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로열 아카데미 (4)
총장과 면담을 마친 시리카는 본관을 나와, 별관에 있는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아 맞다! 확인하는 걸 잊었네?”
뭔가 두고 온 게 불현듯 생각났는지, 다시 걸음을 돌려 본관 안으로 진입한 그녀는 교직원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연구 자료실로 향했다.
“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
꼭 찾으려 하면 안 보인다고, 오늘따라 위치도 가물가물했다.
책을 더듬으며 위치를 가늠해보던 그녀는 이내 한 지점에 멈춰 섰다.
“……?”
빼곡히 자리한 책장 속 유일하게 비어 있는 공간.
분명 있어야 할 무언가는 보이지 않고, 자욱한 먼지만 휘날리고 있었다.
“이거 찾으세요?”
느닷없이 등 뒤에서 들린 낯선 목소리.
시리카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 그, 그러니까…… 시안 학생 맞죠?”
목소리의 주인은 조금 전 총장과 함께 긴 이야기를 나누고 왔던 시안 베르트였다.
그의 손에는 빨간 양장본 도서가 들려있었다.
“여긴 학생들 출입제한 구역인데 어떻게 들어왔어요? 여기 있는 것들은 다 중요한 연구 자료들이라 함부로 손대면 안 되는데…….”
시안은 말없이 묘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거…… 돌려줄래요? 오늘 있을 연구 작업에 꼭 필요한 자료라서…….”
“아 네, 그럼요. 당연히 돌려드려야죠.”
시안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그녀에게 도서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시안 학…….”
손끝에서 느껴진 얇은 촉감에 시리카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가 잡은 것은 붉은색의 두꺼운 양장본이 아닌, 검은색의 얇은 종이였다.
“이거 찾으셨던 거 아니었나요, 시리카 선생님? 아니…… 시리카 당주?”
“…….”
폭풍 전 바다마냥 휘몰아치는 고요한 정적.
이내 살가웠던 그녀의 눈빛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붉은 혈기와 살기를 머금은 눈빛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너 뭐니?”
* * *
시리카 니그리티.
로열 아카데미의 학술 교관.
밝은 성격과 뛰어난 강의력을 바탕으로 아카데미 내에서 학생, 교관 상관없이 고루 인정을 받고 있는 교육자 중 한 명이었다.
허나 그것은 위장된 신분에 불과하지.
학생도, 교관도, 심지어 총장조차도 모르는 그녀의 진짜 신분이 만약 세간에 알려진다면?
로열 아카데미는 아마 그다음 날 폐쇄를 당해버릴지도 모른다.
그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대륙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모인 아카데미에서, 귀족을 사냥하는 암살조직의 당주가 교관으로 있을 거라고…….
푼수데기 같던 이전 모습은 어느 샌가 사라져 버린 그녀.
지금 내 앞엔 한 명의 암살자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밀서를 봤다고 하기엔, 근거가 너무 부족한데? 어디까지 알고 온 거니?”
양장본 속에 있던 검은 종이는 조직 내에서 비밀리에 정보를 주고받는 일종의 밀지였다.
아카데미 내에 존재하는 다른 대원들이 각 영역에서 조사한 내용을 모아다가 이곳에 숨겨놓으면, 당주인 그녀가 그것을 가져가는 방식이었다.
물론 암어로 쓰여 있는 만큼, 다른 이들이 봤다 해서 문제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설사 밀서의 내용을 알았다 해도 결코 알 수가 없는 사실을, 난 방금 내 입으로 말해버렸다.
시리카 ‘선생’도, 시리카 ‘대원’도 아닌 시리카 ‘당주’라고…….
“구질구질하게 이야기하진 않겠습니다. 보고서 판단해주시죠.”
백문이 불여일견. 나는 그녀의 물음에 답하고자 봉인해두었던 안개의 기운을 해제시켰다.
“……!”
옷깃 사이로 빠져나온 검은 안개가 주변을 잠식하였고, 서서히 자료실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시리카의 낯빛이 변한 것도 잠시,
그녀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내 옷깃을 부여잡았다.
퍼져나간 안개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거기까지. 이 이상 퍼져나가는 건 곤란해. 여기 아카데미엔 꽤 민감한 사람들이 많거든?”
손수 단추까지 잠가주던 그녀는 이내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리를 좀 옮기도록 할까?”
* * *
아카데미 별관에 위치한 시리카의 개인 연구실.
각종 마법 도구들을 비롯해, 검, 교서 등 숱한 연구의 흔적을 드러내는 물건들이 쌓여 있지만, 전부 위장품에 불과했다.
