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황성으로 (4)
자랑은 아닌데, 어딜 가든 항상 듣는 얘기가 있었다.
얼굴이 무뚝뚝해 보여, 항상 어두워 보인다.
대체 내 얼굴이 뭐 어떻길래 그런 말들을 하는 건지, 지금까지도 이해는 안 됐다만, 눈앞의 이 소녀를 보고 있자니, 그 말이 뭘 뜻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시원한 하늘빛의 짧은 포니테일 머리.
딱 딸 가진 아빠가 밖에 내놓기 무서울 정도의 귀여운 얼굴.
허나 그런 못된 마음을 먹은 사람들도 저 소녀의 눈을 본 순간, 마음을 접고 무서워서 도망치지 않을까 싶다.
어둡다 못해 음침할 정도의 독한 눈빛.
새삼 여태 내 눈을 봐왔던 다른 사람들의 심정이 이랬을까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아는 얘냐고?
전혀.
전 현생을 통틀어 스쳐 지나가다 본 적도 없는 완전 쌩 초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녀는 지금 내 이름을 불렀다.
그렇다면 날 알고 있다는 얘기겠지.
“저 아세요?”
일단 구석진 곳에 있는 우리 테이블까지 와서 말을 건 만큼, 나도 덤덤하게 물어보았다.
“네. 로열 아카데미 3학년 학생이시잖아요. 아카데미에서 유명한 분을 제가 모를 리 없죠.”
소녀의 말은 덤덤하면서도 똑부러졌다.
솔직히 유명한 거로 따지면 수업 안 나오는 것밖에 없을 텐데?
일단은 내색하지 않고 답했다.
“아, 뭐 유명인사까지야. 그럼 그쪽도 아카데미 학생?”
“네, 2학년이에요. 이름은…… 루나브 라고 불러주세요.”
2학년이면 신입생은 아니라는 건데, 굳이 성을 생략하고 이름만 말한다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딱히 알바는 아니기에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미안. 내가 후배님들 얼굴을 일일이 기억하는 편은 아니라서.”
“괜찮아요. 사실 저도 몸이 병약해서 수업에 그리 자주 나오는 편은 아니거든요.”
굳이 묻지도 않은 사실까지 아주 친절히 말하고 있으니, 조금 당황할 노릇이었다.
“먼저 후배님이라고 해주셨으니까, 저도 선배라고 불러도 되죠? 시안 선배?”
그러면서 대뜸 빈자리에 털썩 앉아버렸다.
이건 뭐 붙임성이 좋은 걸까? 아님 싸가지가 없는 걸까?
호칭에 딱히 신경 쓰는 편은 아닌 만큼, 일단은 그러라고 했다.
자리에 앉은 그녀의 시선이 대뜸 나나와 브라이언에게 향했다.
“……!”
성을 말하지 않아 어느 가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로열 아카데미 소속이라 하니, 그녀도 귀족일 확률이 높을 터.
나나와 브라이언의 어깨가 급 움츠러들었다.
“보아하니, 시녀와 수호 기사 같으신데. 참 사이가 좋으신가 보네요? 한 자리에서 식사도 하시고…….”
“뭐, 그런 편이지. 딱히 나눠서 앉을 필요는 없잖아?”
“맞는 말이에요. 보기와 달리 정도 되게 많으신가 보네요.”
칭찬인지 욕인지 살짝 헷갈리긴 한다만, 눈빛이 조금 초롱초롱해진 걸 보니, 일단 욕은 아닐 듯싶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준비된 음식들을 서빙하기 위해 두 명의 웨이터들이 다가왔다.
접시만 열 그릇이 넘다 보니, 서빙하는데도 한세월.
루나브는 상다리 부러질 듯 가득 채워진 음식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걸, 다 드시는 건가요?”
“그, 그렇지 뭐. 내 시종들이 좀 많이 먹는 편이라…….”
정확힌 나나가 먹을 음식들이지만.
“잘 먹겠습니다 파…… 아니 주인님!”
나나는 늘 그렇듯 차려진 음식들을 복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루나브란 이름의 소녀는 그 모습이 꽤나 신기한 듯, 나나의 식사 모습을 조금은 치켜 올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와 살펴보니 저 소녀가 입은 로브, 왠지 낯이 익다.
