면 한 소리 듣겠군.
뭐 그건 나중 일이니,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다.
홀을 빠져나와 복도로 향하니, 대기하고 있던 브라이언이 맞이해주었다.
“나나는?”
“게스트룸에 있습니다. 한 발짝도 나오지 않겠다고 본인 입으로 말했으니, 아마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제발 그 말을 지켜주길 바란다.
“네가 봤을 땐 어떤 것 같냐?”
“딱히 수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일단 제가 대기하고 있던 홀 밖에는 별다른 움직이나 살기 같은 건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하기야 여기 모인 눈이 몇 개인데, ‘나 누굴 죽일 거예요.’라며 살기를 퍼트리고 다니진 않겠지.
“사실 전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황실 내에서 어제 본 그 자제님을 암살하려 한다니…….”
“목소리 낮춰라. 듣는 귀 많다.”
브라이언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아라.
“일단은 지금부터 내가 쭉 돌아볼 거니까. 뭔 일 생기면 바로 수신 보내.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예. 알겠습…….”
-저벅저벅
복도 모퉁이에서 낯선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나와 브라이언은 바로 대화를 중단했다.
묵직하지 않은 가벼운 발걸음.
조신하지 않고 투박한 거로 보아 귀족이 아닌, 바삐 움직이는 시녀의 발걸음으로 보였다.
우리는 걸음의 주인이 지나가기만을 잠자코 기다렸다.
“……!”
차려입은 귀족의 자제와 수호 기사를 본 순간, 시녀는 얼굴을 볼 새도 없이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황궁의 시녀 복이 아닌 걸로 보아, 누군가의 개인 시녀로 보였다.
그렇게 얌전히 지나기만을 기다리던 순간,
그 시녀가 대뜸 뒷걸음질을 치더니, 다시금 우리 앞에서 멈춰 섰다.
나와 그녀는 마치 익숙한 기운에 이끌리듯, 서로의 얼굴을 근 2초가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눈을 번뜩였다.
“도, 도련님?”
가뜩이나 복잡했던 머리가 더 복잡해지는 기분이다.
딴 곳도 아닌 황궁에서 왜 얘가 있는 거지?
당돌한 눈빛이 2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나의 유일한 전속 시녀.
에밀리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