역시 위장술 하나는 끝내주는군.
시리카는 방구석에 앉아 나를 위한 홍차를 우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덤덤하시네요?”
“덤덤한 척하는 거란다. 놀란 감정을 굳이 겉으로 내보여서 좋을 건 없으니까.”
“정말 겉과 속이 너무나도 다르시네요.”
“칭찬으로 받아들이마.”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마주 앉은 나에게 차 한 잔을 건넸다.
진하고 불그스름한 것이 일반 홍차와 다를 것 없는 색깔이지만…… 뭔가 석연찮은 게 들어가 있다.
“독은 왜 넣으신 겁니까?”
“맹독은 아니니까 안심하렴. 아마 몸 안의 장기가 조금 흘러내릴 정도일 거야.”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뻔뻔함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알고는 있었다지만, 참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경지였다.
“자, 그럼 차는 안 마실 것 같으니,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시리카는 탁상에 팔을 얹은 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마주하였다.
“이야기라고 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전 이미 제가 누군지 행동으로 보여드렸는데요?”
“호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보기보다 훨씬 더 맹랑하구나. 지금 내 앞에서 ‘저 또한 미스트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거니?”
“더 증명이 필요할까요?”
그녀는 급기야 깔깔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검은 안개 정도야 마법으로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어. 게다가 우린 오늘 같이 속성검사도 함께한 사이잖아? 어둠 속성 92%…… 그 정도면 안개가 아니라 환한 대낮을 밤으로 바꿀 수 있는 수준이야.”
“제 마법 등급 보시지 않았습니까? 고작 1성에 불과한데요?”
“아카데미의 교관을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어둠 속성의 특기가 감추기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니?”
역시 쉽게 넘어오지 않는 여자다.
나는 개의치 않고 그녀가 건넨 차를 홀짝 마셨다.
“……!”
“찻잎을 좀 오래 끓이셨나 보네요. 다음번엔 연하게 부탁드립니다.”
애초에 마수의 피를 먹어온 내게, 이 정도 독은 조금 쓴 물에 불과하다.
그녀는 끝까지 포커페이스를 잃지 않았다.
“제가 전선에 있는 1년 동안 제국이 많이 시끄러워졌더군요. 가는 곳마다 호위병 필요 없냐고 들러붙어 아주 난리였습니다.”
“그런 것 치곤 딱히 고용하진 않았나 보구나. 듣자 하니까 동행한 수호 기사는 한 명이었다면서?”
“정확힌 그마저도 마부였습니다.”
이제는 종자가 되었지만.
“흠, 굉장한 자신감이네? 마부는 있었으면서 수호기사는 없었다…… 널 지켜주는 존재 따윈 필요 없었다는 뜻일까나?”
“창끝이 저를 향하고 있지 않은데, 방패를 들 필요는 없었던 거죠.”
나는 여유로운 미소로 맞받아쳤다.
언뜻 웃음이 끊이지 않는 즐거운 대화로 보일지언정, 이건 거짓된 연극에 불과하다.
내 눈엔 보인다.
살벌한 미소 속에 가려진 철조망 같은 경계심이.
이쯤에서 그녀를 좀 더 자극해보고자 한다.
“미스트는 정말로 활동을 재개한 겁니까?”
“무슨 활동~?”
시리카는 시치미를 떼듯 되물었다.
“정화 작업 말입니다. 아직 계승자가 나타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0초와 0.2초를 사이에 둔 찰나의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정확히 두 번의 반응이 일어났다.
정화 작업이란 말에 움츠려진 미간,
계승자란 말에 파르르 떨린 눈동자.
평범한 인간의 눈으론 절대 캐치할 수 없는 순간이겠지만, 내 눈엔 아니었다.
“…….”
자극이 조금 셌던 것일까?
철조망 같던 경계심이 부서지고, 이제는 그 속에 숨어있던 날카로운 살기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더불어 그녀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마나의 기운까지 피어오르고 있었다.
“민감한 사람이 많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절 여기서 죽이실 생각입니까?”
“이제는 창끝이 너를 향하고 있다는 게 좀 느껴졌니?”
“그렇다고 제가 방패를 들진 않습니다.”
창끝이 나를 향하고 있다면 나 또한 창을 들면 그만이다.
열 평 남짓 협소한 사각 공간에서 피어오르는 두 개의 살기.
그 기운들이 정면으로 부딪치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우당탕
탁상이 뒤엎이면서, 그녀의 숨겨져 있던 흑 빛의 단검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챙!