마나를 발현시킬 때 뿜어지는 빛과 유사한 푸른색의 로브.
아직 뒤통수를 안 봐서 확실하진 않지만, 저 멋스러운 옷을 입을 이들은 이 대륙에서 한 곳밖에 없었다.
“너 가람 왕국 마법학회 소속이구나?”
루나브는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답했다.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네가 입은 옷보고 알았어. 그 마나 로브, 아무 데서나 입을 수 있는 거 아니잖아.”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살짝 추켜세운 눈썹에서 왠지 모를 감흥이 느껴졌다.
“근데 선배는 제가 듣기론 방학에도 아카데미를 안 떠나시는 거로 기억하는데, 여기 황성엔 어쩐 일이세요?”
순간, 딴 사람도 아닌 타국에서 온 이방인한테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살짝 의문이 들었다.
사실 저 질문은 내가 해야 맞을 것 같은데?
묘하긴 해도, 일단은 물어봤으니 답하기로 했다.
“제국 황실에서 연회 초대장을 받아서. 그거 참석하러 온 거야.”
그녀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의외네요. 전 선배가 방구석 외톨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데는 안 오실 줄 알았는데, 그래도 참 다행이네요.”
그게 왜 너한테 다행인 거니?
뭐라고 반문이라도 하려는 순간, 그녀가 품에서 익숙한 종이를 꺼내 들었다.
“저도 황실 연회에 초대받아서 왔어요. 사실은 정말 오기 싫은 곳이었는데, 할아버지께서 꼭 가야 한다고 닦달을 하셨거든요. 그나마 선배라도 계셔서 다행이네요.”
누가 들으면 한 10년 친하게 지낸 선후배인 줄 알겠네.
다행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 대해 설명해줄까 고민하던 순간, 모퉁이에서 푸른 로브를 입은 다수의 인원들이 나타났다.
분위기로 보아 그녀의 동행인으로 보였다.
일부는 내 얼굴을 보고선, 눈을 찌푸리는 등 표정관리를 못하고 있었다.
“식사 방해해서 죄송해요. 맛있게 드시고, 연회 때 또 뵙기를 바랄게요. 시안 선배.”
공손하게 손을 모아 허리까지 숙이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멋쩍게 손만 흔들어 주었다.
뭔가 마른하늘에 비를 맞은 것 같은, 이상한 기분.
여간 사차원이 아니다.
대체 뭔 말을 하고 싶어서 온 거야?
일단 갔으니, 신경 끄고 밥이나 먹자 싶어, 숟가락을 잡은 그 순간.
“그리고 제 이름은, 루나브 레인리버에요…….”
“……?”
“꼭 기억해주세요. 시안 선배.”
의미 없는 미소와 함께 자신의 풀네임을 말하고선, 내 시야에서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숟가락을 집은 오른손이 일말의 미동도 없이 한동안 허공에 머물게 되었다.
“레인리버……?”
* * *
식사를 끝낸 후, 대충 근처에 있는 아무 여관에 들어가서 방을 잡았다.
황성에 가면 알아서 게스트룸을 내주겠지만, 굳이 놈들의 울타리 안에 있어 줄 필요는 없지.
연회는 최대한 시간에 맞춰 갈 생각이다.
의자에 앉아 달이 떠오른 창문 밖을 보고 있자니, 저녁에 봤던 여자애가 여간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가람 왕국 마법학회.
마법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어떤 연구도 서슴지 않는 미친놈들이 모인 곳.
그 미친놈들의 수장이 바로 레인리버 가문이다.
리겐스 레인리버.
때에 따라선 자신의 가족도 실험 대상으로 쓰는 걸 서슴지 않는 대단히 미친놈이지.
루나브 레인리버라…….
성을 빼고 이름만 들었을 땐 누구인지 감도 못 잡았다.
그냥 학회 소속된 어느 유력가의 딸 아님 손녀일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하니 레인리버 가문의 혈손이었을 줄이야.
그녀를 보냈다던 그 할아버지는 아마 그 학회장 영감탱이일 테지.
돌이켜보면 어렴풋이 기억은 난다.
속성수치가 어느 한쪽에 치우친 것이 아닌, 불, 물, 바람, 빛, 어둠 총 다섯 개의 속성이 각각 20%로 동일하게 가진, 희귀 보유자.