나 또한 품속에 있던 케이람을 꺼내 그녀의 공격을 맞받아쳤다.
시리카는 여전히 살의에 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화 작업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 혹시 물어봐도 될까?”
선공격 후질문이라는 건가?
“순서가 조금 잘못된 것 같은데요?”
정화작업.
명실상부 대륙 제일의 암살 집단이라 불리고 있지만, 정작 미스트 내에선 자신들의 활동을 암살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 세상의 더럽고 추악한 면모를 닦아내어 조금 더 윤택하게 만드는 정화 작업일 뿐.
결코 인간의 윤리적 범주를 넘어서는 악행이 아닌 것이다.
……라고 말은 한다지만, 그냥 암어 개념으로 쓰는 말이다.
종교에 미친 광신도들 아니고서야, 죽이면 죽이는 거지 굳이 거창하게 정화 작업이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실 대원들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표현이란 건 아는지, 자기들끼리 있을 땐 암살이란 말을 서슴지 않고 사용한다.
난 지금껏 설명한 내용을 고스란히 그녀에게 전했다.
시리카는 실성한 여인마냥 깔깔 웃으며, 검을 물렸다.
“이거 정말 너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구나. 분명 내 기억 속엔 털끝만큼도 자리하고 있지 않은데, 지금 네 몸에선 그분의 힘과 우리의 흔적이 느껴지고 있어.”
“이제라도 알아봐 주셔서 다행입니다.”
폭풍이 지나갔다고 생각한 나는 안심하고 검을 내렸다.
“그러니 더욱더 죽여야겠구나…….”
“……?”
나는 재빨리 검을 다시 들었다.
아까보다 더 맹렬한 살기를 뿜는 그녀의 검기가 다시 한 번 나에게 달려들었다.
-챙! 챙! 챙!
이전보다 더 악력이 담긴 검기였다.
“이 정도 증명으로도 부족한 겁니까?”
“아니 충분해! 넌 분명 우리의 흔적이 느껴지는 아이야…….”
살의의 미소와 함께, 그녀의 옷깃 사이로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난 널 몰라. 내가 모르는 미스트의 대원은 있을 수가 없어. 즉 넌 결코 있어선 안 될 존재야.”
허, 이거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모양이군.
우리 당주님, 생각보다 고집이 센 분이셨네.
“현명하게 생각하셔야 할 텐데요? 자칫 잘못하시면 교관으로서의 생활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네 걱정이나 하지 그러니? 넌 지금 네 인생이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인데?”
애매한 협상 따위로 넘길 여자가 아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자면, 지금 몸이 매우 근질근질하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호적수의 살기다.
하찮은 마수들이나, 나약한 인간들이 아닌, 진정한 암살자의 살기.
이런 주옥같은 살기를 앞에 두고서, 어찌 몸이 반응하지 않을 수 없을까?
허나 난 눈앞의 욕망을 좇자고 이후의 플랜을 버리는 어리석은 놈이 아니다.
“아직 두 번째 질문이 남지 않으셨습니까?”
“두 번째 질문?”
시리카의 눈동자가 또 한 번 흔들렸다.
정화 작업에 이어 그녀가 연이어 반응했었던 두 번째 단어.
“1초라도 명을 늘리기 위해 발악하는구나. 아님 시간이라도 벌려는 거니?”
“오해할까 봐 말씀드리는데, 지금 제가 당주님과 함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저희 둘 뿐입니다. 하물며 절 도와주러 올 사람이 있을 리도 없죠.”
“나도 오해할까 봐 말해주는데, 네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하든 넌 살아나가지 못해. 설사 네가 계승자라 해도……!”
“계승자인데요?”
“……?”
시리카의 입술이 순간, 일직선으로 굳어버렸다.
“계승자도 죽이실 겁니까?”
아에르를 추종하는 집단의 수장으로서 절대 지나칠 수 없는 그 말, 계승자.
내 말이 진심이든, 거짓이든 간에 이 말을 내뱉은 이상, 그녀는 결코 이 자리에서 날 죽이지 못한다.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하는 거니?”
“정 궁금하시면 확인해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케이람에 박힌 흑색의 보석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마검의 힘, 그리고 아에르의 기운이 담긴 마석.
그걸 미스트의 당주가 몰라 볼 리는 없을 터.
보석을 본 순간 그녀의 낯빛이 심각하게 변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절 아지트로 데려가 주시지요.”
(다음 편에서 계속)