즉 어느 한쪽에 치우친 것이 아닌, 저 다섯 속성의 힘을 모두 균등하게 발휘하여 마력을 펼칠 수 있는 엄청난 재능 보유자란 뜻이다.
어쩌면 나같이 한쪽 속성에 극으로 치우친 놈보다 더 귀하다고 할 수 있지.
구사할 수 있는 마법의 폭이 그만큼 넓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물론 어느 속성이든 일정 지점에선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는, 한계점이 있다.
어쨌든 그런 대단한 속성과 가문을 가졌음에도, 그 소녀는 내 기억에 없었다.
이유는 별거 없다.
뭔가 꽃을 펼쳐보기도 전에 일찍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몸이 병약했다곤 한 건, 아마도 사실일 거다.
실제로 그녀는 아카데미를 채 졸업하기도 전에 병으로 죽어버렸으니.
당시엔 별 신경 안 쓰고 지나가긴 했다만, 설마하니 그 여자애였을 줄은 몰랐군.
어쨌든 내 알 바 아니다.
연회에 오든 말든, 알아서 하라지.
난 병약한 후배님에게 신경 써줄 만큼 여유로운 선배가 아니거든.
“…….”
불현듯 내 촉감을 스치는 낯설지 않은 기운.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대로 나갈 채비를 하였다.
“어디 가십니까 주인님?”
운동을 하고 있던 브라이언이 나를 보며 물었다.
“잠깐 마실. 나나 잘 보고 있어.”
나나는 이미 꿈나라로 떠난 지 오래였다.
나는 곧 여관 밖으로 나와, 달빛이 드리워지지 않은 어두운 골목길로 향했다.
차디찬 밤공기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니, 얼마 안 가 한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안 도련님.”
에쉘의 충직한 종자, 켈린 디에고였다.
“인사 길게 할 필요 없어. 용건만 말해.”
딱딱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켈린은 내색 없이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분 정도 뒤에, 시안 도련님 주위로 다수의 잠입자들이 붙을 겁니다.”
“보낸 곳은?”
“에쉘 도련님입니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내 주위에 어떤 세력이 있다는 걸 알면, 그러지 못할 텐데? 이제 와 굳이 보낸 이유가 뭐야?”
“황성이란 점을 이용한 것 같습니다. 저희와 마찬가지로 도련님 측에서도, 설마하니 이곳에서 칼부림을 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고 봅니다.”
어느 곳이든 시작의 땅이 가지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이곳 세벨리너스 역시 마찬가지.
황실은 세벨리너스 내에서 범죄가 발생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멋모르고 살육을 벌였다간, 황실의 감시망에 걸려버리는 아주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될 터.
이걸 기회 삼아 날 감시한다는 건가?
딱히 노렸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타이밍은 잘 잡았네.
“알겠어. 지켜 볼 거 다 보고, 그대로 전달해.”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아들인 켈린은 고개를 숙였다.
허나 돌아서진 않고, 계속해서 나를 향한 시선을 유지했다.
“다른 할 말 있어?”
이에 켈린이 다소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혹 이번 연회에 참석하시는 다른 이유가 있으십니까?”
굳이 한 번 더 설명하자면 켈린은 현재 인격이 바뀐 상태다.
에쉘에게 모든 걸 바치려 했던 기존의 인격은 잠들고, 내가 주입한 새로운 인격이 그의 신체를 잠식하고 있다.
즉 저 질문의 의도는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터.
허나 온전히 알려줄 필요는 없지.
“있다면?”
나는 속내를 감춘 반문으로 답했다.
“어떤 일을 계획하시는진 모르겠지만, 잠시 보류하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이유는?”
“구체적인 것은 저도 모릅니다. 다만 이번 연회에서 1황자와 에쉘 도련님 사이에 모종의 계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계략?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게 뭔데?”
“암살입니다.”
순간적으로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암살?
재밌다 못해 아주 깜찍할 지경인데?
“대상이 누구야?”
“루나브 레인리버입니다.”
익숙하진 않지만, 모를 리 없는 그 이름.
지금, 이 순간, 잡스러운 생각들은 모두 접어든 채 단 하나의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미친 건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